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3화 (13/333)

13. 실기시험(1)

#13

백탑(百塔)의 소도시.

필레온 아카데미를 칭하는 호칭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이름 그대로 부지 내에 크고 작은 탑이 백 개가 세워져 있다 해서 붙은 별명인데, 실제로는 103개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 집은 개집이었군.”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읊조렸다. 바렌을 찾아갈 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넓이였다.

마르야가 말했다. 아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예과와 마법과의 시험이 다른 곳에서 치뤄지는 탓이었다.

“나도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네. 넓긴 하지?”

“니미, 이건 넓다는 수준이 아니야. 드래곤을 세 마리는 키우겠다.”

어지간한 영지보다 거대한 이 교육 시설은 말 그대로 도시 속의 소도시였다. 별도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부지 내에는 호수와 강, 숲, 산이 있었고, 5년간 생활할 학생들에게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로난은 아마 으슥한 어딘가에는 유흥가나 환락가도 존재할 것이라 확신했다. 학생들이 상대니까 본방까지는 안 하는 건전한 업소로 이루어진. 그는 부지 중앙의 거대한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시험을 본댔지?”

“응, 맞아. 갈레리온 본관.”

필레온에서 가장 큰 건축물인 갈레리온 성은 본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미관상으로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학적으로도 제법 괜찮은 성채였다. 무예과의 실기시험은 그곳에서 치뤄진다고 했다.

“그나저나···”

“왜?”

“차림새가 요란해서. 뭘 그렇게 빼 입었냐?”

로난은 눈썹을 으쓱였다. 마르야는 여지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굉장히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제복이었는데, 귀족가의 여식으로 보이기도 무리가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보는 시험인데 힘 좀 줘야지. 별로야? 귀염둥이는 예쁘다고 했는데.”

“그 찌질이는 네가 맨손으로 스프를 퍼먹어도 우아하다고 할 놈이니까 무시해.”

“흥, 네가 보기에는 어떤데?”

양 허리춤에는 그녀가 원래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숏 소드 두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칼집도 평소와는 다른,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금속 칼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뭐···나쁘지는 않아.”

“헤헤, 그렇지?”

마르야는 뭐가 그리 좋은지 로난의 팔을 탁탁 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하도 호탕했던 나머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몇 초 뒤, 새하얗게 질린 그녀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핫!”

“입에 벌레 들어갔냐?”

“야야, 너도 조심해. 나도 깜빡하고 있었어. 지금 여기에 귀족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귀족?”

마르야는 지금 필레온에는 대륙 전역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다 설명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찌그러져 있었는데, 응시생을 제외한 외부인과 마차의 출입을 금한다는 필레온의 규칙 때문이었다.

마르야가 다시 입을 가리며 쿡쿡거렸다.

“기가 막힐 노릇일걸. 어깨를 부딪히는 족족 시비를 걸고 싶은데, 상대방도 어느 나라의 귀족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뭘 할 수가 없거든.”

“그런데 귀족이랑 웃는게 무슨 상관이야? 귀족 앞에서는 웃지도 못 하냐?”

“그건 아니지만, 나중에 우리 상단의 주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괜히 평민 티를 내면 안 되잖아.”

“평민이 뭐 어때서?”

마르야는 고개를 들어 로난과 눈을 마주쳤다. 이쯤되면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아니면 고도의 비아냥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입술을 씰룩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좋은 귀족들도 분명히 많아. 하지만 평민을 바퀴벌레 보듯 하는 귀족들도 많지. 사업을 키우는 상인들이 겉치레와 작위에 목을 메는 이유야. 얕보이는 순간 그 거래는 공친 거거든.”

카라벨 상단의 주 수입원은 귀족들과의 거래였다. 영지를 관리하고 자산의 규모가 큰 만큼, 거래가 잘만 풀리면 큰 돈을 만질수 있었다.

하지만 거만한 귀족들과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비굴한 태도를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야 했다.

“나는 어떻게든 작위를 딸 거야. 필레온을 졸업해서, 공을 세우고 귀족이 되서, 우리 아빠가 더는 고개를 안 숙이게 할 거야.”

마르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녀가 두온을 따라다니며 겪었을 일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별 거지 같은 꼴을 다 봤겠지.

로난은 머리 뒤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해는 간다. 그런데 난 눈치 안 볼거야.”

“야!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오늘만 좀 신경 써 달라니까?”

“누가 물어보면 못 배운 하인이라 소개하던가.”

로난이 천박하게 낄낄거렸다. 다행히 귀족에게 시비를 걸리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포석이 깔린 거리를 지나 본성으로 들어갔다. 간단한 신원 조회를 거친 두 사람은 곧장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

대기실은 복도를 방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좁고 길쭉한 공간이었다.

열 개의 의자가 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입구의 맞은편 벽에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대문이 달려 있었다. 시험장과 이어진 문이었다.

대기실에는 열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이 나가면 한 명이 들어오는 식으로 언제나 열 명이 유지되었다.

일렬로 늘어선 의자에 앉은 응시생들은 저마다 준비해 온 기술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넵! 하이에른 자작가의 차남 빌케리안 오들란비 데 하이에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름이나 소속은 안 말하셔도 돼요~”

실기시험은 짧으면 3분. 길게는 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맨 앞에서 대기하던 소년이 관등성명 비스무리한 것을 대며 척척 걸어갔다.

마법이 작동하고 있는지 문 안쪽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고, 사람을 들인 문은 저절로 닫혔다.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니미~길다, 길어. 저게 어떻게 이름이냐? 주문이지.”

“좀 조용히 해···! 다리도 오므리고···!”

“이런 지루한 곳에 사람을 앉혀놨으면 담소라도 나누게 해 줘야지. 어이, 안 그래요?”

“네...넵?!”

로난은 왼편에서 대기하던 소년을 팔꿈치로 쿡쿡 찌르며 말을 걸었다.

마르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는 격식을 차릴 것이라 기대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로난에게 신경을 끄고 자신이 선보일 기술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괜찮아.괜찮아.괜찮아.괜찮아.괜찮아···.”

그때, 바로 오른편에 앉아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귀티가 흐르는 것이 척 봐도 귀족가의 자제 같았다. 마르아갸 소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히이익! 네? 아, 네! 죄송합니다 레이디! 제가 좀 시끄러웠죠?”

바짝 긴장해 있는 것이 바늘로 콕 찌르면 터질 것 같았다. 딱 봐도 필레온에 처음으로 응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괜스레 작년의 기억이 떠오른 마르야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긴장하시면 잘 풀릴 일도 안 풀려요. 첫 번째로 지원하시는 건가요?”

“아뇨, 마지막입니다. 후···꼭 들어가고 싶은데, 재능이 없는지 매번 낙방하네요.”

의외로 소년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았다. 마지막이라는 소리는 올해로 15살이 되어 내년부터는 필레온에 응시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소년을 격려했다.

“후후, 이번에는 분명 잘 될 거예요. 기운 내세요.”

“가, 감사합니다. 참 상냥하시네요. 저는 미로딘 남작가의 삼남 데어리안 마르숄 데 미로딘입니다!”

“센이에요.”

그녀는 본명이 아닌 중간 이름을 사용했다. 마르야가 악수를 청하자, 데어리안은 황급히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황녀라도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본 로난이 헛구역질을 했다. 우웩.

“가문의 검술을 선보이실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정말 완벽하게 외워 왔습니다.”

“기대가 되네요. 그 검도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 혹시 다루안 공방에서 제작한 건가요?”

“앗! 이걸 알아보시다니···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르야가 데어리안을 띄워 주면, 감격한 데어리안이 그녀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칭송하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제기랄, 타고난 상인이군.’

귀족을 대하는 마르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첫만남에 자신의 머리를 의자로 내려친 소녀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로난은 관심이 없는 척 하품을 하거나 입을 쩝쩝거렸지만 귀만큼은 그들을 향해 열어두고 있었다. 고약하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게 배꼽 냄새 같다고나 할까.

구역질을 참으면서 대화를 듣고 있자니 어느새 데어리안의 순서가 찾아왔다. 마르야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 순번이시네요, 데어리안 공자님. 부디 잘 해내시기를 빌어요.”

“레이디 센···.”

데어리안은 감동까지 받은 듯 코를 훌쩍였다. 그는 아직도 마르야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화술도 이쯤 되면 마법의 경지였다. 로난은 마르야의 뒤통수를 때리며 “멈춰라! 이 마녀야!” 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데어리안이 말했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센. 실례가 안 된다면 전체 이름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뒷날 레이디의 영지를 찾아가게 되면 반드시 오늘의 사례를 하겠습니다.”

순간 마르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데어리안은 그녀를 어디 귀족가의 여식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로난이 흥미로운 듯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 지가 기대되었다.

적당히 아무 이름이나 둘러대서 귀족 흉내를 낼 것이냐, 아니면 데어리안의 가치관을 믿고 진실을 밝힐 것이냐.

마르야는 후자를 선택했다.

“성은 없어요. 그냥 센이라고 불러 주세요”

“예?”

데어리안의 얼굴에 당혹이 감돌았다.

“저, 저기···그렇다면···혹시···평민···이라는 말씀이신지?”

배우자나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되묻는 듯한 말투였다. 데어리안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어지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뗀 마르야가 작위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네.”

“······하.”

손이 완전히 떨어졌다. 데어리안이 다짜고짜 마르야의 뺨을 후려쳤다. 짝! 손뼉을 치는 듯한 소리에 대기실의 웅성거림이 한순간 멎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 있던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어이.”

“가만히 있어.”

마르야가 속삭였다. 그녀는 로난을 살짝 돌아보며 ‘괜찮아.’ 라고 입모양으로 말해 보였다.

몇 초간 고민하던 로난이 자리에 앉았다. 날카로운 시선은 데어리안에게 고정된 채였다.

데어리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굳어진 얼굴에서 아까의 감동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그러진 눈꺼풀 사이로는 지독한 모멸과 멸시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더러운···.”

자리에서 일어선 데어리안이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가문의 인장이 각인된 고급스러운 손수건이었다. 그는 오물이라도 닦아내는 것처럼 꼼꼼하게 손을 닦기 시작했다.

“이제는 하다하다 평민 나부랭이들이 맞먹으려 드는구나.”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데어리안 공.”

마르야는 따귀를 맞았음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양손을 다소곳이 무릎 위에 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머리를 숙이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이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센이라고 했던가? 두고 봐라. 이 치욕은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도박은 실패였다. 데어리안은 마르야가 일찍이 말했던 평민들을 혐오하던 귀족 중 하나였다.

로난은 그제야 그녀가 왜 중간 이름을 댔는지 깨달았다. 섵불리 본명을 댔다가는 상단에 피해를 입힐 수도 있던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손수건이 똥 묻은 휴지라도 되는 것 마냥 던져 버렸다.

나풀거리던 손수건이 마르야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옷깃을 바로세운 데어리안이 내뱉듯이 지껄였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더러운 평민 계집. 설령 필레온에 합격하더라도 죽은 듯이 지내야 할 거다.”

“명심하지요.”

마르야는 손수건을 치우지 않았다. 로난과 눈을 마주친 그녀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때 시험장과 이어진 문이 열리며 안내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쯧, 더러운 말을 내뱉었던 혀도 닦아내고 싶군···.”

호명된 데어리안이 몸을 돌렸다. 줄곧 그를 노려보던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