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74화 (74/333)

< 74. 비열한 내기 >

#74

“그래. 선혈의 정수를 걸고. 세 개나 있으면 해볼 만하지 않냐?”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박판 특유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발자크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런 좆만한 모기 새끼가.”

“흥미로운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놈에게 선혈의 정수와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글쎄. 과연 그럴까.”

별안간 로난이 허리춤에서 라만차를 풀어 칼집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지켜보던 오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난의 머릿속에 전음이 울려 퍼졌다.

[로난, 지금···뭐 하는 짓이야?]

로난은 오필리아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깜빡였다. 괜찮으니까 걱정일랑 내려 놓으라는 의미였다. 오필리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흥미로운 듯 눈썹을 으쓱인 발자크가 탁자로 다가왔다.

“흐음. 하나 있기는 했군.”

“애꾸라도 안목은 쓸만하네.”

“뽑아봐도 되겠나?”

“좋으실 대로.”

의외로 발자크는 무기를 만지기 전에 허락을 구했다. 검사 간의 예절을 지키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스르릉! 칼집에서 빠져나온 라만차가 본모습을 드러냈다. 곧게 일직선으로 뽑은 검신은 밤의 눈꺼풀처럼 얇고 어두웠다. 검을 면밀히 살피던 발자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묘한 물건이군. 악의만 더해지면 마검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어.”

“뭐?”

“하기야 아까부터 심상치 않기는 했지.”

발자크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별안간 아래쪽부터 치밀기 시작한 붉은 기운이 새카맣던 검신을 진홍색으로 물들였다.

“뭐야 씨발.”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여지껏 라만차를 휘두르면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몸을 돌린 발자크가 연회장의 벽면을 향해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후우웅! 피처럼 붉은 검기가 완만한 검로를 따라 쏘아졌다. 다만 일반적인 초승달 모양이 아닌 부채꼴의 물보라를 연상시키는 형상의 검기였다.

콰과광! 연쇄적인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고분이 진동했다. 돌과 먼지로 이루어진 꽃 수십 송이가 피어났다. 처참하게 파괴된 석벽의 모습을 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염병, 어떻게 했냐?”

“흉흉하군. 이런 건 내게 필요 없다.”

“어떻게 한 거냐고.”

“내게 그걸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나? 더 보여줄 게 없다면 이만 돌아가겠다.”

발자크는 고개를 내저으며 라만차를 돌려주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로난이 어깨 위에 있던 시타를 붙잡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건 어떠냐. 천년 묵은 엘프도 정체를 모르는 생물. 얼굴 반반하고, 빠르고, 밤에 껴안고 자면 따뜻해.”

“뺘?”

“오필리아, 설원에 빛나는 루비여. 기회가 닿으면 또 보도록 하지.”

시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자크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그가 막 오필리아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탁자 위로 도약한 로난이 발자크를 불러세웠다.

“기다려. 이 새끼야.”

두 뱀파이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로난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발자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느닷없는 기행에 발자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이지?”

“나를 걸겠다.”

“뭣이?”

“판돈으로 날 걸겠다는 소리야. 내가 지면 네 권속이 되어 주지. 그 조건이면 충분하지 않냐?”

“로난...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보다 못한 오필리아가 육성으로 물었다.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자크가 헛웃음 쳤다.

“나는 권속 따위를 만드는 데 피를 낭비하지 않는다. 네놈을 권속으로 만들어서 내가 얻는 게 있나?”

“당연하지. 나는 모기가 된다고 해서 단련을 멈추지 않을 거니까.”

“무슨 뜻이지?”

“권속이 되면 니가 꼴릴 때마다 싸워주마. 수명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계속 강해지는 대련 상대. 죽이지 않냐?”

발자크의 눈이 커졌다. 오만하면서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는 전투를 벌이던 짧은 시간 동안 로난이 품고 있는 전율적인 잠재력을 엿보았다. 어쩌면 두 번째 자로딘이 될지도 모르는 재목이었다. 턱을 매만지던 발자크가 별안간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재미있군. 필멸자 중에서도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져서 권속이 된다고 긴장을 풀지 않는 게 좋을걸. 너는 오 년 내로 나한테 모가지를 따일 거니까.”

“좋아, 내기에 응하지. 어디 한 번 계속 지껄여 봐라.”

“별 것도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선혈의 정수 하나야.”

“내기의 내용은?”

“이미 다 생각해 놨지. 서로 번갈아 가며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는 거다.”

로난은 미리 생각해 뒀던 내기의 규칙을 설명했다. 서로 번갈아가며 한 번씩을 공격한다. 방어나 회피는 자유. 다만 상대를 향한 반격을 행하거나 공격을 받고 1분간 일어나지 못하면 패배로 간주한다.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별달리 로난에게 유리해 보이는 조항은 없었다. 발자크는 잠꼬대라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 조건으로 정말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당연하지.”

로난이 주억거렸다. 발자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의 실력이 크게 차이 난다는 사실은 로난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 헌데 수작을 부려도 모자랄 판에 저런 조건이라니? 발자크가 헛웃음쳤다.

“스스로를 너무 고평가하고 있군. 찰나에 불과한 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객기란.”

“오래 산 모기라 그런지 주둥이가 길구만. 쫄았냐?”

“시건방지긴. 내기를 받아들이겠다. 네놈이 권속이 된다면 먼저 백 년 정도는 예의를 가르치는데 사용해 주마.”

“탁월한 선택이야. 그럼 계약서를 써 보실까.”

두 사람은 자신들의 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제삼자인 오필리아가 입회인이 되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로난을 말리기 위해 전음을 보냈지만, 로난은 연신 한쪽 눈을 깜빡이며 괜찮다는 뜻을 전할 뿐이었다.

[···완전히 미쳤어.]

내기의 규칙과 판돈이 순서대로 기재되었다. 두 사람이 서명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양피지가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피로 쓰인 글자만이 남아 종이 위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글자는 사슬처럼 일렬로 늘어서며 로난과 발자크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피의 맹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로난은 자신이 맹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엿 같은 기분이네.”

“맹약의 구속력이···심장을 휘감은 거야.”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이질감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로난과 발자크는 연회장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섰다. 발자크가 여유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지.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하고 하는 게 좋을 거다.”

“거 고맙군.”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오필리아가 심판을 맡았다. 발자크는 신호를 기다리는 내내 피식 피식 웃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완전히 죽이지 않고 힘 조절을 하는 게 차라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전전긍긍하던 오필리아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시작.”

쾅! 로난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주변에서 모여든 어둠이 발자크의 손발을 휘감으며 갑옷의 형태로 변모했다. 어둠 마법으로 만들어낸 그의 갑옷은 미스릴 만큼이나 방어력이 뛰어났다.

간격은 순식간에 좁혀졌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참격을 본 발자크가 눈썹을 으쓱였다.

‘빠르다.’

속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쾌검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저 휘둘러서 벨 뿐인 지극히 평범한 공격. 방금의 싸움에서는 회피했지만, 막상 방어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실망스럽군. 그래도 비장의 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로난이 내뱉을 절규가 벌써 귀에 선했다. 발자크는 씁쓸하게 웃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서걱! 그대로 갑옷을 파고든 라만차가 발자크의 목과 팔다리를 가르며 지나갔다.

“아?”

벌어진 일을 인지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야가 어지럽게 회전함과 동시에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통이 닥쳐왔다. 발자크의 입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악!!”

갈 곳 잃은 사지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바닥에 떨어진 발자크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낮아진 그의 시야 너머에서 로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 고생했다 발자크. 선혈의 정수는 잘 받아가마.”

“어, 어떻게!”

“내가 그걸 알려줄 의무는 없지. 거기 누워서 셋 중에 어떤 정수를 뱉어낼 지나 생각하고 있어.”

발자크는 주위에 널브러진 자신의 팔다리를 바라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밀도의 마나로 짜여진 갑옷이 두부라도 된 것처럼 썰려 나갔다.

“오필리아. 1분 똑바로 세!”

로난이 벙쪄있는 오필리아에게 외쳤다. 확실히 발자크의 갑옷은 썩 괜찮은 마법 같았다. 칼끝을 타고 전해지는 쫀득한 촉감이 그 사실을 반증했다.

물론 마나를 자를 수 있는 로난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천박하게 낄낄거리며 병신이 된 발자크를 조롱했다.

“기왕이면 실하고 탱탱한 놈으로 부탁해. 잘 익은 수박처럼 말이지.”

“크으으···이대로 당할 것 같으냐···!”

발자크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안면 곳곳에 굵직한 핏줄이 올라왔다. 20초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콰직! 몸체의 깔끔한 절단면 위에서 네 개의 팔다리가 폭발하듯 자라났다. 로난의 미간이 구겨졌다.

“씨발.”

비틀거리며 걸어간 발자크의 몸뚱이가 자신의 머리를 집어들었다. 절단면 아래로 늘어진 혈관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주저없이 머리를 원위치에 꽂아 넣었다. 목을 양분하던 붉은 선은 순식간에 아물었다. 우두둑!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 발자크가 로난을 노려보며 말했다.

“후···후흐흐, 재밌구나···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어쨌든 내 차례군. 준비해라.”

평정을 되찾은 목소리에서는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회복력이었다. 흡혈귀의 기준으로도 사지의 절단은 재생에 수 시간에서 며칠씩 걸리는 중상이었다.

“로난···.”

오필리아의 안색은 빙하처럼 창백했다. 로난은 손짓으로 그녀를 안심시킨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세를 다잡은 발자크의 얼굴에서 여유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더는 너를 얕보지 않겠다. 가짜 자로딘. 아니, 로난.”

“젠장, 빨리 하기나 해.”

발자크는 오필리아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짓씹으며 머뭇거리던 그녀가 속삭이듯 읊조렸다.

“······시작.”

한순간 붉고 검은 기운이 발자크의 발밑으로 빨려들었다. 대기 중에 있던 마나가 고갈된 듯이 말라붙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사방의 어둠이 일렁이며 그림자로 이루어진 야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이 헛웃음 쳤다.

“이것도 한 번으로 치는 거냐?”

“갈기갈기 찢긴다 해도 고쳐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발자크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톱 사이로 흘러나온 혈액이 기다란 장창의 형태를 이루며 그를 겨냥했다.

로난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선회하고 있는 장창은 모두 다섯 자루. 하나하나의 길이가 족히 3M는 되는 거병이었다.

딱! 발자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야수들이 맹렬하게 달려듦과 동시에 피의 창이 쏟아져 내렸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그래···갈 때까지 가 보자.”

로난은 자세를 낮추며 횡으로 참격을 날렸다. 그림자 늑대의 머리 두 개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세 마리를 더 처리한 로난이 측면으로 몸을 굴렸다. 콰앙! 바로 뒤에서 쇄도해온 그림자 곰의 앞발이 그가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곰까지 썰어버린 뒤 고개를 들자 붉은 장창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야수들까지 꿰뚫으며 날아오는 장창을 본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서걱! 로난은 짧게 회전하며 피의 창을 베어냈다. 곧바로 도약한 야수들이 로난을 에워쌌다. 그는 팔을 크게 휘두르며 검기를 쏘았다. 토막난 야수들의 형체가 허물어지며 빈틈이 생겼다.

하지만 숨을 돌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허공을 선회하던 장창 두 자루가 빈틈을 메우며 날아들었다. 보고 판단하면 늦었다. 본능에 따라 뻗어나간 라만차가 장창을 세로로 양단했다.

‘그때와 비슷하군.’

문득 로난은 아하유테와의 일전을 떠올렸다. 대머리가 쏘아낸 빛의 창은 일격에 대대 하나를 날려 버렸다. 깃털이 떨어진 자리에서 일어난 마물들은 단신으로 기사단을 몰아붙였다.

로난은 그 모든 것을 베어내고 나서야 아하유테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길을 뚫느라 희생된 동료들의 시체를 짓밟으면서.

당시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다만 아직 여물지 않은 육체가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서걱. 로난은 자신의 허벅지를 할퀸 그림자 사자를 갈기갈기 썰어 버렸다. 제법 깊은 상처였으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점차 예리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로난은 춤을 추듯이 검을 휘둘렀다. 지켜보던 발자크가 진심 어린 감탄을 흘렸다.

“대단하군.”

왜 그런 형식의 내기를 제안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검사였다. 족히 백 마리는 될법한 야수들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썰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아직 미숙해.”

발자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일격’은 아직 진행되는 중이었다. 한 번씩 번갈아 가며 공격을 주고받는다는 단순한 규칙의 맹점을 노린 판단이었다.

그가 손짓으로 신호하자 남아 있던 야수들이 전부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야수들 사이로 사라졌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눈치챈 오필리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하지 마!”

발자크는 오필리아를 무시한 채 손가락을 튕겼다. 두꺼운 방어막이 그와 오필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아아악!

-그어억!

별안간 야수들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는 창들이 동시에 야수들을 꿰뚫었다. 콰아아아앙! 피와 그림자로 이루어진 대폭발이 연회장을 집어삼켰다. 굳어 버린 오필리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아···아아···.”

“내 공격은 이걸로 마치지.”

도저히 살아날 수 있는 폭발이 아니었다. 방어막이 사라졌다. 파괴되다 못해 넓어진 연회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몇 초나 지났을까? 느닷없는 기침 소리가 연막 속에서 울려 퍼졌다.

“쿨럭.”

“······!”

두 뱀파이어의 눈이 커졌다. 불안정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드러난 로난의 모습에 발자크가 헛웃음 쳤다.

“이걸 버티다니.”

“커억, 헉···진짜로···뒈질 뻔했다 이 새끼야···.”

로난의 몰골은 핏물에 한번 담궜다 뺀 걸레 같았다. 전신에 난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가 잘리거나 끊어지는 등의 치명상은 없었다. 비슷한 경험을 두 번이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은 아하유테와의 일전, 다른 한 번은 얼마 전에 정통으로 처맞았던 슐리펜의 폭풍검이었다. 날아온 시타가 치유의 마법을 쓰자 상처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뺘앗!”

“고맙다 시타. 후우, 이제 좀 살 거 같네.”

“무슨···타인의 도움을 받아 회복하다니···!”

“계약서에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아.”

발자크가 입술을 비틀었다. 로난이 미숙하다 생각한 것은 명백한 오판이었다. 그 또한 계약의 맹점을 파고든 것이었다. 그것도 발자크보다 훨씬 교활하게. 스트레칭을 하듯 몸을 푼 로난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럼 이제···내 차례군.”

로난이 라만차를 움켜쥐었다. 얼어붙어 있던 오필리아가 가까스로 신호를 보냈다. 발자크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두 번을 당할 거 같으냐!”

그 순간 로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피를 마신 라만차의 참격은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고 날카롭게 날아오고 있었다.

반면 발자크의 몸은 더 무거워져 있었다. 재생과 기력에 혈기를 소진한 탓이었다. 그는 주변에 잔존해 있는 피와 마나를 흡수하는 것을 시도했다.

“음···?”

헌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그림자 야수들과 장창이 폭발하며 산재해 있어야 할 피와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발자크의 시선이 로난의 뒤편에 있는 괴생명체를 향했다. 날개를 활짝 펼친 시타의 몸으로 인근의 피와 마나가 모두 빨려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뺘아?”

“이런, 더러운···!”

애초에 조작된 승부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로난의 참격이 쏟아졌다.

재차 갑옷을 찢어발긴 라만차가 무방비 상태의 육신 위에 붉은 선 수십 획을 만들었다. 빠르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로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안하게 됐다. 못 배워먹은 놈이라.”

발자크의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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