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땅속의 비명(5)
#38
사라졌던 로난이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났다. 툭. 사내의 왼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타는 듯한 고통이 사내를 엄습했다.
“크, 크아아악!”
비명이 대동공에 울려 퍼졌다. 사내가 팔을 쥐어 싸며 쓰러졌다. 뼈가 보이는 단면으로 붉은 피가 울걱울걱 치솟았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통증만으로도 무력화되기 마련이지만, 로난은 틈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서걱! 곧바로 날아간 세 번의 검격이 사내의 양 발목과 혓바닥을 썰어 놓았다.
“흐허어억!”
“에두온!”
“아가씨도 같이 가야지.”
에두온이라 불린 사내가 고꾸라졌다. 로난은 곧장 여인을 향해 라만차를 휘둘렀다. 마나 실드라도 치고 있던 건지 칼날에 뭔가 틱틱 걸리는 게 느껴졌다.
촉감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수준의 실드였지만, 불행히도 상대가 로난이었다. 촤악! 여인의 허벅지가 있는 자리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선혈이 솟구쳤다.
“으윽! 시, 실드가?!”
“에이, 얕았네.”
로난이 혀를 찼다. 뼈가 잘리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인은 누가 뒤에서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몸을 뒤로 뺐다.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세리스마!”
“그건 뭐 하는 마법이야?”
그 순간 로난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셀의 염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전신을 휘감는 거대한 힘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으음!”
“그대로 삼켜버려요!”
여인이 소리쳤다. 그러자 거대한 뱀의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을 친친 감고 있는 몸뚱이 너머로 대공동의 풍경이 비쳐 보이고 있었다.
‘정령이었나···!’
여인은 어디선가 꺼낸 포션을 자신의 상처 위에 붓고 있었다. 세리스마라 불린 뱀 정령이 둥글넓적한 머리를 들이밀었다. 거대한 아가리가 위아래로 쩍 벌어졌다.
-샤아아아···.
“니미, 요즘은 여자들이 뱀 한 마리씩 기르는 게 유행이냐?”
짓눌린 갈비뼈가 폐를 압박하는 게 느껴졌다. 전신이 포박당해 있는 탓에 칼을 휘두를 각도가 영 나오지 않았다. 로난은 똬리 속에 묻혀 있는 라만차를 움켜쥐었다.
뱀의 혓바닥이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빼낸 로난이 라만차로 뱀의 눈을 찔렀다. 푹! 반투명한 검 끝이 뱀 정령의 눈을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샤아아아악!
로난을 감고 있던 몸뚱이가 튕겨지듯 풀렸다. 그대로 뱀을 밟고 뛰어넘은 로난이 여인을 향해 쇄도했다. 여인이 빠르게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지만, 라만차는 이미 그녀의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이런!”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라만차가 그린 초승달이 그대로 여인의 발목을 관통하려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익스플로전.”
순간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내달렸다. 시선을 내린 로난은 발밑에서 점멸하고 있는 거대한 마법진을 볼 수 있었다. 찰나 수십 가지 경우의 수가 로난의 머릿속에서 번득였다.
‘피하기엔 늦어. 막을 수는 없다. 베기에도 위험하다.’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난은 마나 실드만 베어낸 뒤 그대로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폭발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거대한 불기둥이 대공동 한복판에서 솟구침과 동시에 사방이 낮처럼 밝아졌다.
쿠구구구구···
머지않아 섬광이 잦아들었다. 연기가 걷히자 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로난의 판단은 옳았다. 깊고 넓은 구덩이가 로난이 있던 자리에 파여 있었지만, 그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에두온의 모습을 본 로난이 헛웃음 쳤다.
“병신이 된 줄 알았는데.”
“그녀를 놔 줘.”
에두온이 로난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으름장을 놓는 발음이 유창했다. 잘렸던 왼팔과 혓바닥이 다시 붙어 있었다.
다만, 그걸 붙었다고 해야 하는지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라 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터였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삼 일은 밥 먹을 때마다 생각나겠네. 너 인간은 맞냐?”
새로 자라난 에두온의 왼팔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얽히고설켜 꿈틀거리는 수십 가닥의 촉수는 가까스로 인간의 손을 흉내 내고 있었다.
혓바닥과 발목도 마찬가지였다. 힘줄을 대신하여 꿈틀거리는 가닥이 역겨웠다.
다물린 입술 사이로 비집고 기어나오는 촉수는 꼭 그가 살아있는 두족류를 입속에 머금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여인이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괴물이 된 에두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 에두온···.”
“잠자코 있어 아가씨. 내 칼은 사람 얼굴을 못 알아봐.”
라만차의 칼날은 종이 한 장 간격을 두고 그녀의 목과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새하얀 목덜미가 칼날에 닿으며 자상을 만들고 있었다.
에두온이 말했다.
“네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 아는 걸 전부 말해 주지. 그러니 그녀를 놓아 줘.”
한두 방울씩 흘러나오는 피는 그대로 라만차의 검신에 흡수되고 있었다.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딴 마법을 갈겨 놓은 주제에 잘도 애틋한 척을 하는군.”
“그녀에게는 내 마법을 감당할 만한 마나 실드가 있었으니까. 그걸 네놈이 이용할 줄은 몰랐지만.”
“원래 긴박한 상황에서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법이지.”
로난이 낄낄거렸다. 익스플로전이 발동되려는 찰나, 로난은 검격으로 마나 실드만 살짝 베어낸 뒤 여인을 덮쳤다.
예상한 대로 곧장 재생성된 마나 실드가 폭발을 막아 주었다. 난데없이 정색한 로난이 읊조렸다.
“그런데···너 말투가 왜 그러냐? 상황 파악이 안 돼?”
라만차가 호를 그렸다. 여인의 양쪽 발목에 붉은 선이 생겼다. 힘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피가 솟구쳤다.
“꺄아아아악!”
“시릴라!”
시릴라라 불린 여인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후드가 젖혀지며 줄곧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윤기가 흐르는 금발, 인간과 확연히 다른 길쭉한 귀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로난이 쓰러진 시릴라의 등을 짓밟으며 으르렁거렸다.
“역시 인간이 아니었군. 유황 냄새가 어쩌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
“커헉!”
엘프 혹은 하프 엘프로 보였다. 종족의 특성상 인형과도 같은 외모가 돋보였지만, 그딴 건 알 바가 아니었다. 로난은 시릴라의 목에 칼끝을 겨누며 말을 이었다.
“결정해. 이대로 잠자코 나를 따라올래? 아니면 팔다리 다 잘려서 유충 같은 꼴로 끌려갈래? 두 번은 안 물어봐.”
“젠장···!”
에두온이 주먹을 콱 쥐었다. 으득. 그의 입속에서 이빨이 부러지는 소리가 새나왔다. 몸을 부들부들 떨던 에두온이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따라가겠다.”
“좋은 생각이야. 함부로 잘랐다가 너네가 뒈지면 그것도 곤란하거든. 그럼 어서···”
문득 로난이 하던 말을 끊었다.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에두온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져 있었다.
‘웃고 있는 건가?’
갑자기 오른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섬뜩한 예감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수정으로 뒤덮힌 거대한 주먹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염병···!”
로난은 라만차를 옆으로 눕히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아앙! 거인의 일격이 작렬하며 흙먼지가 폭발했다.
로난을 날려 버린 수정 거인은 반대편 손으로 쓰려져 있는 시릴라를 집어들었다.
“그어어어어···.”
거인은 그녀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다시 후드를 눌러쓴 시릴라가 입을 열었다.
“헉···허억···시간을 끌어줘서 고마워요, 에두온.”
“어떻게 눈치챈 거지? 분명히 인식 저해와 사일런트 마법을 걸었는데.”
“그 자이파처럼 직감에 의존하는 전사에요···헉, 괴물 같으니···!”
시릴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폭발 이전부터 캐스팅하던 것은 수정 거인을 조종하는 주문이었다.
발목에서 흐르는 피가 아직도 멎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에두온과 달리 신체가 저절로 수복되지 않았다. 에두온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하긴 나도 정말 위험했어. 미친 자식, 칼질에 주저가 없더군.”
“지금···큭, 지금 죽여놔서 정말 다행이에요···.”
느닷없이 불거진 꼬맹이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에두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신 말대로 조금만 더 성장한 걸 마주쳤다면···꼼짝없이 당했겠군.”
하지만 결국 전투 경험이 승패를 갈랐다. 익스플로전과 비슷한 수법을 다시 사용할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수정 거인을 올려다본 에두온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나저나 굉장하군. 왕에 걸맞는 덩치야. 애초에 이 거인을 사용했으면 되는 거 아니었나?”
“이미 껍데기나 다름없는 상태에요···몇 분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란 걸 알잖아요.”
“참, 그랬지.”
품을 뒤적이던 그녀가 밀봉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들었다.
“먼저···헉, 돌아가 볼게요. 뒷처리를 부탁해요.”
“그래. 교단에 가자마자 치료부터 하라고.”
시릴라가 두루마리를 묶은 끈을 풀었다. 검은 종이 위로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편에 검푸른 빛무리가 생성되었다.
에두온은 로난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시릴라의 제어가 풀린 수정 거인은 아직도 오른팔을 땅에 꽂고 있었다.
형체도 찾기 힘든 곤죽이 되어 있겠군. 에두온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까운 놈···.”
-팟!
그 순간, 흙먼지 가운데 원형의 공백이 생기며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왔다.
“아?”
찰나 로난과 눈이 마주친 에두온이 입을 벌렸다. 인지가 불가능한 속도의 참격이 그의 사지를 가르며 지나갔다.
촤아악! 네 쪽의 팔다리가 동시에 몸에서 분리되었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에두온의 의식이 끊어졌다. 그 광경을 본 시릴라가 비명을 질렀다.
“어, 어떻게!”
“잡아간다고 했지?”
로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피 위에 눌어붙은 흙먼지가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 끝에 고이고 있었다.
“기다려.”
칼끝으로 시릴라를 한 번 겨눈 로난이 질주를 시작했다. 그가 수정 거인의 팔을 박찰 때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간격이 좁아졌다.
“아, 안 돼!”
시릴라가 황급히 포탈로 몸을 내던지려는 순간이었다. 로난이 쥐고 있던 라만차를 던졌다.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검이 시릴라의 무릎에 적중했다.
“꺄아아아악!”
라만차는 그대로 무릎을 꿰뚫고 거인의 몸에 박혔다. 시릴라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자신의 다리를 끊어냈다. 그 광경을 본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젠장. 지독한 년이.”
“이, 이럴 순 없어···이건 말도 안 돼···!”
엉금엉금 기어간 시릴라가 마침내 포탈에 도달했다. 그녀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로난을 돌아보며 읊조렸다.
“절대···절대로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거야. 네가 어디에 있건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야.”
“멈춰라!”
시릴라의 팔이 조금씩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아슬아슬하게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였다.
더는 던질만한 것도 없었다. 집착. 분노. 절망. 세 가지의 감정이 로난의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게 시릴라의 머리가 포탈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세상이 검게 변했다.
로난과 시릴라의 몸이 동시에 멈췄다.
“어···?”
시릴라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속 시간이 다 끝나가는 포탈이 눈앞에서 점멸하고 있었다. 당장 뛰어들어가야 했지만, 몸이 돌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슈우우욱···!
몇 초가 지나자 포탈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시릴라는 절망에 찬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로난의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나. 로난.”
“진짜···환상적인 타이밍이네요.”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마비. 다시 경험해도 참 엿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처음 당했을 때 보다는 나았다. 부들거리며 고개를 돌린 로난이 히죽 웃었다.
뱀 정령 세리스마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뱀이 시릴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대 검성의 오러, 만사(輓巳)였다.
살짝 벌어진 만사의 아가리에서 나비로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략적인 경위는 들었다. 큰 일을 해 줬더군.”
“우와···교관님이 칭찬도 할 줄 알아요?”
“나도 할 때는 한다. 그나저나···몸에 상처가 났군 로난.”
만신창이가 된 로난을 보던 나비로제가 낮게 읊조렸다. 그와 동시에 만사의 비늘이 파도가 치듯 일어났다.
“내 수업을 들어야 하는 몸에 말이야.”
“아···아아아아···.”
시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감이 마비된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릴라의 앞에 당도한 나비로제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말했다.
“네년이 내 제자를 건드렸나?”
뱀의 아가리가 닫혔다. 시릴라의 의식이 끊어졌다. 비로소 만사를 거둔 나비로제가 그녀를 안아들었다.
로난은 거인의 몸 위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적된 피로가 뒤늦게 몰려오고 있었다.
“아이고···힘들다.”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발광이끼가 만들어낸 빛이 별무리처럼 사방을 수놓고 있었다. 땅속에서 울려 퍼지던 비명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나비로제 님!”
머지않아 횃불을 든 병사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나비로제는 시릴라를 오뚜기가 된 에두온 옆에 내던지며 명령했다.
“이 두 사람을 포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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