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두 번째 심장(3) >
#100
눈앞의 공간이 뒤집히며 필레온 아카데미의 교장 크라티르가 나타났다.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로난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데샨의 발목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색을 본 크라티르가 미간을 좁혔다.
“···혹시 이 늙은이가 중요한 순간을 방해한 건가?”
“네.”
로난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노친네가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데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로, 로난. 무슨 말을 그렇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허허···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하게.”
크라티르가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로난은 그렇게 했다. 아데샨의 다리에 엉겨붙은 뿌리는 반짝이는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틀림없이 돌란 그 자식의 능력이야. 이게 어쩌다가 발현된 거지?’
로난은 팔다리를 옭아매서 몸을 무겁게 만들던 돌란의 오러를 기억하고 있었다. 원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약했지만 분명 동일한 능력이었다.
‘오러를 베꼈다고? 내가?’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재차 시도해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불현듯 들이닥친 현기증이 시야를 흔들었다.
“···아?”
극심한 피로감이 사지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로난은 종양을 채우고 있던 마나가 고갈되다시피 말라붙어 있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힘없이 점멸하던 뿌리가 사라졌다. 휘청이던 로난이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아데샨과 크라티르가 동시에 그를 부축했다.
“로난!”
“갑자기 안색이 나빠졌군. 괜찮은가?”
“후우···아마도요.”
로난이 힘겹게 주억거렸다. 그는 동력원을 기존의 심장으로 전환했다. 온몸에 피가 도는 느낌과 함께 기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더럽게 피곤하군. 마나가 거의 바닥났어.’
검기를 쏘아냈을 때보다 몇 배는 되는 마나가 한 번에 소모되었다. 아무래도 조금 회복한 뒤에 시도해봐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해요. 진짜로 중요한 일이었어서.”
그제야 크라티르를 돌아본 로난이 미안함을 표했다. 주름진 얼굴에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허허, 괜찮다네. 애인이 다리를 접지르기라도 한 모양이지?”
“뭐, 비슷하죠. 애인은 아니지만.”
“애, 애인이라니···.”
아데샨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로난이 눈썹을 치켜 뜨며 물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무슨 일이예요?”
“가급적이면 장소를 옮기고 싶네만. 시간 괜찮나?”
“괜찮기는 한데···.”
“그럼 됐네. 가세나.”
짝! 별안간 크라티르가 박수를 쳤다. 공간이 뒤집힘과 동시에 시야가 암전되었다. 잠시 후 눈앞이 밝아지며 전혀 달라진 풍경이 펼쳐졌다.
“여긴···.”
낯익은 장소였다. 넓고 탁 트인 공간은 방이라기보다는 거실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세 개의 벽면을 뒤덮고 있는 창문 너머로는 파란 하늘과 필레온의 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방의 한복판에는 고목으로 만들어진 원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회의나 응접의 용도로 사용되는 원탁 앞에는 웬 사내 한 명이 로난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간만에 보는 전경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필레온 1번 탑에 위치한 교장실이었다. 그때 원탁 앞에 앉아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퇴폐적인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왔군. 로난.”
“자로딘? 여기 있었어요?”
“그래. 업무차 왔다가 네 이야기를 들었다. 화려하게 저질러 줬더군.”
로난의 눈이 커졌다. 사내의 정체는 자로딘 스톤송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나저나 이상한 걸 달고 왔군. 코어는 아닌 것 같은데.”
문득 로난을 위아래로 훑던 자로딘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리한 시선은 정확히 로난의 심장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교수님한테는 보이나 보네요. 이게 도대체 뭐죠?”
“나도 궁금하군. 교장님과의 용건을 마치고 보도록 하지.”
“허허, 드디어 이 늙은이의 차례인가.”
크라티르는 로난을 원탁으로 안내했다. 원래 자신이 앉는 상석이 그의 자리가 되었다. 로난을 마주보고 앉은 크라티르의 입에서 다소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로난 군을 부른 건···다름아닌 여명 마탑에서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일세. 필레온의 교장으로 재직한 것이 거의 팔십 년이 다 되어 가네만, 자네 같은 학생은 처음이야.”
“좋은 의미겠죠?”
“허허, 8할 정도는.”
크라티르가 웃었다. 치하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심 지금까지의 동아리 활동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닌가 염려하고 있었다. 당장 동아리 건물을 공간 마법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려도 할 말이 없는 짓거리를 월례 행사 수준으로 저지르고 있었으니까.
“아운 필라에게 직접 연락이 왔네. 흥분에 차서 자네와 에르제베트 양의 이야기를 하더군. 원래 그렇게 감정을 잘 드러내는 학생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어쩌다 휘말린 거지, 별 일 아니었어요.”
“그게 별일이 아니라면 세상에 사건이나 활약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을 걸세. 탑주 라르단 님을 구하고, 금서 바쥬라의 부활을 저지했으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크라티르는 군주의 업적을 읊는 신하처럼 로난의 활약상을 읊었다. 형식적인 안전 경고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기쁜 듯했다.
‘책은 알아서 하라는 건가.’
언급이 없는 걸 보니 바쥬라의 처우 역시 로난에게 맡기는 듯 했다. 아니면 아운 필라나 바렌 모두가 입을 다물었거나. 행복에 겨워 주절거리던 크라티르가 말을 맺었다.
“자네가 정말 자랑스럽네. 아무래도 여명 마탑 측의 입장도 있고 하니 당분간 공석에서의 치하는 어렵겠지만, 이렇게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네.”
“감사랄것까지야. 어쨌든 고마워요.”
“그래. 이제 뭐든 원하는 걸 말해 보게나.”
“원하는 거요?”
“공로에는 그에 걸맞는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고맙다는 말로만 끝낼 거라면 부르지도 않았을 걸세.”
로난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여명 마탑에서 너무 많이 받아먹은지라 딱히 달라 할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장학금이나 빠방하게 땡겨달라 하는 것이 무난했겠지만, 차석 입학자인 로난은 이미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으음···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렇다고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 갈 때마다 공간 마법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역시 현실성이 없었다.
‘맞다.’
그때 동아리 부원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로난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동아리에서 쓸 훈련장 하나만 마련해줄 수 있어요?”
“호오, 훈련장이라?”
“네. 넓고 튼튼한 곳으로요.”
별도의 훈련장은 특급 모험 동아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설이었다. 로난은 아직도 시타의 혈마법 훈련이 부지 밖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스트의 훈련 구역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셀이나 슐리펜처럼 광범위한 기술을 다루는 이들이 전력을 발휘하기에는 아무래도 협소한 감이 있었다.
“드래곤이 날뛰어도 멀쩡할 만큼 튼튼하게···는 솔직히 무리겠죠. 그냥 자이파와 나비로제 누님이 전력으로 겨뤄도 안 무너질 정도만 되면 좋겠네요.”
“쉽지 않군.”
“동아리랑 가까우면 더 좋고요.”
로난의 요구 사항은 딱 두 개였다. 넓고 튼튼할 것. 다만 그 두 가지 조건의 기준치가 상상 이상으로 높은 것이 문제였다. 침음을 흘리던 크라티르가 입을 열었다.
“흐으으음···알겠네.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보지.”
“고마워요. 좀 어려울까요?”
“아닐세. 겨울이 오기 전에는 만들어 보겠네. 이거 재밌겠군.”
만든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로난은 딱히 그 점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간 저질러 놓은 일이 워낙 많아서 대화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로난 군, 헬 프로미넌스가 시전되었다는게 사실인가? 20년 전에 라르단 님이 남부 전선에서 쓴 이후로 봉인한 마법인데.”
“그 지랄 맞은 불 말하는 거면 맞아요. 바쥬라가 눈앞에서 갈기더라고요.”
“허허, 마나를 마시는 한 끊임없이 확장되는 불길이거늘. 도대체 어떻게 무마시킨 겐가?”
“아운 필라가 준 스크롤 다섯 개로 맞불을 질렀어요. 더 태울 마나가 없게.”
크라티르가 헛웃음을 쳤다. 여명 마탑에서의 무용담을 열거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뎅-! 뎅-! 별안간 크라티르의 주머니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크라티르가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종소리는 그가 갖고 있는 회중시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돈한 그가 로난과 자로딘을 번갈아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네. 이 늙은이는 먼저 가 보겠네. 두 사람 다 푹 쉬다 가시게나.”
“갑자기 어디 가요?”
“북부의 이트라 협곡일세. 내달 열리는 백수제(百獸祭) 건으로 방문하는 걸 깜빡 잊고 있었어.”
“백수제?”
“다시 한번 로난 군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바일세. 다음에 또 보세나.”
로난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크라티르의 손바닥이 맞닿은 뒤였다. 짝! 손뼉 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뭐야?”
느닷없는 상황에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명조차 없이 사라진 걸 보니 어지간히도 일정이 빠듯한 듯 했다.
백수제라. 이름만 들어보면 무슨 축제 같았는데, 기억이 날듯 말듯 했다. 어색한 침묵이 맴도는 와중이었다. 줄곧 로난을 응시하던 자로딘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아, 뭔지 좀 알 것 같아요?”
“아직은 모르겠다. 여지껏 보아온 어떤 코어나 서클과도 형태가 다르군. 잠깐 이리 와 봐라.”
자로딘의 얼굴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마나의 대가조차 보는 것 만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면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는 로난의 등에 손을 올린 채 본격적인 탐색 작업에 들어갔다. 한번 죽을 뻔 해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 조심스러워진 태도가 눈에 띄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자로딘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이럴 수가.”
“역시 좆됐네. 어떻게든 안 될까요? 앞으로 십 년만 더 살 수 있으면 상관 없는데.”
“그런 게 아니다. 이 동력원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할 수 있나?”
“경위? 그러니까···.”
로난은 여명 마탑에서 벌어졌던 일을 설명했다. 크라티르와의 대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차피 자로딘도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었기에 반짝이는 마나가 쳐 나오는 것만 제외하면 딱히 숨길 것은 없었다.
“바쥬라의 자아가 네 몸속에서 소멸했다고? 설마 아까부터 말하던 파괴의 바쥬라 말인가.”
“네. 그 말하는 휴지요.”
“믿을 수 없지만···그렇다면 좀 납득이 가는군. 그 정도쯤 되는 힘이 개입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
자로딘이 헛웃음 쳤다. 사란테의 반지를 봤을 때도 짓지 않던 표정이었다. 로난이 짜증스레 캐물었다.
“젠장, 내 갈비뼈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네 심장에 자리를 잡고 있던 저주 일부가 사라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사라진 건 아닌가.”
“예?”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주가 사라졌다고? 자로딘은 벙쪄 있는 로난을 뒤로한 채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합쳐진 것에 가깝겠군. 세크리트 교수님의 소견도 들어봐야 하겠지만, 우선 내가 느낀 바로는 그렇다.”
“···자세히 말해 봐요.”
“남아있던 아홉 개 중 두 개가 사라졌다. 겉보기로는 말이지.”
자로딘은 로난이 품고 있던 아홉 개의 저주 중에서 두 개가 사라졌다고 했다. 문제는 먼젓번에 해주한 금제처럼 완전히 소멸한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체불명의 힘과 융합한 두 개의 저주는 효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마나의 덩어리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시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요컨대 가슴 속에 자리잡은 종양은 바쥬라의 강대한 힘과 저주의 일부가 뒤섞여 만들어진 덩어리라는 소리였다. 차라리 악마가 싸갈긴 똥이 더 고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악한 존재였다.
“나는 일찍이 이런 걸 본 적이 없다. 전례가 없던 새로운 동력원이야.”
“이거 써도 되기는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평범한 코어처럼요.”
“안될 건 없다. 구조만 보자면 일반적인 코어나 서클보다 훨씬 우수하니. 전례가 없으니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나마 다행이네요.”
“또 흥미로운 건 이 덩어리가 기존의 네 심장과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네가 만약 코어를 형성하는데 성공하면 너는 두 개의 동력원을 다루게 되겠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예상한 대로였다. 아무래도 반짝이는 마나는 바쥬라의 힘에서 기인한 듯했다. 아니면 아버지라는 작자가 걸었던 저주가 원인이거나.
“현재로서 알아낸건 이 정도다. 어려움을 겪게 되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고마워요. 자로딘.”
자로딘은 대꾸 없이 차를 홀짝였다. 종양의 정체를 알게 된 로난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마냥 좆같은 사고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건 다 제쳐 두더라도 코어를 두 개 다룰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장점이었다. 게다가 조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바쥬라의 코어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턱을 매만지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자로딘. 질문 하나만 할게요.”
“뭐지?”
“혹시 남의 오러를 베끼는게 가능한가요? 여러 개의 오러를 다룬다거나.”
“불가능하다.”
“역시 그렇죠?”
어투만 봐도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로난은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교장실을 떴다. 탑을 나서자 강렬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연청색 하늘이 깊어지는 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걸작이군. 네뷸라 클라지에가 된 로난.’
종양. 아니, 이제는 두 번째 심장이 된 악의 응어리가 다른 박자로 맥박치는 것이 느껴졌다.막 발걸음을 옮기는 차였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줘어!”
“아셀?”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양손으로 책을 끌어안은 아셀이 달려오고 있었다.
“얌마, 거기서 뭐 해?”
“왜, 왜 이런 일이···!”
큰 목소리로 불러 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걸로 봐서 어지간히도 겁을 먹고 있는 듯 했다.
“으이구. 한심한 새끼.”
그가 네 걸음 안쪽으로 다가왔을 무렵이었다. 동력원을 전환한 로난이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쿵! 마나의 파장이 퍼져 나감과 동시에, 반짝이는 뿌리가 아셀의 발목을 휘감았다.
“흐약?!”
느닷없이 발이 묶인 아셀이 앞으로 넘어졌다. 달려나간 로난이 그의 후드를 붙잡았다. 아셀의 얼굴은 바닥과 콧잔등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을 남긴 채 멈춰섰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로, 로난···?!”
아셀은 그제야 로난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하얗게 질린 그가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너, 너도 이럴 때가 아냐! 얼른 도망가야 돼!”
“한 번만 더 물어보게 하면 가로등에 매달아 버린다.”
“히이익···! 미, 미안해···!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금···!”
“지금?”
콰아앙! 별안간 아셀이 빠져나온 모퉁이 너머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셀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배, 백수제에 전시할 만티코어가 풀려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