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피의 갈고리(2) >
#70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의 섬뜩함이었다. 로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타나 오필리아의 것과 같은 붉은 마나가 문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씨발, 도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로난은 문을 걷어차며 건물을 나섰다. 바깥의 꼴을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홍빛을 띠는 안개가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구름?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지?”
“어디서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다, 다들 어디 갔어?! 얘들아!”
자욱한 운무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의 당황 섞인 목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이마를 짚은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미친 것들이···!”
범인은 자명했다. 그는 칼자루를 움켜쥔 채 안갯속으로 걸어갔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붉은 마나는 훈련장이 있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알싸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득한 기체 속에서 헤매는 내내 등골 시린 불길함이 털을 곤두서게 했다. 막 훈련장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쏴아아아아아···
“엥?”
별안간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한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고 있었다. 이윽고 가려져 있던 훈련장과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오필리아와 시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해. 블러드 미스트를 한 번에, 이런 규모로 해내다니···!”
“빠얏!”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좋은 기술이지만 피를 소모하는 게 그만큼 심하니까···충분한 혈액 수급이 가능한 상황에서만 하는 게 좋아.”
시타는 훈련용 허수아비의 머리 위에 앉아 네 장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안개는 전부 시타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함뿍 젖은 깃털이 검붉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안개가 완전히 사라졌다. 짝짝짝. 손뼉을 친 오필리아가 시타에게 피로 만들어진 생선을 건넸다. 안개를 모두 빨아들인 시타가 생선을 물어 챘다.
“뺘뺘.”
“바로 다음 기술로 넘어가도 될 거 같아···이번에는 공격기니까 잘 봐.”
오필리아는 시타가 앉아 있는 허수아비를 향해 오른손 검지를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앞에 붉은 구체가 생성됐다. 탕! 손톱 끝에서 발사된 구체가 허수아비의 머리에 명중했다.
“뺘아! 뺘아아!”
“검사의 발도 같아서 근사하지···나도 좋아하는 기술이야.”
시타는 날개를 파닥이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허수아비의 미간에는 도토리만 한 바람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 번 더···보여줄게.”
만족스레 미소를 지은 오필리아가 다시금 시연을 보이려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냐?”
오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로난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로난? 어떻게···?”
“어떻게? 술이라도 마셨냐? 아주 그냥 뱀파이어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지그래.”
“그게 아니라···분명히 내가 투명화와 인식 저해 장막을···”
당황한 오필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탁 트여 있는 훈련장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해져 있지 않았다.
“어?”
오필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학생들이 하나둘씩 훈련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잘하는 짓이다. 딱 보니까 너무 신나서 잊어버린 거구만. 용케도 지금까지 안 걸리셨어.”
“그러게···이건 내 실수네.”
“젠장, 일단 숨기나 해. 다른 놈들이 못 오게 막아줄 테니까.”
“···아니. 아직 수습할 수 있어.”
“뭐?”
냉정을 되찾은 오필리아가 빠르게 주문을 영창했다.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며 마나의 파장이 네스트 전역으로 펼쳐졌다. 맨 앞에서 오던 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방금까지 저기 누가 있지 않았어?”
“뭐가? 난 못 봤는데?”
“분명 안개가 이쪽으로 모였던 거 같은데···.”
로난의 눈이 커졌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인식저해와 침묵, 투명화 마법이 동시에 시전되었다.
재차 검지를 뻗은 오필리아가 이마에 구멍이 난 허수아비를 가리켰다. 콰직! 늘어난 그녀의 그림자가 턱과 같은 형상으로 솟구치며 허수아비를 집어삼켰다.
“응. 이제 됐어.”
오필리아는 모든 흔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혼란에 빠진 학생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걸어 나왔다. 로난은 투명화 마법이 덮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죽이는데···이래서 지금까지 안 걸린 거였군.”
“별 거 아니야. 숨어 살다 보니 익힌 잡기술이지···정말 대단한 건 그 아이야.”
“시타?”
오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넓은 범위에 퍼져 있던 안개를 다 흡수했네···딱히 뒤처리할 필요도 없겠어.”
“가르쳐 보니까 어때, 좀 재능이 있어?”
“재능이 있냐고···? 그림자 대공의 유년 시절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야. 이 아이는 천재···아니, 그런 개념을 넘어선 무언가야···.”
로난은 그림자 대공이 누군지 몰랐다. 그래도 늘상 무덤덤한 오필리아가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시타는 로난의 어깨에 앉은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작용하는 마나의 파장을 보고 있는 듯했다. 로난이 시타의 목을 긁어 주며 말했다.
“들었냐. 너보고 천재랜다. 개나 소나 다 천재야 그냥.”
“뺘아~”
시타가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렸다. 조금 전까지 그런 무시무시한 안개를 피운 존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도 분발해야겠네.”
범상치 않은 놈인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슐리펜은커녕 시타에게도 밀릴 판이었다. 문득 오필리아의 다른 마법을 떠올린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얘 말이야, 혈마법 말고 다른 마법도 배울 수 있을까?”
“으음···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종류가 다른 마법 두 개를 동시에 배우면 아무래도 과부하가 올 수도 있으니···일단은 혈마법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구만. 그냥 해 본 말이니까 서두르지는 마.”
지금 시전하고 있는 투명화나 인식 저해도 그렇고 굉장히 편리해 보이는 게 많았다. 가능만 하다면 배워 두면 좋을 것 같았지만, 딱히 시타를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과 한 마리는 머지않아 동아리 건물로 돌아왔다. 그들은 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전부 친 뒤에야 걸려 있던 마법들을 해제했다. 로난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훈련은 어디서 하냐.”
“나는 박쥐로 폴리모프 할 수 있으니까···그냥 필레온 밖에서 할게.”
“젠장, 매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안 그래도 개별 훈련장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다. 비단 오필리아와 시타때문만은 아니었다.
슐리펜이나 아셀. 머지않아 영입할 에르제베트 같은 괴물들이 전력을 쏟아내도 건재할 환경이 필요했다. 로난이 뒷머리에 깍지를 낀 채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남는 공간이 하나쯤은 있겠지.”
“응. 그럼 그 전까지는···밖에서 할게.”
필레온 아카데미의 부지는 어딘가에 용의 둥지가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동아리 고문인 바렌 교수도 오필리아의 정체를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 어찌어찌 될 것 같기는 했다.
“참, 시타가 선혈의 정수는 다룰 수 있을 거 같아? 나흘만에 가르칠 수 있겠어?”
“응. 이 정도의 재능이면···충분히 가능해.”
“좋아. 그럼 슬슬 시작하자.”
두 사람은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오필리아는 접선지와 날짜를 바꾸고 싶다는 메시지를 피의 갈고리에게 전달했다. 피 대신 잉크로 편지를 작성해서 자로딘이 쓴 것처럼 위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쪽 요구사항은 딱 두 개라고 해 줘. 제도에서 하루 이상 떨어져 있지 않을 것. 밀폐된 장소일 것. 나머지는 전부 그쪽에서 알아서 하라고 해.”
“위험한 조건이네···꼬마들이 수작을 부리기에 딱 좋은걸.”
“그러라고 하는 건데 뭐. 시타나 잘 가르쳐 줘.”
오필리아가 끄덕였다. 그녀는 당일 밤부터 필레온 바깥으로 나가 시타를 교육했다. 시타는 해가 뜨기 직전에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삐야아아아···.”
“뭐야, 너 왜 이래? 오필리아가 때리기라도 했냐?”
“삐윳.”
뭘 배우는지는 몰라도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발랑 드러누운 시타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로난은 시타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제 자정부터 시작한 마나 연공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그는 다른 훈련은 모두 제쳐 두고 마나 연공에만 매진했다. 아직 익숙치가 않아서 그런지 몸에서 마나를 순환시킬 때마다 어지럼증과 두통이 느꼈다.
“제기랄. 쉽지 않군.”
평생 경험치 못한 힘을 다루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고된 일이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날개나 꼬리가 생겼다면 이와 비슷하게 느껴질 성 싶었다. 로난은 날이 완전히 밝아올 무렵에야 유의미한 변화를 느끼고 잠을 청했다.
“신입이 왔다. 따돌리지 말고 친하게 지내.”
다음 날 점심에는 부원들에게 오필리아를 소개시켜 주었다. 뱀파이어라는 정체를 밝히는 것은 일단 유보해 두기로 합의를 했다. 졸린 듯이 꾸벅거리던 오필리아가 다소곳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오필리아라고 해. 마법과 3학년이고···시타를 만지고 싶어서 들어왔어.”
“아, 아셀이에요. 아니, 아셀이야.”
“와아, 인형처럼 예쁘네···무예과 1학년 마르야 카라벨이야.”
“와하하! 브라움 비오단이다. 이거 참 쟁쟁한 인물들만 들어오는군!”
그녀의 자기소개는 슐리펜을 제외한 모든 부원이 모인 자리에서 진행되었다. 오필리아의 얼굴을 유심히 훑던 마르야가 별안간 로난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비단뱀처럼 조여드는 팔뚝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얌마, 숨막혀.”
“오필리아. 혹시 얘랑은 언제부터 알게 됐어?”
“응···? 면접 때 만났지···?”
“그렇구나. 나처럼 필레온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알던 사이인 줄 알았어. 잘 지내보자.”
마르야가 과시하듯 말했다. 오필리아는 말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난은 양손을 사용하고 나서야 마르야의 팔을 떨쳐낼 수 있었다. 어째 날이 갈수록 힘이 세지는 것 같았다.
“우으으···.”
아셀은 그런 두 사람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가슴이 자꾸 저릿한 것이 새가 심장을 콕콕 쪼는 것 같았다. 그때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오필리아가 아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기억에 있어.”
“내, 내가?”
“응···우리 학년에까지 소문이 퍼졌거든···중간 평가의 모든 필기 과목에서 만점을 받은 애지?”
아셀의 눈이 커졌다. 느닷없는 성적 이야기에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트렸다. 가엾은 소년은 아직도 만점의 비결을 묻는 에르제베트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그, 그렇기는 한데···요.”
“잘 됐다···나중에 나 좀 도와줘.”
“도와달라니···?”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게 있거든···너처럼 머리가 좋은 조수가 필요했어.”
“조, 조수?”
오필리아가 주억거렸다. 아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의 체내에서 맥동하는 마나는 에르제베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오필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승낙한 걸로 알게.”
“자, 잠깐···!”
오필리아는 아셀을 무시한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가장 구석진 방에서 잠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을 본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넉살도 좋지. 이래서 오래 사는 종족은···.”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괜한 염려였던 것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피의 갈고리에서 답장이 온 것은 금요일 자정이었다.
-까악! 까악!
비쩍 마른 까마귀가 전령 역할을 맡았다. 정갈하게 접혀 있던 쪽지에는 이전처럼 핏자국 하나만 달랑 찍혀 있었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싸가지 없는 모기 새끼들. 약속 당일에 보내고 지랄이야.”
“···왔네.”
로난은 시타, 오필리아와 함께 동아리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게 채비를 마친 뒤였다. 어느새 친해진 시타는 오필리아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쪽지에 마나를 주입하자 핏자국은 다시 지도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꿨다. 확실히 저번과는 달라진 모양이 눈에 띄었다. 쪽지를 읽던 오필리아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좋은데.”
“왜 그래?”
“저쪽에서 제안한 위치가 심상치 않아. 이건···대놓고 수작을 부리겠다는 거야.”
“자로딘이 상대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밀폐된 장소니까 상관없어.”
“···머리카락은 가져왔어?”
“엉. 저번에 옷에 붙은 걸 챙겨놨지.”
로난은 오필리아에게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고동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어 있었다. 옅게 한숨을 내쉰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들의 모험을 이해할 수가 없어. 발버둥쳐봐야 백 년도 못 사는 종족이 왜 더 빨리 죽지 못해 안달인 거야···?”
“안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시타한테 선혈의 정수인지 뭔지 다루는 법은 확실히 가르쳤지?”
“그건···완벽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야.”
“거 다행이네. 바로 나가야 하니까 얼른 해 줘.”
“···알았어. 아무튼 다치지 마.”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한숨을 내쉰 오필리아가 로난의 뺨에 손을 올렸다. 마나가 그녀의 손바닥으로 모여들며 서늘한 빛을 발했다. 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