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21화 (121/333)

< 121. 사계의 언덕(2) >

#121

“사계의 언덕.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

“사계의 언덕이요?”

“응. 부지 내에 있어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아주 생소하지는 않은 이름이었다. 도플갱어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나비로제가 한 번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뭐 하는 장소랬더라? 대답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자 아데샨이 불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싫어?”

“아뇨, 좋아요. 지금 바로 갈 거죠?”

“아, 응. 잠깐만···!”

아데샨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쿵! 별안간 집무실로 달려간 그녀가 문을 닫았다. 삼 분 정도가 지나서야 다시 밖으로 나온 아데샨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미안. 잠깐 땀 좀 닦느라. 갈까?”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묶여 있던 머리가 풀린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두 사람은 투기장을 벗어나 교정의 서쪽으로 향했다. 나란히 걷던 아데샨이 로난의 허리춤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 그 단검은 어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더라구요. 선배 석궁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까 보니까 막 폭발하던데.”

“아, 마력을 주입하면 자동으로 쇠뇌에 인챈트가 되는 구조거든. 어떻게 이런게 가능한지 모르겠어.”

아데샨이 감탄을 흘렸다. 라만차, 이미르와 마찬가지로 도론은 그녀의 석궁에 아르주나라는 이상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르주나의 능력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했다. 원래대로라면 쇠뇌마다 마법을 인챈트해야 했지만, 아르주나는 석궁 본체에 마력만 주입한다면 불이나 냉기 중 원하는 속성을 화살촉에 각인할 수 있었다. 흥분한 도론의 얼굴을 떠올린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대단한 영감쟁이긴 하죠.”

어느덧 시간은 완연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저무는 해에서 배어 나온 주홍색이 서녘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석양 아래 드리운 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조용하네요.“

”응. 평소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도 좋지만···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거 같아.“

방학 기간의 필레온은 한적했다. 학생들이 사라진 교정에서는 자연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바람 따라 찰랑이는 호수의 물결, 여름나기를 하는 새들의 소야곡(小夜曲).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걷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고즈넉한 것이 썩 괜찮았다. 서쪽으로 걷던 그들은 머지않아 어느 언덕 앞에 도달했다. 부지가 하도 넓어서 로난은 아직까지 와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아데샨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도착했어. 여기가 사계의 언덕이야.”

“생각보다는 별 거 없네요.”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정상에 나무가 네 그루 세워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특별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눈웃음친 아데샨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후후, 일단 올라가 볼래?”

묘하게 자신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정상에 도달한 로난은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무들을 올려다본 그가 눈을 치켜떴다.

“연리지(連理枝)?”

“맞아. 네 개의 나무가 하나로 엮여 있어.”

수종도 크기도 다른 네 그루의 나무가 이어져 있었다. 벚나무와 배롱나무, 단풍나무와 전나무. 넓게 자라난 배롱나무에는 자줏빛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로난은 그것들이 각 계절을 대표하는 나무들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어떤 마법의 힘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떤 계절에 와도 한 그루의 나무는 아름답게 물들어 있어. 사계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고.”

“···신기하긴 하네요.”

“그리고 여기서 보는 풍경도 예쁘거든. 나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오는 거 같아.”

아데샨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로난이 주억거렸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늦여름의 신록과 어우러진 교정은 동화에 등장하는 낙원처럼 아름다웠다.

솨아아- 서늘해진 바람이 앞머리를 젖혔다. 가만히 석양을 바라보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고향에 다녀왔어.”

“맞아. 아버지를 뵈러 간다 했었죠?”

“응. 살이 좀 찌기는 하셨는데 다행히 건강하시더라. 같이 어머니랑 오빠들을 보고 왔어.”

목소리가 담담했다. 로난의 입매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는 아데샨의 가족이 어떤 비극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휘부의 오판으로 인해 개죽음을 당한 군인들. 어린 소녀에게 대장군의 꿈을 품게 해준 그들의 이름은 전사자를 기리는 위령비 한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내가 있지, 원래는 매번 울었거든.”

“네?”

“그, 위령비 앞에서. 어머니랑 오빠들의 이름을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나왔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안 울었어.”

별안간 아데샨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자그마한 나무 상자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아데샨은 갸웃거리는 로난을 뒤로 한 채 말을 이었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 봤는데, 희망이 생겨서 그런 것 같아.”

“희망?”

“응. 정말로 대장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매번 해내리라 되뇌기만 했지, 막연한 꿈으로만 남을 거라 생각했는데···이제는 정말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아.”

말꼬리를 늘어뜨리던 아데샨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어디라 할 것 없이 눈에 닿는 모든 곳에서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날아올랐다. 촤아아악! 홰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울려 퍼졌다.

“네가 깨워준···이 능력이라면.”

“허.”

그림자들은 사계의 언덕을 향해 날아왔다. 족히 수백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모두 새라는 것을 깨달은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기가 막히는군.’

아데샨의 어깨 위로는 새카만 마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나를 다루던 경지는 진작에 넘어선 상태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열심히 했네요.”

아데샨은 대답하는 대신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안개처럼 몰려 온 새들은 사계의 언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한 마리도 충돌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모습은 꼭 잘 훈련된 군인 같았다.

탁! 아데샨이 손가락을 튕겼다. 촤아아악! 정신을 되찾은 새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림자의 마나를 거둔 그녀가 상자를 내밀었다.

“내가 꿈을 꿀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이건?”

“내 선물이야. 열어봐.”

로난이 상자를 열었다. 작고 하얀 구체 하나가 부드러운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형용할 수 없이 청명한 마나가 그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젠장, 이거 설마 만년설화 진주에요?”

“응. 알아보는구나.”

“왕족들도 구하기 힘들어하는 걸 어떻게···.”

만년설화. 말 그대로 만년을 살아간다 알려진 영험한 꽃이었다. 북부에서도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극지에만 피어나기에 정말로 구경하기가 어려운 식물이었다.

같은 이름을 한 얼음처럼 한번 피어나면 어지간해서는 시들지 않는 이 꽃은 흡수한 정기를 모두 뿌리에 저장하는 습성이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식물과 비슷한 형태를 띠었던 뿌리는 정기를 머금을수록 점점 진주와 같은 아름다운 구체의 형태로 변모해 간다.

만년설화 진주는 최소 백 년 이상은 정기를 축적한 뿌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당연히 부르는 게 값이었다. 아데샨이 눈웃음쳤다.

“동물들이랑 같이 찾았어. 제도로 돌아오기 전에 하나를 구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진심이에요? 이거 시장에 팔면 얼만지 알죠?”

“알아.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훨씬 싸다는 것도. 그러니까 그냥···아무 말 하지 말고 받아 줘.”

그리 말한 아데샨이 로난의 손을 꼭 쥐었다. 확실히 그림자의 마나를 다루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할 보물이었다. 아마 오늘 불러낸 것도 이걸 건네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눈동자가 결의로 빛나고 있는 것이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침묵하던 로난이 상자를 주머니에 넣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후후, 나야말로 받아줘서 고마워. 조금만 앉아 있다 갈까?”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나무에 기대앉았다. 슬슬 풀벌레의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교정을 훑던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여긴 겨울에 와도 끝내주겠는데요.”

“맞아. 엄청 예뻐. 지붕이랑 이파리마다 눈이 내려앉아서···”

“설명 안 해도 돼요. 그때 또 같이 오죠 뭐.”

“···응. 좋아.”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멎었다. 한층 짙어진 노을이 필레온을 휘감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데샨이었다.

“어머니가 하셨던 말을 이제 알 것 같아.”

“네?”

“노을을 좋아하셨거든. 살기 위해 싸우는 모습이 근사하다고.”

영문 모를 소리였다. 석양을 받아 붉어진 세상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싸우다니요?”

“군인이셨던 어머니는 노을을 해가 마지막으로 치르는 전쟁이라 말해 주셨어. 산아래로 저물어서 명이 다하기 전에 벌이는. 그렇게 발버둥치다 결국은 패배해서 밤이 찾아오는 거야.”

“···어린 딸이 알아듣기에는 심오한 소리네요.”

“응. 그런데 지금은 알겠어. 승패가 아닌 투쟁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거였어···.”

아데샨이 말꼬리를 끌었다. 문득 왼쪽 어깨가 따뜻해진 것을 느낀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아데샨의 작은 머리가 기대어져 있었다.

“선배?”

“죽지 않기 위해 온 세상의 빛을 전부 끌어당기고 있는 거야. 꺼져 가는 불이 장작을 찾아 손을 뻗듯이···.”

아데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싸움이라···확실히 그렇게도 보이네요.”

로난의 시선은 다시 노을 쪽을 향해 있었다. 이해는 잘 되지 않았지만 납득은 되는 것 같았다. 그 형태가 어떠하건 생을 위한 투쟁은 아름답다.

잠시 움찔거린 아데샨이 몸을 더 기울였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더해졌다. 온기와 맥박이 맞닿은 부분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치.”

아데샨이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자세를 유지하던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나서야 언덕에서 내려왔다.

****

방학은 한 달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제도로 돌아온 로난은 평소에는 학사 일정에 얽매여 못 했던 일을 위주로 진행했다.

멀리 떨어진 산에 만년설화 진주와 함께 먹을 약초를 캐러 다녀온다거나···네뷸라 클라지에의 정보 수집을 위해 제도 경찰국에 다녀온다거나···물론 가끔은 여유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저번 사막 여행은 이 자식이 다 했어. 안 데려갔으면 큰일 났을 걸.”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우리 물건을 훔쳐 가려 했던 나쁜 놈을 단칼에 해치웠지. 오십 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놈을.”

“와아, 그렇게 멀리 있던걸? 어떻게?”

이릴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로난은 누이와의 저녁 만찬에 슐리펜을 초대했다. 힘을 써준 것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로난은 다인하르에서 벌어졌던 일을 적당히 순화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건 말이오. 그러니까.”

슐리펜은 일관된 동작으로 스테이크를 잘라서 입에 넣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일말의 오차도 없는 동작은 그를 꼭 잘 만든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홀린 듯이 이릴을 쳐다보던 슐리펜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별 일 아니었소. 비루한 깨달음을 얻었을 뿐.”

“에이, 비싸게 굴지 말고 한 번만 보여줘.”

슐리펜의 옆구리를 찌른 로난이 저 멀리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수박을 가리켰다. 평소 같았으면 나를 광대 취급하는 거냐며 지랄을 떨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로난이 슐리펜에게 귓속말했다.

“누나가 엄청 보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슐리펜이 주저 없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서걱!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오나 싶더니 수박이 여덟 조각으로 갈라졌다.

사라졌던 검신이 다시 나타났다. 짝짝짝! 눈을 동그랗게 뜬 이릴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아! 굉장해요!”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소.”

슐리펜은 그리 말하며 다시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때 소스 한 방울이 그의 볼에 튀었다. 별안간 손수건을 꺼내든 이릴이 몸을 기울였다.

“앗, 여기 묻었어요!”

“······!”

“에헤헤, 소공작님도 의외로 덤벙거리는 면이 있으시네요.”

이릴은 그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살살 닦아 주었다. 슐리펜의 시간이 정지했다. 이대로 죽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완벽한 경직은 거의 십 분이 넘도록 이어졌다. 고기를 다섯 겹씩 겹쳐서 입에 넣은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랄을 해라. 지랄을.”

어쨌든 시간은 흘러갔다. 세크리트가 돌아온 것은 개학을 앞둔 직후였다.

로난은 소식을 듣는 즉시 그의 집무실인 세파라치오로 달려갔다. 서재 한복판에 앉아 책을 읽는 소녀의 모습에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크리트···?”

“오오, 로난. 오랜만이구나.”

“···어쩌다가 그 꼴이 된 거예요?”

로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달만에 보는 세크리트는 놀랍게도 여자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소년기의 세크리트에서 머리만 조금 길어진 상태라 알아볼 수 있었다.

“아하하, 북부에서 발견한 저주를 몸에 넣었더니 이렇게 되었단다. 설마 성별을 뒤바꾸는 저주였을 줄이야.”

“빌어먹을, 원래대로 돌아올 수는 있어요?”

“그건 차차 연구를 해보면 알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려무나.”

세크리트가 걱정 말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밤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이로 변하는 작자인데 괜한 걱정인 것 같기도 했다. 한숨을 푹 내쉰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상태로도 마법은 쓸 수 있죠?”

“으음? 당연한 거 아니냐. 성별만 변한 거지 아무런 문제가 없단다.”

“그럼 다행이고요. 가져왔어요.”

“가져오다니. 무엇을···”

로난이 안주머니에서 검은 수정 하나를 꺼내들었다. 세크리트의 눈이 커졌다.

그가 가져온 마석을 보는 순간 그는 지금껏 자신이 보아온 다인하르 마석들은 부스러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뚝만 한 수정의 내부에서는 오직 사막의 마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심후한 마력이 맥동하고 있었다.

“해주. 지금 바로 가능할까요?”

로난이 말했다. 당장 수십 개의 질문이 세크리트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탁!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그가 읽던 책을 덮었다.

“물론이지. 가까이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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