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남아있는 나날(1) >
#122
“가까이 오너라. 먼저 얼마나 해주가 진행됐는지부터 보자꾸나.”
로난은 그렇게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뻗은 세크리트가 그의 가슴을 짚었다. 한층 똘망해진 눈망울이 영 거슬렸다. 도통 적응이 안 되는 모양새에 로난이 헛웃음 쳤다.
‘기가 막히는군. 밤에는 할머니로 변하려나.’
누가 봐도 영락없는 소녀였다. 지긋한 노친네를 공기놀이나 할 애새끼로 바꿔 놓다니 참으로 무시무시한 저주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세크리트가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세크리트의 마나가 몸 속을 헤집으며 퍼져 나갔다. 촤아악! 검붉은 글자들이 로난의 등에서 튀어나왔다.
“···이 개새끼들.”
실체화된 저주들을 본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글자들은 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리며 그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처음 봤을 때보다 글자의 양이 줄어든 것 같았다. 세크리트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였다.
“오호라···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확실히 저주가 약해졌어.”
“당연히 그래야죠. 그 개고생을 했는데.”
로난이 입매를 비틀었다. 지금껏 해온 모든 고생이 겨우 반년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벌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가슴에서 손을 뗀 세크리트가 분필을 꺼내들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꾸나.”
세크리트는 서재를 이리저리 오가며 기하학적인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의 서재 바닥을 뒤덮는 크기의 마법진이었다.
여러모로 지난번에 비해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법진을 완성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다 됐다. 마석을 이리 다오.”
“여기요.”
로난이 다인하르 마석을 건넸다. 마석을 받아든 세크리트가 잠시 움찔거렸다. 시커먼 표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마나는 여지껏 보아온 촉매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했다.
“···정말 제대로 구해왔군. 다인하르의 원주민들에게 선물로 받기라도 한 게냐?”
“뭐, 비슷하죠.”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 무섭구나.”
서재 중앙으로 걸어간 세크리트가 마석을 바닥에 꽂았다. 그 순간 마법진의 문양을 따라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아아···! 꼭 기름을 따라 치솟는 불길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이번에 네가 해주해야 할 저주를 실체화시킬 거란다.”
“실체화요?”
“그래. 저주를 시각적인 형태로 풀어 구현함으로써 규모를 가늠하는 거지. 해주에 들어가기 전에 거치는 마지막 단계란다.”
별안간 세크리트가 허공에다 손가락을 휘적였다. 글자들의 형태가 뭉그러지더니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실체화가 진행될수록 세크리트의 표정이 점진적으로 굳어졌다.
“이건···!”
제멋대로 끓고 녹아내리기를 반복하던 저주는 십 분가량이 지나서야 변화를 멈췄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름이 2m는 될 법한 거대한 덩어리가 눈앞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좆같이도 생겼네.”
생겨먹은 꼬락서니가 영 불쾌했다. 악마의 심장이나 뇌를 뽑아 온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무정형의 저주 덩어리는 확정된 형태 없이 계속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세크리트가 탄식을 흘렸다.
“···맙소사.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세크리트? 괜찮아요?”
“그래···저걸 압축시켜서 네 머리에 흘려넣는 순간 해주가 시작된단다. 그 다음부터는 익히 알다시피 육체는 깊은 잠에 빠지고 정신은 심상 세계를 헤매게 되는 거지···.”
“영 느낌이 안 좋기는 한데···젠장, 어쩌겠어요. 얼른 해치워 버리자고요.”
팔다리를 이리저리 돌려본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상 세계에서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흘러간다. 저번에도 순식간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는 하루가 꼬박 지난 걸 보면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시간이 상대적으로 널널한 방학 때 해치워 버리는 것이 맞는 판단이었다. 줄곧 손톱을 물어뜯던 세크리트가 입을 열었다.
“로난···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게 우스울 수도 있지만 할 말은 해야겠구나.”
“할 말이라뇨?”
“저걸 꼭 해주해야겠느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벙쪄 있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왜 그래요? 안색도 안 좋고.”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내 친구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단다. 하늘 위의 하늘을 탐구하던 천문학자였지. 명망도 학식도 높은 친구라 자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어.”
뜬금없는 소리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주를 빤히 노려보는 세크리트의 얼굴은 북부의 설원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서늘한 식은땀이 뽀얀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헌데 제자들은 그가 갑자기 미쳐 버렸다고 증언했단다. 우리는 그가 남긴 유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었지. 딱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더구나. [우리는 먼지다.]”
“먼지?”
“동료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의한 끝에 결론이 나왔단다. 그간 ‘존재한다’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던 저 우주의 넓이를 조금이라도 깨달아버린 거라고.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목도하는 바람에 광증이 찾아와 버린 게야···.”
잠시 천장을 올려보던 세크리트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로난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로난, 나는 방금 그 친구를 이해하게 되었단다.”
“제가 실패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단다. 이번만큼은 우리가 무모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세크리트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불찰을 인정했다. 그간은 이론과 간소화한 실험으로만 해주법을 구상하고 있던지라 모르고 있었다. 실체화시킨 저주가 품은 힘은 세크리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저건 위험해. 설령 해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걸리는 시간을 장담할 수 없다.”
“장담할 수 없다니, 며칠씩이나 되길래 그래요?”
“한번 꼬이면 일 년은 우습지. 십 년이 넘도록 심상세계를 헤매고 있는 이들도 있단다.”
“이런 시발, 십 년이요?”
로난의 미간이 구겨졌다. 더 강력한 저주인 만큼 처음 해주 했을 때보다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이건 도를 넘었다. 세크리트가 말했다.
“로난. 진취를 추구해야 하는 교육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지금의 너도 충분히 강하다. 이대로만 성장해도 분명 제국의 역사에 획을 남길 검사가 되겠지. 이만한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저걸 해주할 가치가 있느냐?”
세크리트가 목소리를 깔았다. 겉모습은 가녀린 소녀였지만 특유의 위압감만은 여전했다. 로난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가치라.’
일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뤄낸 성취만 봐도 지난 삶에 비하면 훨씬 성장할 여지가 늘어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육신만 성장해도 아하유테 따위는 순식간에 도륙 내버릴 자신이 있었다.
‘시발. 그 새끼 하나만 있으면 나도 안 했지.’
다만 로난이 도달해야 하는 경지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하늘을 찢으며 강림하는 거인들의 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오메가 도플갱어를 마주쳤던 날이 떠올랐다. 저주에게 침식당해 죽어가는 자신의 몰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추잡했다.
몸 안의 저 종양들을 치워야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로난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탁! 한숨을 내쉰 세크리트가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진의 빛이 꺼짐과 동시에 실체화한 저주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나도 술식 안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겠다. 며칠 걸릴 듯하니 그간 주변 정리라도 하고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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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기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개학식은 방학식이 열렸던 대광장에서 진행되었다. 상투적인 훈화를 읊조리는 크라티르의 얼굴은 어디 휴양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새카맣게 타 있었다.
“뜻 깊은 방학이었기를 기원합니다. 새로운 학기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냈으면 좋겠군요. 흐으음···이제 여름도 끝이네요.”
높아진 하늘이 여름의 기세가 꺾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요 며칠 사이에 시원해진 바람에 학생들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로난은 개학식이 끝나기 무섭게 동아리 건물로 향했다. 돌아온 학생들이 교정을 분주하게 쏘다니고 있었다. 텅 비어있던 거리가 다시 소란을 되찾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큼직한 트렁크 가방이 들려 있었다. 휘파람을 불던 로난이 새털구름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사흘이라.”
세크리트의 술식이 준비되기까지 남은 기간이었다. 머릿속이 번잡하여 그날 이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분주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할 수 있는 일을 해 놔야 했다. 문득 그의 말을 떠올린 로난이 툴툴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수없게 주변 정리가 뭐야, 주변 정리가.”
꼭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남기는 대사 같았다. 물론 징벌병으로 구를 당시에는 인사처럼 듣던 말이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전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곳이었으니까.
‘뭐, 오히려 잘 된 일이지.’
빠르게 일처리를 끝내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로난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는 이들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여 방비책을 세운다고 해서 결코 나쁠 것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로난은 어느덧 동아리 건물에 다다랐다. 아직 근처에 왔을 뿐인데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끼이익- 정겨운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로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각각 아셀과 오필리아를 등에 얹고 팔굽혀펴기를 하는 마르야와 브라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귀염둥이! 방학 동안 한 끼도 안 먹었어? 왜 이렇게 가벼워?”
“아, 아냐. 먹었어···!”
마르야가 걱정스레 물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아셀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브라움 위에 걸터앉아 있던 오필리아가 검지로 그의 등을 쿡 찔렀다.
“브라움···이러다가 지겠어···.”
“허어억! 기, 기다리시오! 아직 역전의 기미가 있소!”
사색이 된 브라움이 속도를 높였다. 참으로 병신 같은 광경을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그는 들고 온 트렁크를 바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뭐 하냐. 멍청이들아.”
“어? 로난!”
두 사람이 팔굽혀펴기를 멈췄다. 부원들의 면면을 훑어본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해놓은 대로 슐리펜을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다 왔네. 잘 지냈지?”
“어제도 봤으면서 새삼스럽게···아, 마석 판매한 대금 챙겨 왔어.”
소매로 땀을 닦아낸 마르야가 건물 한구석을 가리켰다. 고급스러운 상자가 열 개 정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때 숨을 고르던 브라움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물론! 그건 그렇고 깜짝 놀랐다 로난. 방학 말미에 저런 큰 선물을 주다니!”
그의 시선은 벽 한쪽에 기대진 방패에 머물러 있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아, 오늘 받았냐?”
“정확히는 엊그제다. 웨어울프 대장장이께서 전달해 주시더군!”
척 봐도 좋은 방패였다. 몸을 완전히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직사각형의 대방패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용의 불길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라 감사해야할지 모르겠군. 정말로 저런 보물을 내가 써도 되는 건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쓰라고 준 건데 당연히 받아야지.”
“나도···고마워···.”
오필리아 또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손에는 뼈를 깎아 만든 것처럼 새하얀 완드가 쥐어져 있었다. 원래 오필리아가 강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피어오르는 마력이 심상치가 않았다.
“모든 마법이···두 배는 강해진 것 같아. 제도 지하에 그런 곳이 있었을 줄이야···.”
“너희 종족이 만든 것보다 낫냐?”
“응···훨씬. 비교하는 게 실례일 지경이야.”
“다행이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필리아의 완드와 브라움의 방패 모두 그란 카파도키아의 명공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는 주변정리를 하라는 세크리트의 말을 듣자마자 두 사람에게 무구를 맞춰 주었다.
“자, 그럼 다들 이리 와 봐. 중요한 공지가 있으니까.”
“공지?”
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로난이 트렁크를 열었다. 딸깍. 잠금장치가 해제됨과 동시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필리아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 이건···!”
“나비로제 누님한테 빌려 왔지. 다들 하나씩 손목에 끼워.”
쿠션으로 감싸진 트렁크 안에는 검고 가느다란 팔찌가 다섯 개 들어 있었다. 나비로제의 중간 평가 당시 사용했던 마도구였다.
죽음에 이르거나 치유가 힘들 정도의 부상을 입을 것 같으면 자동으로 신체를 전이시키는 공간 계열 마도구. 로난은 어리둥절해하는 부원들을 뒤로하고 설명을 계속했다.
“내가 어쩌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도 있을 것 같아. 짧으면 며칠이지만 길게는 수년이 걸릴 수도 있걸랑.”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개학인데 갑자기 자리를 비운다고?”
“수, 수 년이라니?”
“자세한 건 하면서 설명해 줄게. 팔찌부터 차.”
로난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부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팔찌를 하나씩 착용했다. 그 순간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슈욱! 라만차의 칼끝이 브라움의 목에 닿으려는 찰나 그의 형체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이, 이게 무슨···!”
“허어어억!”
아셀이 막 비명을 터트리려는 차였다.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브라움이 계단에서 굴러 내려왔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봤지? 절대 안 죽어. 살아나는 곳은 이 건물로 해 뒀으니까 얼마든지 덤벼도 돼.”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실력을 보려는 거야. 내가 정말 자리를 비워도 될지.”
마지막으로 팔찌를 찬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현듯 그의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살기에 부원들이 몸을 움츠렸다.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로난은 그들의 면면을 한 명씩 훑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따라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