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특급 모험 동아리(2) >
#50
전날 바렌과 나눈 대화를 떠올린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 커스 아이의 서식지라···음,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마나가 풍부한 장소겠죠. 저주도 결국은 마나의 일종이니까.
‘할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바이디안의 지맥은 그 조건에 완벽하게 상응했다. 물론 있을지도 모르는 커스 아이만을 바라보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마나가 흘러넘치는 지맥을 선점하게 되면 감응력을 기르는데도 도움이 되거니와, 부산물을 통해 제법 짭짤한 수익을 노릴 수도 있었다.
‘혼자서는 안 돼.’
그란 카파도키아 사태 때 다시금 실감했다. 위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로난은 이 동아리를 창설했다. 강림 사태까지 함께할 인재들을 모으고, 지난 삶에서 알게 된 정보들을 이용하여 전력을 강화 및 확충해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생의 기억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마르야가 재차 질문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바이디안 산맥에 뭐가 있냐니깐.”
“거 성급하긴. 제법 규모가 큰 지맥이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지맥이라는 말을 들은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전에 로난과 페나르도 샘에 들러 본 아셀은 더욱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한 번의 방문으로 향상된 마나 조작 능력과 벌어들인 금전의 액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브라움이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하하하! 잘은 모르겠지만 재밌겠군! 그래서 우리는 언제 떠나는 거지?”
“그게 문제야. 다들 수강 중인 과목이 어떻게 되냐?”
로난은 종이를 한 장씩 나눠 주면서 시간표를 그리게 했다. 죄다 우등생이라서 그런지 시간표가 대체로 빡빡한 편이었다.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바이디안 산맥까지는 가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그것도 걸어 가는 것이 아닌, 날쌘 준마를 타고 간다 가정했을 때 걸리는 시간이었다.
‘방학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원활한 활동을 위해서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다 때려치고 동아리 활동만 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지들이 배우고 싶은 걸 못 배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아셀이 자신의 시간표를 내밀었다.
“여, 여기 로난. 다 그렸어.”
“엥?”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셀의 시간표는 텅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로난은 아셀의 뺨 한쪽을 쭉 잡아당기며 말했다.
“넌 개기는 거야 뭐야 인마. 유급 지망생이야? 엉?”
“아악! 아, 아니야! 어, 얼마전에 몇 과목을 조기 이수 해서···!”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줄기의 섬광이 머릿속을 번뜩였다. 로난이 뺨을 꼬집던 손을 놓았다. 나도 아홉 과목을 조기 이수한 주제에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으우우···아, 아파아···.”
“좋아 아셀···아주 좋아. 다들 무기 들고 밖으로 따라 나와.”
“응? 갑자기?”
“엉. 원래 조금 계획을 짜고 하려 했는데 안 되겠어.”
로난이 라만차를 붕붕 휘두르며 밖으로 나섰다. 일행은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뒤따라갔다.
네스트의 중심에는 각종 실기 동아리를 위한 훈련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훈련장 한복판에 선 로난이 마르야와 브라움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내가 확인해 본 결과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건 기초 과목들이야. 그렇지?”
“그렇기는 하지.”
“와하하! 기본은 중요하니까!”
로난은 두 사람이 수강하고 있는 과목들을 다시 확인했다. 전부 자신이 예전에 조기 이수를 한 과목이었다. 그는 해당 과목들의 자세와 핵심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이게 무슨 소리냐. 기초 과목을 죄다 조기 이수해 버리면 된다는 거지.”
“···뭐?”
“앞으로 더 멀리 갈 일도 많을텐데 잘 됐어. 댁들은 오늘부터 남는 시간마다 여기로 오는 거야.”
로난이 라만차를 어깨에 얹으며 낄낄거렸다. 여러모로 잘 된 셈이었다. 안 그래도 바이디안 산맥의 위험성을 고려해 봤을 때 바로 데려가는 것은 다소 불안한 감이 있었다.
마르야와 브라움의 표정이 굳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로난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럼 마르야 너는 제국 검술, 브라움은 중급 격투술부터 해 보자. 다들 준비해.”
“야, 잠깐만. 이게 도대체···”
“얼른 칼 안 뽑아?”
딱! 로난이 칼집으로 마르야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대검을 뽑아든 마르야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악! 너 미쳤어?!”
“미친 건 아직도 제국 검술을 이수하지 못한 너지. 그 쉬운 걸 아직도 붙들고 있으면 어떡해?”
“이 밥맛아, 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마르야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딱! 딱! 딱!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정수리를 연속으로 내리쳤다.
악에 받힌 마르야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아직 손에 익지도 않은 대검으로 라만차를 막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몇 분 지나지 않아 항복 선언이 나왔다.
“아아악!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니야, 하면!”
“바로 그거야. 원래 수업에서는 목검을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그 대검을 휘둘러야 하니까 그렇게 알아.”
마르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생각만 해도 팔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 같았다. 그때 혼자서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던 브라움이 말했다.
“나는 아주 좋은 생각 같군! 헌데 중급 격투술은 대련이 중요한 과목인데, 로난 너와 대련을 하면 되는 건가?”
“그렇지. 나 없을 땐 이 계집애랑 해도 되고.”
"마르야 후배님이랑? 그래도 체급이 너무 차이나지 않나?”
브라움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 마르야와 브라움의 신장은 머리 두 개 정도의 차이가 났다.
로난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마르야에게 눈짓했다. 안 그래도 열받을 텐데 한 방 갈겨 주라는 뜻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마르야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선배를 어떻게 때려.”
“와하하! 동아리 내에서는 다 동기다 마르야! 그래도 실력 정도는 봐야 겠으니 한 번 쳐 봐라!”
브라움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때리며 외쳤다. 우락부락한 근육은 당장이라도 교복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옅게 한숨을 내쉰 마르야가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면야···.”
“그래! 괜찮으니 어섥.”
쾅! 마르야의 정권이 브라움의 복부에 처박혔다. 그의 눈이 커졌다. 헛숨을 들이킨 브라움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허어어어억···!”
“앗, 힘조절을 못했네. 괜찮아?”
“괴···굉장하군···!”
근육을 뚫고 들어온 충격이 뱃속을 뒤집어 놓았다. 주먹이 아닌 무슨 망치 같은 걸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마르야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브라움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진심으로···헉, 이 동아리에 들어오길 정말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국 검술과 대검 다루는 법은···커억, 내가 가르쳐 주마!”
“응? 그러고 보니 너도 대검이네.”
그렇게 두 사람은 별안간 대검을 뽑아들고 제국 검술만 사용하는 대련을 시작했다. 성인 남성만한 대검 두 자루가 허공에서 연달아 부딪히는 모습은 상당한 장관이었다.
‘기운이 남아 도는 걸 보니 체력 단련을 빡세게 잡아도 되겠군. 잘 된 일이야.’
로난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아셀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기···로난, 나는 뭘 하면 될까?”
“아, 맞어. 너는 저 무기들로 나를 존나게 공격하면 돼.”
로난은 훈련장 한구석에 쌓여 있는 연습용 무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잘못 들었다고 생각한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너는 염력의 사기성을 보다 살릴 필요가 있어.”
로난은 공방일체의 힘을 방어에만 사용하는 것은 극심한 낭비라고 설명했다. 그는 무기 뿐만 아니라 아셀이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해서 자신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최대한 변칙적으로 해 줘. 나도 마나를 볼 수 있게 됐는데, 훈련 좀 해야지.”
로난 또한 체력 단련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아셀이 주문을 영창했다.
“인비저블 핸드.”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수십 자루의 병장기가 공중에 떠올랐다. 하나씩 머리를 기울이며 로난을 겨누는 병장기들은 꼭 살아 있는 병사들을 보는 것 같았다.
“역시 이때만 기다리고 있었군 아셀. 날 그렇게 죽이고 싶었냐?”
“그, 그럴 리가···!”
“시끄러워 인마. 빨리 해.”
도론이 만들어 준 팔찌가 좋기는 좋은 모양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기량이 향상되어 있었다.
아셀이 팔을 휘두르자 둥둥 떠 있던 무기들이 일괄적으로 로난을 향해 쇄도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날붙이를 보며 로난이 헛웃음 쳤다.
“이 새끼 진짜 기다렸던 거 같은데.”
로난은 벌떼처럼 날아오는 병장기를 피하고 쳐내면서 마나의 흐름을 읽는 연습을 했다. 아셀의 목에 몇 번이고 라만차를 겨누면서 위기감을 조성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방금 또 뒈졌어 인마. 그 슬로우 존인지 뭔지를 니 주위에 깔아 두면 되잖아. 마법사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첫 번째 표적이라고.”
“히이익···! 아, 알았어.”
그날의 훈련은 땅거미가 내릴 무렵에야 끝이 났다. 마나 부족으로 걷지 못하게 된 아셀을 로난이 업었고, 아셀은 완전히 탈진한 마르야와 브라움을 염력으로 옮겼다.
****
“아으, 어깨야. 오랜만에 무리했네···.”
밤이 되었다. 로난은 탈진한 부원들을 기숙사에 처넣은 뒤 제1 투기장으로 돌아왔다. 간만에 한계치에 가깝게 몸을 움직였더니 전신이 뻐근했다.
“괜찮아? 여기 물.”
“고마워요, 아데샨.”
업무를 마친 아데샨이 물병을 건넸다. 이제 그녀의 상냥함도 점차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아데샨은 오늘 낮에도 제법 많은 지원자가 찾아왔다고 전해 주었다.
“방금 나간 사람들이 마지막인가? 오늘도 합격자는 없고?”
“그런 거 같네요. 이렇게 인재가 없어서야 참···.”
“아하하, 나도 조교 업무만 아니면 지원해 보는 건데.”
아데샨이 눈웃음쳤다. 그녀는 나비로제의 조교 업무 때문에 동아리 활동을 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물병을 비운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푸하···와도 안 받아줄 거예요.”
“에이, 갑자기 너까지 왜 그래?”
아데샨이 웃으며 로난의 팔을 쳤다.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한 소리였다.
최근 들어 로난의 마음은 대장군 아데샨의 유언을 관철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다름아닌 네뷸라 클라지에의 존재 때문이었다.
‘정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으니 더 날뛰겠지.’
이미 미래는 돌이킬 수 없이 비틀리고 있었다. 만약 로난이 그녀의 재능을 개화시켜 대장군으로 만든다면, 자연스레 그 광신도들의 표적이 될 터였다.
물론 네뷸라 클라지에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전생에도 아데샨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모든 흉계를 어떻게든 회피하여 대장군 아데샨이 탄생한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회귀자가 아니었다. 로난은 아데샨이 위험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번 생애까지 그 처참한 진흙탕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슬슬 말해야 하나. 꿈을 포기하라고.’
-끼이이익···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투기장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벌어진 문 틈새로는 웬 로브를 눌러 쓴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로난과 아데샨의 이목이 동시에 쏠렸다.
“저 애는···?”
어젯밤에도 찾아온 소녀였다. 물결치는 은회색 머리카락에 새빨간 눈동자. 그녀는 로난의 머리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시타를 바라보았다.
“뺘아아아···피야아아아···.”
“···있구나.”
소녀는 로난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멈춰섰다. 그녀는 시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로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면접 보러 왔어요?”
“면접···?”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특급 모험 동아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침 시간이 널널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소녀에게서 언뜻언뜻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침묵하던 소녀의 입술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너희 동아리···들어가면···있어?”
“예?”
“너희 동아리 들어가면···저 애를···계속 보고 만질 수 있어···?”
“저 애? 시타요?”
로난은 시타를 슬쩍 올려보았다. 어느덧 잠에서 깬 시타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뭐···시타는 거의 맨날 저를 따라다니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죠?”
“그럼···볼게. 면접.”
“그래요. 이름이랑 학년이 어떻게 되죠?”
“···오필리아. 마법과 3학년.”
“와씨, 기껏해야 2학년인 줄 알았는데 3학년이었네. 입학 시험이랑 똑같아요. 저기 마공학 허수아비에 가장 자신 있는 기술 하나만 날려 주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오필리아가 허수아비 앞에 섰다. 한순간 그녀의 손에 마나가 모이는 것이 보였다. 일반적인 푸른빛을 띠는 게 아닌, 피처럼 붉은 마나였다.
오러인가? 로난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오필리아가 영창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시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엥?"
한순간 로난의 눈이 커졌다. 붉게 회오리치는 액체가 그녀의 손끝에 모여들고 있었다. 로난의 시선을 감지한 오필리아가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핫···!”
그녀는 중대한 실수라도 저지른 것처럼 기존의 마법을 파하더니 새로운 주문을 영창했다. 붉은 액체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기운이 드리웠다.
“섀도우 크로.”
쭉 늘어난 오필리아의 그림자가 거대한 발톱이 되어 허수아비를 할퀴었다. 아데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둠 속성 마법···!”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염력이나 빛 속성 마법 만큼이나 희귀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로난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분명히 보았다. 오필리아가 처음에 사용하려 했던 마법은 시타와 같은 종류의 피를 다루는 마법이었다.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