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1화 (11/333)

11. 사자와 꿈새(1)

#11

소년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마르바스에 도착했다. 땅에서 솟아난 까마득한 그림자가 동쪽 하늘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도로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 대륙의 중부와 서부를 가르는 로마이라 산맥이었다.

그들은 다음날 동이 틀 무렵에 로마이라 산악도로에 진입했다. 말이나 마차를 끌고 오지 않아서 통행료가 없다시피 했다.

“죽여주네.”

“응.”

입을 벌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싼 바위산들은 정상이 보이지 않았다. 소년들은 고개를 한껏 꺾어 가며 장관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풍경을 감상했다.

“아셀, 저거 봐봐.”

멀지 않은 곳에서는 한 무리의 산양이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가고 있었다. 산양을 처음 본 아셀이 감탄을 내뱉었다. 로난은 산양들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한 마리만 슬쩍 밀어 봐. 염력으로.”

“시, 싫어.”

“그거야 아셀. 줏대가 생긴 걸 보니 너도 사나이가 되어 가는구나. 저기 뒤쳐지는 놈이나 올려 줘.”

“그건···좋아.”

아셀은 로난의 지시에 따라 지팡이를 뻗었다. 가장 뒤처져 있던 산양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정상에 도착했다.

로난은 흡족하게 웃었다. 더 발전한 아셀의 실력도, 막 도착한 무리에게 예쁨을 받는 산양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마르야는 이미 도착했겠지?”

“어련히 잘 하고 있겠지. 왜, 보고 싶냐?”

“무, 무슨! 그런 거 아냐! 책을 돌려줘야 하니까···!”

“괜찮아 아셀, 이해해. 확실히 그런 젖탱이는 보기 드물지.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아니라니까!”

도로는 로난의 예상보다 훨씬 잘 닦여 있었다. 둥글넓적한 포석들이 깔려 있는 길은 마차 네 대가 동시에 지나갈 만큼 넓었고, 칼을 찬 경비병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을 했다.

“수고 많으십니다. 여행자님.”

“그쪽도 고생 많아요. 군 생활이 거지 같을 때는 징벌 부대의 머저리들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요. 그 새끼들은 부식도 제대로 안 나오니까.”

“가, 감사합니다.”

일정 거리마다 세워져 있는 휴게소 역시 산맥을 넘는 여행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제국과 상인 연합이 함께 관리하기에 가능한 복지였다.

‘역시 돈이 좋아.’

하지만 산악도로라는 특성상 중요한 길목 몇 군데만 막는다면 제국의 교역로는 완전히 마비될 터였다.

이제 몇 년 뒤면 나타날 겨울의 마녀가 괜히 제국 최악의 범죄자라 불리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겨울의 마녀를 소탕하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과 그녀의 화려한 최후를 떠올렸다.

“어쩌면···그 두 사람도 만날 수 있겠네.”

겨울의 마녀를 죽인 것은 검성 슐리펜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필레온 출신이었다. 아주 잠깐, 그들과 만난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어.’

하지만 로난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 일에만 신경 쓰기에도 바쁜 시기였다.

그들은 나흘에 걸쳐 로마이라를 통과했다. 산맥을 빠져나오자 다시 계절은 봄으로 돌아왔다.

얼마 걷지 않아 저 멀리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제도 발론.

천년을 구가하는 제국의 수도였다.

****

두 사람은 정오 전에 발론의 동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미리 마르바스에서 시민증을 발급받은 덕에 검문은 생략되다시피 했다.

오늘도 똥을 빨고 있는 초병들을 지나치자 체스판처럼 정돈되어 있는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초대 황제. 창세 이래 최고의 천재가 설계한 이 천년의 도시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와아아아아아···.”

“으이그, 그냥 이마에 촌놈이라고 써 놓고 다녀라.”

아셀은 조금 모자란 애처럼 제자리를 돌며 제도를 감상하고 있었다.

로난이 손가락을 뻗어 도시의 북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 크고 작은 첨탑 수십 개가 솟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가 필레온이야.”

“백탑의 소도시···바로 갈 거야?”

“아니. 사람에 깔려 죽을 일 있냐.”

그들은 필레온이 아닌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실기시험이 시작되기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접수는 우편으로 미리 해 놓았기에, 사람이 미어 터지고 있을 필레온을 굳이 들를 필요가 없었다.

“참, 그 깃털은 어떻게 됐어?”

“깃털···? 아, 그 이상한 새. 그러고 보니 그 양반 제도에 산다고 했지?”

로난은 배낭을 벗어 가장 안쪽의 주머니를 열었다. 여전히 윤기를 잃지 않은 파란 깃털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훨씬 격렬하게 들썩이는 것이, 다른 짐으로 눌러 놓지 않았더라면 바로 배낭을 빠져 나왔을 것 같았다.

로난이 깃털을 집어들었다.

“그럼 지금 한번 가 볼까?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풍성한 꼬리깃은 북쪽을 향해 휘어져 있었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은 결국 필레온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물결 속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로난이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고생을 시키는군.”

***

-삣! 삐이잇!

“으으음···왜 그러니 마르페즈?”

요란스런 새소리에 눈을 떴다. 바렌 파나시르가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눈꺼풀이 무겁고 머리가 노곤한 것이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새파랗고 복실복실한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바렌이 기르는 환상종, 꿈새 ‘마르페즈’였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꿨니···?”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바렌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더미와 창밖의 풍경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바렌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후···이번에도 쉽지 않겠군.”

그의 집무실은 필레온 13탑의 정상에 위치했다. 첨탑의 꼭대기에서는 교정과 제도의 북구를 한눈에 내려볼 수 있었다. 시험 접수를 위해 보여든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삣!

“어째 교수 일은 해도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아···다시 탐험가로 돌아가야 하나.”

황실의 초청을 받아 필레온에서 일하게 된 지 삼 년이 지났건만, 인간들과 부대끼는 일은 여전히 피곤했다.

어느새 어깨위로 올라온 마르페즈가 그의 흑갈색 갈기에 머리를 부볐다. 오늘따라 어리광을 많이 부리는 것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 힘을 내야지. 네 은인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바렌은 한 달 전에 벌어진 사건을 떠올렸다. 잠시 산책을 나간 줄 알았던 마르페즈를 영영 잃어버릴 뻔 했던 것이다.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르페즈를 구해준 은인은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켠이 아련해졌다.

짐승 하나 구해준 걸로 유세 떨 생각은 없다고 하셨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운 마음씨였다.

“깃털을 잃어버리신 것만 아니면 좋으련만···.”

바렌이 상념에 젖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차였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쑥 올라왔다.

그 중 하나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이봐요.”

“커허어엉!”

바렌은 마차에 치인 사람처럼 뒤로 날아갔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뒷걸음질치던 그는 반대편 벽에 머리를 찧고서야 멈춰섰다.

바렌이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외쳤다.

“다, 당신들은 뭡니까!”

검은 머리의 소년과 붉은 머리의 아이가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바렌의 모습을 본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사, 사자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자가 방 한구석에 주저앉은 채 포효하고 있었다. 마나가 흐트러짐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황급히 손을 뻗은 소년이 창틀과 아이의 후드를 동시에 움켜쥐었다.

“이 등신아! 마법!!”

케엑! 목이 졸린 아이의 입에서 교살당하는듯한 소리가 새나왔다. 실수로 아래를 내려다본 그가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아득히 먼 아래쪽에서 인간으로 이루어진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초인적인 힘으로 기어 올라온 소년이 창문을 걷어찼다. 와장창!

“이,이, 이게 도대체 무슨···!”

바렌은 할 말도 잊은 채 집무실로 돌입한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쌀포대처럼 어깨에 메고 있는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푹신한 소파 위에 그를 내동댕이쳤다.

“켁켁! 케에엑! 켁!”

아이는 목을 부여잡은 채 맹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다가간 소년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악!”

“얌마, 다 뒈질 뻔 했잖아! 사자는 니미, 수인(獸人) 처음 보냐?”

“미, 미안해애···.”

아이는 맞은 자리를 부여잡은 채 훌쩍였다. 숨을 고른 소년이 바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 그쪽이 바렌 교수에요?”

“그, 그렇습니다만···.”

“웨어라이온은 엄청 오랜만에 보네···제기랄, 창문은 미안하게 됐어요.”

다가온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바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나도 익숙한 파란 깃털이 그의 셔츠 앞주머니 사이로 삐져나와 있었다.

****

“교수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네. 두 분 모두 제가 초대한 손님입니다. 염려 마세요.”

필레온의 보안은 철저했다. 두 사람이 화려하게 등장한지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들이닥친 수위들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중갑과 폴암으로 무장한 수위들은 순식간에 로난과 아셀을 포위했다. 바렌 교수는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래요, 때 아닌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늘 고생해주셔서 감사해요.”

바렌은 허리를 거의 반으로 숙여 가며 사과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수위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파이까지 하나씩 쥐어서 돌려보냈다.

“허.”

소파에 앉아 있던 로난이 헛웃음을 지었다. 맨손으로 소를 도축하게 생긴 외모와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태도였다.

웨어라이온이라는 종족과 싸워 봤던 그로서는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 마르페즈를 구해주신 분들, 맞으시죠?”

“···예.”

“만나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필레온 아카데미에서 ‘환상종과의 교감과 이해’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바렌 파나시르 교수입니다.”

신장은 최소 3m. 트롤만큼이나 건장한 몸 위에는 늠름한 수사자의 머리가 얹어져 있었다. 잘 빗어진 흑갈색 갈기에서는 기품과 야성이 동시에 느껴졌다.

“입구를 못 찾는 탓에 부득이한 선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문을 여는 주문을 미리 알려드렸어야 하는데···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죄송. 거 다짜고짜 창문 깨고 들어온 놈들한테 뭐가 그리 죄송해요?”

로난이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옆에 앉아있는 아셀의 머리를 꾹 눌렀다.

“저희야말로 미안합니다. 구차한 촌극은 이걸로 끝.”

“죄, 죄송합니다아···.”

“이, 이러지 마세요! 여러분이 사과를 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네, 이제 안 그럴 겁니다. 끝이라고 했잖아요.”

로난이 다리를 꼬았다. 그는 품에서 꺼낸 담뱃대를 입에 뭄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줄곧 바렌의 어깨에 앉아 있던 마르페즈가 로난에게 다가왔다.

“잘 지냈냐?”

-삐잇!

마르페즈가 로난의 무릎에 머리를 부볐다. 깃털이 한층 더 아름다워진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해 보였다.

그는 앞주머니에서 뺀 깃털을 다시 마르페즈에게 돌려 주었다.

“마르페즈를 구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할 수 있어서 한 거예요. 그나저나 필레온의 교수셨을 줄이야. 대단한 분이셨네.”

“황제께서 보잘것없는 재주를 알아봐주신 덕이죠. 두 분은 이번에 필레온에 응시하신다고요?”

“예, 뭐.”

“꼭 합격하셨으면 좋겠군요. 제가 아는 것은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간단한 통성명을 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필레온에 입학하게 되면 반드시 자신의 강의를 수강할 것을 종용했다.

[기초 정령학]과 더불어 가장 먼저 자리가 차는 수업이었지만, 둘의 자리는 어떻게든 마련해준다고 했다.

“그나저나 새 간수를 좀 더 잘 하셔야 할 거 같아요. 그 도둑놈들, 카리볼로의 올가미 소속이었어요.”

“카리볼로···였다고요?”

“예, 그 새끼들 좆나게 끈질긴 거 아시잖아요.”

카리볼로라는 이름을 들은 바렌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눕혀져 있던 갈기가 일어나고, 덥수룩한 손등 아래 감추어져 있던 발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추악한 밀렵꾼들이 감히···.”

생각보다 악연이 깊은 모양이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의 살기가 바렌의 전신에서 번져 나왔다.

하얗게 질린 아셀이 소파로 파고들었다. 로난이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진정해요.”

“네···? 허억, 죄송합니다!”

살기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바렌은 황급히 자신의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사죄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들 앞에서 발톱을 드러내다니···.”

“아녜요. 멋졌어요.”

로난은 진심이었다. 방금 엇비쳤던 바렌의 면모야말로 그가 알고 있는 웨어라이온의 본모습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본성을 거의 완벽하게 억누르는 웨어라이온과, 그가 교수로 일하는 아카데미라니.

필레온에서의 생활이 더욱 기대가 되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바렌이 입을 열었다.

“그···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아까부터 신경쓰이던 게 있었습니다.”

“뭔데요?”

“오른쪽 주머니에 든 게 무엇인지···?”

“주머니요? ···참, 이것도 물어보려 했지.”

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구체를 꺼내들었다. 마르페즈가 낳은 정체불명의 물질이었다.

한 달이 지났지만, 딱히 외관상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얘가 낳은 거에요. 뭔지 알겠어요?”

로난은 자신의 무릎에서 졸고 있는 마르페즈를 가리켰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렌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구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이건···이럴 수가···.”

오러 각성자인 바렌은 그것이 마르페즈의 알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 꿈새의 고유한 마나가 표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정말로 당혹케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느껴지는 마나는 단지 꿈새의 것만 있던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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