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실기시험(2)
#14
호명된 데어리안이 몸을 돌렸다. 줄곧 그를 노려보던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은빛 선 몇 가닥이 허공에서 번득였다.
선들은 데어리안의 칼집과 바지 위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로난을 제외한 누구도 그의 검격을 보지 못했다. 데어리안이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툭···
“음?”
데어리안의 칼집이 끊어졌다. 기댈 곳을 잃은 롱소드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바닥과 접촉한 검신이 반으로 부러졌다.
쨍그랑!
꼭 유리나 도자기가 깨지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요란스레 울려 퍼졌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데어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다루안 공방의 작품은 두 개의 철토막이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데어리안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 바지가 폭발한 것이다.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된 데어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허어어억!”
“이야~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그러십니까?”
로난이 앉은 자리에서 박수를 쳤다. 잘려나간 바지 조각들은 마치 가을날의 낙엽처럼 하늘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금 안내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어리안 마르숄 데 미로딘 님. 안 계신가요~?”
“제, 제기랄!”
이대로 가다가는 시험도 못 보고 실격할 판이었다. 데어리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쥐어싸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 칼! 내 바지!
미친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던 그가, 로난의 허리춤을 가리키며 외쳤다.
“거, 거기! 칼을 내놔라! 당장!”
“싫은데요?”
“이놈! 척 봐도 평민인 것이 주제를 모르는구나! 나는 데어리안 남작가의···!”
“남작인지 지랄인지는 모르겠고, 왜 자기 물건 간수를 못해 놓고 내 거를 달래? 애비가 물건 간수를 제대로 못 해서 태어난 놈이라 그런가?”
“뭐, 뭣이···!”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일어섰다. 사나운 기세에 놀란 데어리안이 황급히 물러섰다. 로난은 마르야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는 손수건을 집어들었다.
“무, 물러서라 이놈! 내, 내가 누군줄 알고 이러느냐!”
“관심 없수다. 제가 주는 팁이나 받아 가시지요.”
성큼성큼 다가간 로난이 데어리안의 팬티에 손수건을 꽂았다. 마르야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엉덩이골 밖으로 삐져나온 천쪼가리가 꼬리처럼 살랑였다.
“잘 어울리는데.”
“이, 이노오옴!”
원래는 야시시한 옷을 입은 아가씨에게 어음이 적힌 종이로 하는 짓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성이 끊어진 데어리안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려는 순간, 다시 안내음이 들려왔다.
“셋 셀때까지 안 들어오시면 실격 처리 하겠습니다. 하나···둘···.”
“거 부르는데 어여 들어가 보시죠.”
“제, 젠장!”
데어리안은 거의 울면서 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로난이 칼토막 하나를 집어들었다.
“저 친구는 이제 뭐 하나. 노래라도 부르려나?”
“너 미쳤어···? 아무리 잃을 게 없다지만 그런 짓을 하면 어떡해···!”
“이럴 때는 고맙다고 하는 거야 인마.”
“아무리 가명을 댔다고 해도, 이건···! 이건···!”
하얗게 질린 마르야가 로난의 팔뚝을 탁탁 쳤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로난이 피식 웃으며 칼토막을 건넸다.
“손이나 치우고 말하시지.”
“···들켰어?”
잠시 머뭇거리던 마르야가 얼굴에서 손을 뗐다.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입술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지않아 울려 퍼진 호탕한 웃음 소리에, 대기하던 응시생들이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미, 미친놈···! 손수건, 힉, 거기다가 손수건을 왜 꽂아···!”
“흥, 천박한 평민 계집이라 그런지 웃음소리도 천박하군. 차라리 내 방귀소리가 더 감미롭겠구나.”
“그, 그만! 그만해!”
로난은 데어리안의 흉내를 내며 그녀를 부추겼다. 마르야는 의자의 등판을 끌어안은 채 발을 동동거렸다.
웃음을 참고 있던 것은 다른 응시생들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아무도 그녀의 박장대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곧이어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체감상 데어리안이 들어간 지 30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눈물을 닦아낸 마르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뺨의 쓰라림이나 수치심, 긴장감 따위는 날아가버린지 오래였다.
“다녀올게!”
마르야는 힘차게 주먹을 쥐어 보인 뒤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말총을 묶은 금발이 당당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맨 앞자리로 옮겨 앉은 로난이 손을 흔들었다.
‘웃고 싶으면 웃어야지.’
로난이 웃었다. 문이 다시 열린 것은 정확히 오 분이 지난 뒤였다.
****
옆으로 긴 테이블에는 일곱 명이 앉아 있었다. 4번 시험장을 담당하는 심사위원들이었다. 가운데 자리에 앉은 노신사, 크라바 크라티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몇 명 남았나?”
“오늘은 일흔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거 참 위안이 되는군. 자네는 감봉이야.”
크라티르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 응시생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교장으로서의 체통을 지키시라는 교수들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괜한 고집을 부렸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기운 내셔야죠. 장차 대륙을 이끌 인재들을 위해서라도.”
“그래, 나도 알고 있다네. 헌데 아침에 슐리펜 군을 봐서 그런지 영 성에 안 차는군.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말일세.”
“그것도 그렇습니다. 제국의 샛별이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더군요.”
“그나저나 아까 그 친구는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군. 생긴 건 멀쩡해 보이던데, 참.”
크라티르는 전전차례에 들어왔던 응시생을 떠올렸다.
상의만 입은 속옷 차림으로 들어온 소년은(심지어 팬티에는 손수건이 꽂혀 있었다) 혹시 칼을 빌릴 수 있겠냐며 웅얼거리다, “여긴 환락가가 아니라네! 와하하!” 라는 기도칸 교관의 말을 듣고는 울면서 뛰쳐 나갔다.
“그래도 방금 나간 응시생은 훌륭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더군요.”
“아아, 그렇지. 마르야 카라벨이랬나? 굉장한 강검(強劍) 이더군.”
“그런 인재들 덕에 우리가 보람을 느끼는 것이지요. 기록을 보니 한 번 떨어졌던데, 솔직히 납득이 안 갈 수준이었습니다.”
동의한 심사위원들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야는 오늘 시험을 치른 응시생들 중 최상위권의 기량을 보여 주었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크라티르가 입을 열었다.
“다음 응시생 들어오라 하게.”
휴식을 취하던 심사위원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안내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건장한 체격의 소년이 여유롭게 걸어 들어왔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눈매가 사나운 것이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
“다음 분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시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투기장을 연상케 하는 원형의 공간이었다.
10m정도 앞에 심사위원들이 앉는 긴 탁자가 가로로 놓여 있었다.
인간 다섯, 엘프 하나, 웨어울프 하나. 총 일곱 명의 심사위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이 가볍게 묵례했다.
“로난입니다.”
“반갑네, 로난 군. 필레온 아카데미의 현 교장, 크라바 크라티르라네.”
가운데 앉은 노신사가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로난은 그가 여기 있는 일곱 명 가장 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생사를 오가며 단련된 직감 덕이었다.
‘두 번째는 저 누님이군.’
노신사의 오른편에는 구릿빛 피부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한때 검성의 자리까지 올랐던 나비로제 교관이었다.
강렬한 이목구비와 연회색을 띄는 머리칼을 보아하니 남부 원주민이나 그 혼혈로 보였다. 그녀의 옆에는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대태도(大太刀) 한 자루가 비스듬히 탁자에 걸쳐져 있었다.
‘다들 만만찮게 생겼네.’
두 사람의 존재감이 워낙 커서 그렇지, 나머지도 하나같이 쟁쟁해 보이는 인물들이었다.
엘프 아가씨의 귀에 달려 있는 피어싱 갯수만 봐도 그걸 알 수 있었다. 미친년. 길쭉한 귀를 저런 식으로 활용할 줄이야.
크라티르가 말했다.
“그래, 자네는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할 겐가?”
“저는···으으음···.”
로난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달간의 수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나와 감응하지 못했고, 기술이라 부를 만할 것도 개발하지 못했다. 쪽팔려서 마르야나 아셀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때 셔츠를 걸친 웨어울프가 껄껄 웃었다. 사냥술 과목을 담당하는 기도칸 교관이었다.
“와하하! 긴장해서 얼어붙은 학생들은 있어도 들어와서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냥 우리 내년에 보는 게 어떤가?”
“거 급하시긴. 잠깐만 기다려 봐요.”
로난이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내저었다.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도칸의 입꼬리가 죽 찢어졌다.
“호오, 배짱 하나는 쓸만하군.”
고민을 마친 로난이 칼자루를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보여줄 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데어리안을 엿먹일 때 영감이 떠올랐다는 것일까.
“결심했나 보군. 검술인가 보지?”
“예.”
그러자 피어싱을 한 엘프 아가씨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복잡한 마법진이 생기더니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가 로난의 눈앞에 나타났다.
크라티르가 껄껄 웃으며 기사를 소개했다.
“백 년 가까이 무예과의 실기시험을 담당해온 마공학 인형일세. 우리는 경의를 담아 마도로스 경이라 부르고 있지.”
실기시험은 마도로스 경에게 기술을 시연하면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수 처리된 갑옷은 어지간한 공격에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고, 피해를 입는다 하더라도 하룻밤이면 원상복구된다고 했다.
“거 참 신기하네···음?”
기사를 흝어보던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옷 전체에 할퀸 듯한 상흔이 가득했다. 어딘가 익숙한 형태의 상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혹시 여기 슐리펜이 왔다 갔나요?”
“오? 어떻게 안 겐가?”
“그냥 찍었어요. 어지간한 공격에는 상처도 안 난다 하셨는데 나 있길래.”
“허허, 눈썰미가 좋군. 맞네. 오늘 아침에 이곳에서 시험을 치뤘지.”
역시.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하면서도 유려한, 바람이 베고 지나간 듯한 자국. 아직 미숙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슐리펜의 검흔이었다. 그는 새삼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터무니없을정도로 얕고 거칠어. 내가 과거로 돌아오긴 했구나.’
크라티르는 옆에 앉아 있는 구릿빛 피부의 여인, 나비로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마도로스 경의 갑옷에 그만한 상처가 난 것은 거진 삽십 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네. 그 전에는 누구였는지 알고 있나? 바로 이···”
“슬슬 진행하시죠.”
줄곧 말이 없던 나비로제가 툭 내뱉었다. 하도 자연스러운 말투라 무례하다는 인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헛기침을 한 크라티르가 다시 로난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네, 말이 길었군. 마도로스 경?”
철커덕. 기사가 칼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캄캄하던 투구 사이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로난에게 집중되었다.
“보여 주게나. 자네의 전부를.”
“그러죠.”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묵빛 검신이 번득임과 동시에 그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검의 궤적은 그대로 기사의 목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파아앙! 뒤늦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이 전부였다. 심사위원 한 명이 눈썹을 치켜 뜨며 물었다.
“···끝인가?”
“예.”
로난이 칼을 집어넣었다. 질문한 심사위원이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그와 비슷하거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도칸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자신감만큼의 기재는 아니군, 이거 정말 내년에 봐야 할 거 같은데?”
“기도칸 교관. 체통을 지키시오.”
“하하, 미안하네. 하지만 정말로 평범하지 않은가! 나만 기대했던 건가?”
심사위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신하게마저 느껴진 방만한 태도에 내심 기대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로난의 기술은 어떤 특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빠른 베기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마나로 감각을 강화한 이들이 놓칠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었고, 빼어난 기교가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나가 아예 느껴지지 않은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은밀한 마나를 타고난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자신이 컨디션이 안 좋아서 감지를 못한 건지.
만약에 전자라면 재고해볼만 할 가치가 있을 터였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채점을 마친 심사위원 한 명이 안경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 수고했네. 이제 가봐도 좋···.”
“맙소사.”
그때, 크라티르와 나비로제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황한 심사위원들이 술렁거렸다.
“교, 교장님?”
“나비로제 교관? 칼은 왜···?”
감정 표현이 풍부한 크라티르 교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뚝뚝한 나비로제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손에는 대태도가 쥐어져 있었다. 나비로제가 로난을 노려보았다.
“너, 뭐지?”
“예? 뭐가요?”
기묘하게 일그러진 나비로제의 표정은 부모를 죽인 원수, 혹은 평생을 찾아 헤매던 보물을 발견한 사람 같았다. 그녀가 다시금 쏘아붙였다.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누구에게 검을 배운 거지?”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의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본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허, 그게 보였어요?”
“하.”
나비로제가 실소했다.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간 그녀가 로난의 앞에 섰다.
웨어울프 기도칸의 입에서 경악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 나비로제 교관님!”
어느새 칼집에서 뽑혀나온 대태도가 로난의 목울대를 겨누고 있었다. 종이 한 장 간격을 두고 멈춰선 검끝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워.”
도신을 따라 시선을 올린 로난은 나비로제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밀림처럼 짙은 녹색을 띠는 눈동자가 타오르고 있었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그러는 너는, 보였나?”
“네. 좌측 횡으로 세 바퀴 돌면서 들어오는 베기. 어떻게 한 거예요?”
한순간 나비로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세 번이다. 네가 보여준 잔재주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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