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땅속의 비명(4)
#37
“뭐, 죽이다 보면 뭐가 나오겠죠.”
“크워어어어어!!”
동굴 거인들이 동시에 포효했다. 라만차를 움켜쥔 로난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검의 위력을 알고 있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일직선으로 쇄도한 로난이 칼을 휘둘렀다. 가장 앞장서 오던 거인의 발 두 쪽이 다리에서 분리되었다.
“크워···!”
다리 잃은 거인의 몸뚱이가 앞으로 무너졌다. 넘어지는 거인의 등을 박차며 뛰어오른 로난이 바로 뒤에 있는 거인의 어깨 위로 착지했다. 서걱. 라만차가 공중에서 원을 그리자 거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쿵!
“크워어어억!”
깔끔한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양옆에 있던 거인들이 분노하며 주먹을 날렸다. 로난은 수직으로 뛰어오르며 공격을 피했다. 콰아앙! 육중한 주먹 두 개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정말 좆같이도 생겼군.’
맞았다면 형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으깨졌을 터였지만, 안 맞았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오른쪽과 왼쪽을 고민하던 로난은 조금 더 못생긴 왼쪽 거인의 팔을 타고 달려갔다.
서걱! 다시금 라만차가 호를 그렸다. 거인의 코를 기준으로 누런 선이 생기더니 그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절반이 사라진 동료의 얼굴을 본 거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크···크웍?”
“뭘 봐.”
로난은 그대로 재빠르게 몸을 돌려 오른쪽 거인의 안구에 참격을 날렸다. 촤아아악! 반으로 갈라진 눈동자에서 누르스름한 액체가 솟구쳐 나왔다.
“크, 크어어어억!!”
거인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위를 베고 있음에도 물을 가르듯 걸리는 것이 없었다. 마나를 두르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장님이 된 거인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로난의 팔이 앞으로 쏘아졌다. 푹! 손가락 틈새로 파고든 라만차가 거인의 뇌를 헤집은 뒤 빠져나왔다.
“구웍.”
혼이 떠난 육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채 1분이 되지 않았다. 피를 잔뜩 마신 검신이 형형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로난이 다른 거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쯤 되면 겁먹을 만도 한데. 너네는 무섭지도 않냐?”
슬슬 불필요한 살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로난은 적당히 겁을 주면 거인들이 도망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답하듯 울부짖은 거인들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어억!!”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로난이 다른 거인을 향해 도약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시다면야, 뭐.”
유려한 검로가 뱀처럼 이어졌다. 늘 그렇듯이, 일이 끝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와 신기하다. 이렇게도 되네.”
로난은 발밑에 고여 있는 피 웅덩이에 라만차의 검 끝을 담그고 있었다. 웅덩이가 빠르게 줄어듦과 동시에 검신 위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여기저기가 토막난 동굴 거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참상을 둘러보던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이 친구들은 뭘 하고 싶었던 걸까요?”
“···너는 정체가 뭐냐?”
도론은 넋을 놓은 채 로난을 바라보았다. 거인들의 피를 뒤집어쓴 몸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로난은 스물 여섯 마리의 거인들을 몰살시킬 때 까지 한 번도 땅을 딛지 않았다. 꼭 맹금류가 사냥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혹시 이거 칼집은 없어요? 이대로 등에 메고 다니다간 엉덩이가 회 떠질 것 같은데.”
로난이 피를 전부 마신 라만차를 허공에 휘둘렀다. 유령이 휘파람을 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론이 입을 열었다.
“아아···칼집은 다시 만들어야 할 거 같구나.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려무나.”
“왜 다시 만들어야 하죠?”
“다른 노친네 공방에다 마무리 장식 작업을 맡겨 놨는데 저놈들이 쳐들어왔거든. 부서지진 않았겠지만, 아마 잔해 어디 깊숙한 곳에 깔려 있을 게다.”
“음···기껏 만들었는데 나중에 찾아보죠 뭐. 그나저나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하려던 말? 참, 그렇지. 기억력이 좋구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없는 돌덩이들이 끼어든 탓에 도론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도론은 비현실적인 참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나는···어쩌면 동굴 거인들의 왕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왕이요?”
“그래. 왕이든 대장이든, 아무튼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놈. 기이할 정도로 많이 모여든 것도 그렇고, 오늘 동굴 거인들이 보여준 행동에는 조직력이 느껴졌거든.”
“에이, 너무 섣부른 판단 아니에요?”
“물론 그럴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드워프는 지하의 괴물들과 가장 많은 접점을 가진 종족이란다.”
도론은 드워프들 사이에 구전으로 내려온 동굴 거인의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일반적인 동굴 거인보다 몇 배는 거대한 덩치의 왕은, 지하 깊숙한 곳에 거주하며 동굴 거인들의 왕국을 다스린다고 했다.
“그럼 갱도에서 광부들을 습격한 것도, 수십 마리가 대장간까지 따라와 행패를 부린 것도 돌멩이 왕이 시킨 짓이라는 건가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거 말고는 딱히 짐작이 가지 않는구나. 이런 일은 겪은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
로난이 턱을 매만졌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뭔가 그럴싸했다. 하긴 당장 십 년 뒤면 날개 달린 빡빡이들이 내려와서 세상을 갈아버리는데 못 믿을 게 뭐가 있겠는가?
“잘 됐네요. 그럼 제가 이 친구들이 온 곳을 따라가 볼게요. 왕이든 뭐든 다 죽이면 이딴 일은 벌어지지 않겠죠.”
“자, 잠깐···! 조금 기다려 보는게 어떠느냐? 사람들도 불렀다면서?”
“그래서 더더욱 지금 가는 거예요. 그 계집애가 누구를 불러올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이 혼자 괴물들이 도사리는 지하로 들어가겠다는데 가만 놔 둘 작자는 없거든요.”
방금 전의 저돌적인 면모를 보고 깨달았다. 동굴 거인은 공존이 불가능한 몬스터였다.
결심한 로난이 기지개를 켰다. 그는 거인의 피를 손가락으로 떠서 디디칸의 코에 문질렀다.
피에서는 지독한 유황 냄새가 풍겼다. 미간을 꿈틀대던 디디칸이 경기를 일으키며 깨어났다.
“크허어억! 허어억···! 뭐, 뭐야?! 이게 무슨 냄새···”
“디디칸. 움직일 수 있냐? 아니, 움직여야 해.”
“로난? 으으윽···제기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체들이 왜 늘어난 거 같지?”
디디칸은 지독한 숙취라도 앓는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싸맸다. 로난은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난데없이 거인들의 왕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들은 디디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왕이라니?”
“나도 몰라. 알아서 끝내고 올 테니까 도론 영감이랑 같이 위로 올라가. 시타한테 부탁하면 어지간한 부상은 낫게 해 줄 테니 참고하고.”
“시타?”
“저번에 봤잖아. 그 까맣고 근본없게 생긴 애.”
“아.”
디디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동굴 거인의 머리를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문득 디디칸의 눈이 커졌다.
“잠깐, 로난.”
“왜 그래?”
“이게 뭐지?”
디디칸이 발로 거인의 머리통을 밀었다. 미간을 좁히며 거인의 뒤통수를 살피던 그가 검지를 뻗었다.
“이거.”
“뭔데 이게?”
로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디디칸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웬 문양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빛을 뿜는 것이 굉장히 이질적인 인상을 주었다.
“얘네도 문신 같은 걸 하나?”
“그건 아닌 거 같아. 느낌이 이상한데···잠깐만.”
디디칸은 미간을 좁힌 채 다른 거인들의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부위는 달라도 같은 문양이 시체 한 구당 하나씩은 새겨져 있었다.
웨어울프의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침음을 흘리던 디디칸이 도론을 불렀다.
“도론, 잠깐 와서 이거 좀 봐요.”
“으음?”
아장거리며 걸어온 도론이 문양을 살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문양을 쓰다듬던 도론이 입을 열었다.
“이건···나도 잘 모르겠구나. 마법의 일종 같기는 한데···.”
“마법이요?”
“그래. 하지만 무슨 마법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이게 거인들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고?”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을 주물거리며 고민하던 도론이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그로서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어째 갈수록 의문만 더해지고 있었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더 궁금하게 만드네. 다녀올게요.”
“말려도 어차피 너는 떠나겠지. 부디 조심하거라.”
“그래, 로난. 이번 일은 뭔가 심상치가 않아.”
“별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마요. 이게 있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로난이 라만차를 흔들어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을 배웅한 뒤 공동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로가 나타났다. 거인들이 지나온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동굴의 왕 다음에는 정체불명의 마법이라.”
으스스한 통로에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횃불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슬슬 사람들은 다 구했으려나. 로난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지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로난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란 카파도키아를 무색하게 만드는 지저의 경이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건···정말이지···대단하군.”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로난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형색색의 발광 이끼가 아득히 넓은 공동의 벽면과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동굴이라기보다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물이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 새인지 곤충인지 헷갈리는 동물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해파리처럼 촉수를 늘어뜨린 거대 버섯들이 곳곳에 자라나 있었다.
지저가 품은 밤하늘에는 하나의 독자적인 생태계가 구성되어 있었다. 대장간 건물 몇 채가 아니라 정말로 마을을 지어도 괜찮을 법한 환경이었다.
‘돌멩이들의 왕국이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로난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눅눅한 바닥에는 동굴 거인들의 발자국이 수두룩하게 찍혀 있었다. 어디로 숨은 건지, 로난이 다 죽여 버려서 안 보이는 건지는 몰라도 원래 거인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냐, 그건 아냐. 역시 뭔가 이상해.’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남아 있는 발자국은 전부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것이었다. 이곳이 거인들의 왕국이라면 더 오래된 흔적들이 남아 있어야 했다. 로난은 단서를 바탕으로 가설을 세웠다.
지하 방방곡곡을 배회하던 거인들이 잠시나마 여기에 모였다. 모인 거인들은 일괄적으로 그란 카파도키아를 향해 이동했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윽!”
그때 바닥을 보며 걷던 로난이 무언가에 이마를 부딫혔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자 웬 노란 수정으로 이루어진 벽이 눈에 들어왔다.
벽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위쪽으로 뻗어 있었다. 뭐 이딴 게 공동 한복판에 나 있어? 별 생각 없이 벽을 살피는 순간이었다.
“씨발.”
헛숨을 들이킨 로난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마터면 칼자루를 놓칠 뻔했다.
벽이 아니었다. 온몸이 수정으로 뒤덮인 거인이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로난은 거인의 등판을 보고 벽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동굴 거인과는 차원이 다른 덩치였다. 웅크리고 있어도 이 정도인데 몸을 일으키면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헌데 뭔가 이상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었나?’
거인은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동굴 거인이 숨을 쉴 때마다 새나오는 거지 같은 유황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뭐지? 동굴 거인이 맞기는 한 건가? 로난이 거인을 자세히 살펴 보려는 차였다. 맞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가 생겼다고?”
“정확하지는 않아요. 다만 마지막으로 보낸 개체와의 연결이 끊어졌어요.”
“제기랄, 그러면 어떡해? 이제 남은 거인도 없잖아.”
“상관없어요. 어차피 시설이 모두 파괴된 것은 확인했으니까요.”
로난이 본능적으로 기척을 숨겼다. 그는 거인에게 몸을 붙인 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머지않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그럼 됐어. 이걸로 제국의 야금술과 제련술은 상당한 정체를 겪겠지.”
“퇴보할 가능성이 크지요. 장인들도 대부분 죽었을 테니.”
‘저 새끼들은 뭐야?’
대화를 엿듣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체격으로 봐서는 둘 다 인간이었다. 여인은 새하얀 로브를, 사내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로브의 생김새가 유달리 특이했는데 얼굴을 코 아래까지 가리는 후드가 꼭 동화에 나오는 사신을 연상케 했다. 그때 여인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사내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음? 왜 그러지?”
“침입자가 있는 거 같아요.”
“침입자? 마나 경계석에는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는데?”
“유황 냄새가 나요. 바로 저기서.”
여인이 턱 끝으로 로난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갑옷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기다려 보세요. 제가 다녀올게요.”
“아냐. 한번 쏴 보면 알겠지. 파이어 볼.”
별안간 팔을 들어올린 사내가 주문을 영창했다. 그의 손에서 쏘아진 화염구가 곧장 로난을 향해 날아갔다.
“이런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뛰쳐나온 로난이 바닥을 굴렀다. 거인에게 닿은 불덩이가 폭발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로난의 모습을 본 사내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이야, 진짜 뭐가 있었네?”
“동작이 민첩해요.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요.”
“아무렴 그러겠어. 파이어 월.”
로난이 사내에게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난데없이 일어난 불의 벽이 로난의 사면을 둘러쌌다. 사내가 로난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너는 뭐냐?”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이 음침한 지하에서 남녀가 단둘이 뭐 하는 거야?”
“허, 당돌한 애새끼일세. 영 마음에 안 드는데?”
사내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불의 벽이 서서히 좁혀들기 시작했다. 불에 닿은 버섯과 이끼들이 타오르며 튀기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할까. 역시 죽이는 게 맞겠지?”
“많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편이 나을 것 같네요.”
“그렇지. 이런 시시콜콜한 오차가 별의 도래를 늦출 수도 있는 법이니.”
“뭐?”
로난의 눈이 커졌다. 특정한 단어에 반응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로난의 목소리를 들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뭐냐, 꼬마야. 남길 말이라도 있는 거냐?”
“방금 뭐라 했지?”
“으음?”
“별의 도래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사내와 여인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로난을 바라보았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유감스럽지만 그 질문만큼은 대답해줄 수가 없구나. 어차피 죽을 텐데, 다른 걸 말해 봐.”
사내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호흡이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다소 고양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니지, 아니야. 댁들은 대답해야 돼. 둘 다 나랑 같이 가 줘야겠어.”
“허, 날 잡아간다고?”
사내가 코웃음 쳤다. 이거 진짜 웃기는 놈이네. 그리 말하려던 순간 로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양단된 불의 장벽만이 어둠 속에 남아 일렁이고 있었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그의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사라졌던 로난이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났다. 툭. 사내의 왼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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