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75화 (75/333)

< 75. 소생(1) >

#75

애초에 조작된 승부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참격이 쏟아졌다. 무방비 상태의 육신 위에 붉은 선 수십 가닥이 새겨졌다. 빠르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로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안하게 됐다. 못 배워먹은 놈이라.”

발자크의 의식이 끊어졌다.

.

.

.

“···으음.”

발자크가 눈을 떴다. 귀가 먹먹하고 등 밑이 차가웠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뒈진 거 아냐?”

“정수가 세 개나 있으니 죽지는 않을 거야···재생도 거의 다 됐고.”

“그럼 다행이네. 보통은 저거 반만 썰려도 죽더라고.”

가까스로 머리는 재생된 모양이었다. 헌데 몸 군데군데 감각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발자크가 주변을 살폈다. 그는 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웅덩이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재생 중인 몸뚱이는 아교로 얼기설기 이어붙인 도자기를 연상케 했다. 핏물 속에는 자신의 육신을 이루던 파편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철벅. 다시 머리를 뉘인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졌나.”

“아, 깨어났다.”

발자크는 말없이 정신을 집중했다. 웅덩이가 빠르게 말라붙기 시작했다. 이윽고 피와 살을 모조리 흡수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재생을 마친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로난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으 씨발. 뭐라도 좀 걸쳐라.”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지?”

“10분정도.”

“서른 번은 죽일 수 있던 시간이군.”

발자크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넝마 하나를 집어들어 몸을 감쌌다. 그리고 말없이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있는 자리에서 스며나온 선홍색 빛무리가 그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발자크가 선혈의 정수를 내밀며 말했다.

“가져가라.”

“호쾌해서 좋네.”

“피차 더러운 수를 쓴 건 마찬가지니까. 나는 졌고 너는 이겼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오필리아가 시타와 함께 다가왔다. 발자크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필리아. 간만에 만났는데 추한 몰골만 보여줬군. 미안하다.”

“아냐, 잘 싸웠어.”

“허식 따위는 필요 없다. 그나저나 이제 나를 용서한 건가?”

오필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발자크와 세 발자국 이내로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지만···이 정도 거리라면···.”

“이백 년 만의 진취인가. 감격스럽군.”

발자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음을 흘렸다. 오필리아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타와 함께 발자크의 손에서 맥박치고 있는 정수를 가공하기 시작했다.

“옳지, 그렇게. 서서히 얼린다는 느낌으로.”

“뺘.”

굉장히 정밀한 혈마법이 행해졌다. 순수한 마나의 덩어리가 실체를 갖춘 물질로 변모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가공 처리를 마친 선혈의 정수가 시타의 입에 물려졌다. 보석 형태의 결정은 세상의 모든 적색을 품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로난이 시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생했다. 오늘은 진짜로 너가 다 했네.”

“빠야아~”

갸르릉거리던 시타가 로난에게 정수를 전달했다. 그 순간 로난과 발자크의 명치 위로 사슬처럼 늘어선 글자들이 빠져나왔다. 피의 맹약이 효력을 다한 것을 확인한 발자크가 몸을 돌렸다.

“그럼 나는 가 보겠다. 기회가 닿으면 다시 만나지, 오필리아.”

“응. 잘 가.”

불현듯 발자크의 몸을 감싸던 망토가 떨어졌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망토 아래 드러난 것은 알몸의 변태가 아닌 회갈색을 띠는 거대한 박쥐였다. 애꾸눈의 박쥐가 로난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로난. 널 기억하겠다.”

“그러시던가. 정수는 잘 쓰마.”

“강해져라. 다음번에는 제대로 된 승부를 기대하지.”

발자크가 날개를 펼쳤다. 익폭이 족히 4m는 되어 보였다. 단 한 번의 날갯짓과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로난은 발자크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한바탕 지랄을 떨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네.”

“응. 원래 저런 남자니까.”

“후우우우···뒈질 뻔 했네 진짜···.”

로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폴리모프가 해제되며 본모습이 돌아왔다. 그는 만약에라도 심기가 뒤틀린 발자크가 달려들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더럽게 강했지. 진짜로.’

온갖 더럽고 치사한 수단을 동원해서야 이길 수 있었다. 아닌 실전이었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패배했을 터였다. 다시금 강해져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재도전은 몸이 좀 자란 다음에 해야겠어. 내 더러워서.’

애새끼의 몸으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적이었다. 어느정도 마음을 추스린 로난이 피식 웃었다. 결코 명예롭지는 않은 승부였지만,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였다. 그는 오필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아냐. 난 아무것도···한 게 없는걸.”

“이럴 때는 말이지, 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면서 알고 있으면 가진 걸 다 내놓으라 하는 거야.”

진심이었다. 오필리아가 없었더라면 많은 것이 틀어졌을 것이다. 기지개를 켠 로난이 등을 돌렸다.

“그럼 먼저 돌아가. 나는 여기를 좀 더 뒤져보다 갈 테니까.”

“도굴은···권장하지 않아.”

“얌마, 내가 뼛가루 묻은 돈이나 훔칠 만큼 한심한 놈으로 보이냐? 뭐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

아무래도 건축 양식이 사란테의 신전과 비슷한게 마음에 걸렸다. 로난은 그 말을 남긴 채 연회장을 나섰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적당한 금붙이가 보이면 주워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멀뚱이 서 있던 오필리아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가라니까. 한참 걸릴 수도 있어.”

“아냐. 나도 이런 거 좋아해···어차피 할 것도 없고.”

“그러냐.”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고분을 돌아다녔다. 이미 여러 차례 도굴을 당했는지 곳곳에 파손되거나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둘이 무슨 사이냐? 옛날에 사귀기라도 했어?”

“그냥 소꿉친구야. 발자크는···어린 시절을 우리 성에서 보냈거든.”

“평범한 소꿉친구라기에는 거리감이 좀 있던데. 뭐 묻히고 달려오는 똥개처럼 대했잖아.”

“그야···내 여동생을 죽였으니까.”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로난이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모색하던 와중이었다. 오필리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동생은 대공님을 암살하려 했으니까. 발자크는 가족과 밤의 세계의 평화를 동시에 지킨 영웅인 셈이지.”

“뭐?”

“그래도 용서할 수는 없더라. 나는 여동생을 정말 사랑했거든.”

오필리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활발하던 그녀의 여동생은 어느날 갑자기 변했다고 했다. 모든 것을 부질없어하며 매사에 염세적으로 굴었다. 결국에는 쓸데없는 질서 따위는 무너져야 한다며 그림자 대공을 암살하려 들었다.

“그때의 여동생은···이상했어.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왜 그렇게 된 건지 짐작 가는 건 없고?”

“으음···그건 잘 모르겠어. 이상해진 뒤로는 방에서 나온 적이 거의 없어서.”

“유감이네.”

“응. 마음은···참 어려워.”

오필리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침묵을 유지한 채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머지않아 막다른 길이 나왔다. 로난이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뭔가 있을 거 같았는데···아니었나?”

더는 파헤칠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감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그리 읊조린 로난이 몸을 돌리려는 차였다. 별안간 시타가 로난의 옷깃을 물고 잡아당겼다.

“뺘. 뺘.”

“엉? 왜 그래?”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시타가 막힌 벽을 향해 주먹만 한 혈탄(血彈)을 발사했다. 콰아앙! 벽 일부가 파괴되며 틈새로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어딘가 익숙한 마나였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일곱 획의 참격이 쏘아짐과 동시에 조각난 벽이 무너져 내렸다. 감춰져 있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필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삼면에 정교한 부조가 새겨진 아담한 방이었다. 은은한 마나가 실내를 떠돌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방 한복판에 웬 못생긴 바위 하나가 솟아 있었다.

“···세니엘?”

형태는 달랐지만 느낌이 같았다. 틀림없이 사란테의 신전에 놓여져 있던 것과 같은 물건이었다.

천 년씩 비바람을 맞아 가며 만들어지는 세니엘의 신상. 사란테는 그 위대한 의지가 로난에게 깃들어 있다는 말을 남긴 채 바위가 되었다.

로난은 홀린 듯이 신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표면에 손을 올렸다. 불현듯 냉수가 혈관을 타고 내달리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젠장, 뭐야?”

황급히 손을 뗐지만 알 수 없는 감각은 여전히 몸속을 맴돌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다소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라졌어.”

“엉?”

“바위에서 흘러나오던 마나가···사라졌어.”

듣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방 안을 떠다니던 마나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로난 본인이 흡수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뭐지?”

로난이 미간을 좁힌 채 침음을 흘렸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몸 전체를 떠돌던 냉감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그는 사란테가 하던 것처럼 신상에 인사를 한 번 한 뒤 고분을 빠져나왔다.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물비린내가 짙어졌다. 막 석문 밖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쉬이익! 느닷없이 두꺼운 쇠뇌 한 발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로난이 발도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툭, 반토막난 쇠뇌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또 뭐야?”

“히이이익···! 괴, 괴물!”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웬 음침하게 생긴 사내 한 명이 쇠뇌를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나네. 아래 있던 꼬마들의 권속 중 하나인가 봐.”

“아하. 죽이는 게 맞겠지?”

“응.”

오필리아가 주억거렸다. 사내는 황급히 몸을 돌려 늪지대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을 뻗고 주문을 영창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난이 오필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으응···? 뭐 해?”

“기다려봐. 뭔가 지금이면 될 거 같아.”

사내와의 간격은 열 걸음 정도였다. 정신을 집중한 로난이 그를 겨냥한 채 라만차를 휘둘렀다. 퍼억! 검로를 타고 발사된 검기가 사내의 허벅지에 적중했다.

“끄아아악!”

“역시.”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로난이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숙한 자상이 그의 허벅지 뒷면에 새겨져 있었다.

“사, 살려줘! 다시는 흡혈귀 따위와 어울리지 않을게!”

사내는 반쯤 잘린 다리를 버둥거리며 뒷걸음질쳤다. 튀어오르는 피가 풀잎을 적시고 있었다. 로난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자르지는 못했네.”

“어떻게···된 거야?”

오필리아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로난의 검기는 발자크와 싸웠을 당시보다 여실히 강해져 있었다. 로난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그 돌이 뭔가 있는 거 같아. 갑자기 이렇게 된 걸 보면.”

기존의 사거리가 세 걸음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괄목할만한 발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검기를 쏠 때의 충격도 경감되어 있었다. 로난이 막 사내의 목을 쳐내려는 차였다. 별안간 오필리아가 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잠깐···저건 나한테 맡겨주면 안 될까?”

“엉? 왜 그래?”

“그···그 있잖아···.”

오필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로난의 눈을 피하며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아하, 얘도 뱀파이어였지. 고개를 끄덕인 로난이 오필리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아들었어. 그럼 천천히 먹고 와.”

“으응···고마워.”

“자, 잠깐만···먹는다니?”

로난은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내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살짝 벌어진 오필리아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송곳니가 반짝이고 있었다. 늪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이윽고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흐아아아악!!”

안개가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허물 같은 가죽 뿐.

****

로난은 일요일 아침에 필레온에 도착했다. 교정에 발을 들이는 순간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그 모든 일이 하루만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할 일은 하고 자야지.”

마음만 같으면 양말도 안 벗고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로난은 곧장 자로딘이 있는 필레온 41탑으로 향했다. 똑똑똑. 사무실의 문을 두드린 지 머지않아 메마른 목소리가 돌아왔다.

“로난인가.”

“네.”

“기다려라.”

걸쇠 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며 한층 더 수척해진 웨어자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밥은 먹고 사는 거 맞아요? 어째 더 마른 거 같아.”

“신경쓰지 마라. 무슨 일이냐.”

“선물이 있어요. 짜잔.”

로난은 주머니에서 선혈의 정수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무표정하던 자로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는 황급히 로난의 손목을 잡아 집무실로 끌어들였다. 쾅! 거칠게 문을 닫은 자로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걸···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교수님 친구가 줬어요.”

“친구···?”

“됐어요. 그나저나 정말 괜찮은 거예요? 아직 아파 보이는데.”

“나는 괜찮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별안간 자로딘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일곱 걸쇠가 모두 걸어 잠김과 동시에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실과 이어지는 나선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로딘은 로난의 양어깨를 붙잡은 채 입을 열었다.

“144번째 실험을 시작해야겠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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