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0화 (10/333)

10. 제도를 향해

#10

챙그랑. 마르야의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잘려나간 검신 두 개가 발밑을 뒹굴고 있었다.

“어···?”

로난은 그대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마르야는 멍하니 반 토막 난 칼 두 자루를 바라보았다. 깔끔한 절단면에는 실금 하나 없었다.

‘언제 잘린 거지?’

마르야는 로난의 검격이 애꿎은 허공을 가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설령 그때 닿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검이 잘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흑철검이 아닌 기존의 낡은 검을 사용했지 않은가.

마르야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줄곧 눈치를 보던 아셀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눈인사를 보냈다.

“저기···수고했어.”

아셀은 로난을 따라 사라졌다. 텅 빈 공터에는 그녀만이 남아 서 있었다. 잠시 후, 검을 내던진 마르야가 피식 웃었다.

“···웃기는 놈이네, 저거.”

****

“자, 받아.”

마르야는 약속을 지켰다. 저녁 무렵에 돌아온 그녀는 정확히 세 배의 금액이 들어 있는 자루와 함께 책 몇 권을 건네주었다.

“이게 다 뭐냐?”

“너희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나는 오늘 밤에 제도로 가야 돼.”

그것은 필레온의 역대 필기시험 문제를 총망라한 서적이었다. 두툼한 가죽으로 표지가 제본된 것이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개중에는 마르야가 직접 정리한 노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꼭 붙어. 둘 다 떨어지면 죽여버릴 거야.”

마르야는 두 사람의 목덜미를 꽉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셀은 숨이 막혀 캑캑댔고, 로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날에 늦지나 마.”

재회를 기약한 작별은 깔끔했다. 마르야는 지붕 위에서 정확히 손을 세 번 흔들고는 드러누워 버렸다.  카라벨 상단은 소년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르바스를 떠났다.

그들은 상단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참 제멋대로인 계집애였지? 가슴 큰 여자는 착하다는 소문도 믿을 게 못 되나봐.”

“응? 어···난···괜찮았는데···.”

“맞아. 좋은 애였어.”

로난의 입에는 담뱃대가 물려져 있었다. 그는 마르바스의 야경을 향해 연기를 내뿜고는 뒤돌아섰다. 막 개점한 야시장의 상인들이 호객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슬슬 돌아가자.”

“응.”

로난과 아셀은 곧장 님버튼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짐이 많아졌지만 노새를 산 덕에 쾌적한 귀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음날 오전에 님버튼에 도착했다. 감자를 캐던 이릴이 호미를 내던지며 달려왔다.

“로난!”

“다녀왔어.”

“이번에는 어딜 다녀온 거야? 안 다쳤어? 이 말은 또 뭐야?”

다정한 목소리에서는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일찍이 온갖 객지를 싸돌아다니며 사고를 친 전적 탓이었다.

“말이 아니라 노새야. 그리고 이거, 선물.”

“선물?”

로난은 이릴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탁자 위에 상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뚜껑에 카라벨 상회의 문양이 찍혀 있는 나무 상자였다.

“열어 봐.”

“아이,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어디, 우리 동생이 뭘 준비했을까~?”

꽃이나 음식 따위를 예상하고 상자를 연 이릴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상자 안쪽에는 금화와 은화가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도열되어 있었다. 척 봐도 집 한 채는 살만한 금액이었다.

“로로로, 로, 로난···? 이, 이이게 도대체···무슨···?”

“등록금 빼고 남은 돈이야. 나랑 아셀이 벌었어.”

“아셀···? 그 예쁘장하게 생긴 애? 걔, 걔한테서 뺏었다고?”

“뺏은 게 아니라 벌었다니까. 앞으로 더 벌 거고.”

로난의 말투에서 착잡함이 묻어났다. 이릴의 해진 옷은 젖은 흙이나 잔뿌리 같은 걸로 더럽혀져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못돼먹은 동생 줄 돈은 그렇게 살뜰하게 잘 모으면서, 값싼 옷 한 벌 사 입는 것은 아까워했다.

로난은 누이의 콧잔등에 묻은 흙을 살살 긁어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누나, 이제 감자 같은 거 그만 캐.”

로난은 그 말을 남긴 채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질문 공세가 쏟아지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돈의 출처를 솔직하게 말해도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그는 회귀하고 눈을 떴던 언덕 위로 향했다. 허리춤에는 이번에 얻은 흑철검이 매달려 있었다. 지켜내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술이라···니미, 그런 거 진짜 없는데.”

로난은 마을을 굽어보며 칼자루를 당겼다. 시커먼 검신은 비 오는 날의 밤하늘처럼 묵직한 검은색을 띠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필레온의 실기시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칼잡이가 잘 죽이기만 하면 됐지, 자신만의 기술을 보여 주라는 건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지.

‘나름대로 의미야 있겠지만은.’

그렇지만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해버리지는 않았다. 마나를 활용한 마르야의 검술은 제법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마나를 그 정도만 다룰 줄 알아도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토록 다니고 싶어하던 학교다. 로난은 잠자코 검을 들어 올렸다. 정수리 위로 올라간 검 끝이 직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하다 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그는 수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삼천 번을 휘두른 뒤에는 다시 수평으로 삼천 번을, 그다음에는 사선으로 삼천 번을 휘두를 예정이었다. 단순하고 미개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징벌 부대의 훈련법이었다.

로난은 루나 고블린을 잡을 때 심각성을 깨달았다. 고작 열네 번 칼을 휘두른 걸로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숙제는 이 풋내 나는 몸뚱이를 강제로 숙성시키는 것이었다. 칼질을 끝낸 뒤에는 달리기나 팔굽혀펴기 같은 기초 체력 훈련을 할 계획이었다.

“좋네. 흑철.”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검로가 정확하게 그려졌다. 잡스러운 흔들림이 없는 것이 확실히 좋은 검이었다. 로난은 저물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스튜를 끓이던 이릴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로난, 어서 와···사, 사슴?!”

땀으로 범벅이 된 동생의 어깨에는 통통한 사슴 한 마리가 메어져 있었다. 단칼에 멱을 따서 가죽에는 상처가 없다시피 했다.

로난은 능숙한 솜씨로 고기와 가죽을 분리하더니, 이번에는 화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만들어진 화로는 생김새가 꽤 그럴싸했다.

“이, 이런 건 언제 다 배웠어?”

“뭐···겸사겸사? 같이 먹자.”

방랑길과 징벌 부대를 전전하며 배운 기술이었다. 그는 발라낸 살코기를 굽기 시작했다. 내장이나 피도 버리지 않고 따로 익혀서 요리를 만들었다. 난생 처음으로 동생의 요리를 맛 본 이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 진짜 맛있따···!”

“그치? 많이 먹어.”

그녀는 음식이 입에 들어 있는 것도 잊은 채 말했다. 생김새는 투박했지만, 풍미가 아주 깊은 것이 한두 번 만들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로난은 거의 고기를 입에 쓸어담다시피 하고 있었다.

“로, 로난···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해.”

“난 괜찮아. 누나도 잘 먹어야 돼.”

이 또한 단련의 일부였다. 고강도의 운동과 영양가 있는 식사를 때려 박으면 스켈레톤도 오우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폭력적인 식사를 마친 로난은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출제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씨팔. 북부의 식사 예절 같은 걸 내가 왜 알아야 하는 거야?”

난생 처음 해보는 공부는 지루하고 졸렸다. 그럼에도 로난은 책을 계속 읽었다. 너절해진 책장이나 말라붙은 코피 자국 같은, 출처 모를 노력의 흔적이 그가 괴성을 지르며 책을 찢어발기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로난은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며 행동한다는 것은.

그날 밤, 로난은 방에 놓인 양초를 처음으로 교체했다. 공부를 마친 그는 침대에 머리가 닿는 순간 기절하듯 잠들었다. 날이 밝은 뒤에는 다시 검을 들고 언덕 위로 향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

“오, 아셀.”

“로난, 오랜만이야.”

농익은 바람에서는 아카시아 향기가 났다. 마을 어귀에서 마주친 두 소년이 인사를 나누었다. 한 달 만에 마주친 그들은 미리 짜 놓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새끼, 좀 달라졌다?”

“몸이···많이 변했네.”

아셀은 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하라고 종용했던 것이 통한 모양이었다. 늘 구부정했던 등이 펴졌고, 앙상했던 팔다리에는 미약하게나마 살이 붙었다.

언제나 얼굴에 드리워 있던 음울한 그림자도 많이 사라져 있었다. 계집애 같은 생김새는 여전했지만.

“공부는 많이 했냐?”

“그냥···그럭저럭? 마르야가 정리를 잘 해 놨더라고.”

“퉷, 재수 없는 놈.”

“그나저나 로난···무슨 병 같은 거 걸린 거 아니지?”

아셀이 걱정스레 물었다. 전에 비해 건강해진 것은 로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정도가 좀 심했다. 그래도 소년티가 나던 몸은 어지간한 성인보다 건장해져 있었다.

어깨는 옆으로 돌아누워서 자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넓어져 있었고, 키도 한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병이라니 인마, 아직 다 크려면 한참 남았어. 이 정도로는 우리 대장군님 턱에도 못 미친다고.”

“그만 커도 될 것 같은데···대장군이라니?”

“그런 게 있어. 준비는 다 했냐?”

“응.”

두 소년의 등에는 큼지막한 배낭이 메어져 있었다.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 외관에 비하면 의외로 가벼웠는데, 딱 제도로 가는 길에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녀올게 누나.”

“응, 조심해서 다녀와!”

로난이 몸을 돌렸다. 배웅을 나온 이릴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봄볕을 받은 백은발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앗! 기다려 로난. 여기 옷깃이 망가졌잖아.”

“거 대충 입으면 되지.”

“안 돼! 제도까지 가는데 확실하게 해야지!”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서 동생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로난은 얼른 누이를 님버튼에서 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 옷을 지어 입은 이릴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떤 놈팡이든 손대기만 하면 토막을 쳐 버려야지.’

로난은 단련을 하는 근근이 누이에게 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대표적인 예가 한스 패거리였다. 로난은 슬슬 상처가 아물어 가는 불량배들을 습격해서 전원을 다시금 주물러 준 뒤, 아지트에 불을 질러 버렸다.

땅바닥에서 봄비를 맞으며 빌빌거리던 소년들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내들에게 그대로 붙들려 갔다. 로난이 미리 정보를 제공한 용병단이었다.

‘후우우···제기랄, 사람이 없어, 사람이.’

‘무슨 일이에요? 내가 도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엉? 너는 뭐냐?’

우연히 술집에서 만난 용병대장은 인원이 부족해서 고심하고 있었다. 얼마 뒤면 남부의 전쟁터로 내려가야 하는데, 화살받이로 쓰기 위해 뽑은 잡부들이 모두 도망쳐 버린 것이다.

로난은 그에게 늘 피에 굶주려 있는 소년들을 알고 있다고 했다. 전원이 고아 출신이라 사라져도 뒤탈이 없다는 말을 덧붙여서.

‘사, 살려줘어어!’

‘이, 이거 풀어 줘! 로난! 로나아아안!’

용병대장은 바라지도 않았던 동전을 두둑이 쥐어 주었다. 마차의 철창을 부여잡은 채 울부짖는 고아들의 절규를 들으며, 로난은 아침에 먹었던 스튜가 참 맛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정리를 마친 이릴이 아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셀, 너도 시험 잘 봐!”

“네, 넵!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셀의 입에서 막 전입 온 신병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아셀은 이 망나니가 왜 누이에게만큼은 신사가 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마르야를 보고도 심드렁했던 이유가 있던 것이다.

이릴이 말했다.

“편하게 봐! 떨어지면 누나랑 여기서 평생 살면 되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네. 다녀올게.”

로난은 누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님버튼을 떠났다. 이릴은 두 사람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마르바스까지. 두 명이요.”

“은화 일곱 닢.”

“일곱 대 맞고 원래 가격 부를래요?”

“미안하네. 다섯 닢.”

그들은 마차를 타고 마르바스까지 이동했다. 노새를 끌고 가기에는 길이 멀기도 했고, 막상 도착했을 때 맡길 곳도 없었다.

여행용 마차는 제법 쾌적했다. 로난은 반쯤 열어젖힌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담배를 피웠다. 생각해 보니 거의 한달만에 취하는 온전한 휴식이었다. 노곤한 봄바람이 콧잔등을 간질였다.

“하···좋구만.”

달달한 꽃향기를 맡고 있자니 저절로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건너편 좌석을 바라보았다. 헝겊으로 지팡이를 닦고 있는 아셀이 보였다.

“참, 그 지팡이는 어때. 쓰니까 확실히 좋디?”

“응. 안 팔기 잘 한거 같아. 위력도 좋아지고, 집중도 잘 되고···.”

“좋긴 좋나보네···너무 좋아서 몰래몰래 엉덩이에 넣어 보고 그러는 건 아니지? 으.”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쭈, 이제 소리도 지를 줄 아네?”

로난은 낄낄거리며 지팡이를 낚아챘다. 그는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지.’ 라는 말과 함께 천박한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아셀이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둬! 그런 곳에 끼우지 마! 돌려줘!”

“크헤헤헤! 더 크게 소리쳐 봐!”

로난이 웃었다.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여정이었지만, 어쨌든 즐거운 건 즐거운 것이었다. 곁눈질로 뒤를 돌아본 마부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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