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남아있는 나날(2) >
#123
“따라나와. 무기 챙겨서.”
로난이 건물 밖으로 나섰다. 부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를 뒤따랐다.
그들은 네스트의 훈련장에 자리를 잡고 섰다. 전원이 무기를 지참한 것을 확인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설명할테니까 잘 들어. 니들도 알다시피 나는 저주에 걸려 있어.”
이제 와서 숨길 이유는 없었다. 로난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저주가 막고 있다는 것, 한계를 뛰어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해주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 그래서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사실까지. 아셀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조, 졸업하고 해주를 하는 건 어때?”
“그때는 늦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재능이 있다면 최대한 어릴 때 길러 놔야 해.”
“···많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모르지. 그러니까 이런 고급 도구까지 빌려 온 거 아니냐.”
로난이 팔찌를 들어 보였다. 눈칫밥이라도 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비로제는 흔쾌히 팔찌를 빌려 주었다. 해주를 마친 뒤 훈련 시간을 두 배로 늘린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죽을 힘을 다해서 덤벼. 그래야지 너희가 훈련할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오늘 부른 것도 그거 때문이었구나.”
“그래. 만약 내가 돌아왔는데 성취가 없으면 그냥 다 뒈지는 거야. 참, 니들을 완벽하게 코치해 줄 조교도 데리고 왔어.”
“조교?”
“엉. 마침 저기 오네.”
로난이 턱 끝으로 훈련장 뒤편을 가리켰다. 부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장신의 소녀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잘록한 옆구리에는 각종 서류와 웬 작은 종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로난의 옆에 선 그녀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다들 오랜만이네.”
“앗. 저번에 그···아데샨 선배님, 맞죠?”
“응. 반가워 마르야. 상단 일은 잘돼?”
아데샨이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마르야의 눈이 커졌다. 스치듯이 만난 게 전부였는데 하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원들을 쭉 둘러본 그녀가 갸웃거렸다.
“제국의 샛별은 안 보이네? 일부러 안 부른 거야?”
“그 새끼는 지가 알아서 할 거예요. 오러도 각성한 놈인걸요.”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슐리펜만큼은 걱정이 안 됐다. 솔직하게 말해서 필레온의 상급생 전체와 대련을 해도 그 재수 없는 놈이 이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선배는 눈이 좋아. 너희가 싸우는 모습을 파악해서 앞으로의 훈련 방향성을 제시해줄 거니까 너희는 정보가 쌓일 때까지 덤비기만 하면 돼.”
“과연. 이런 일에는 조교님만 한 인재가 없긴 하지.”
브라움이 천천히 주억거렸다. 나비로제의 수업을 듣는 그는 아데샨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한 번에 살피고 동작을 교정해줄 수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그럼 시작하자. 선배?”
“아, 응.”
딸랑···아데샨이 들고 있던 종을 흔들었다. 청아한 소리가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벙찐 부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와중이었다.
“시작했다니까?”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스각! 넓은 횡베기가 네 사람의 허리를 가르며 지나갔다. 아셀과 마르야, 브라움의 형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아 있는 한 명을 본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너만 버텼구나. 역시 나이는 무시 못 해.”
“큿···!”
유일하게 몸을 빼는 데 성공한 오필리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투툭. 그녀의 배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발도가 너무 빨라서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너···진심이구나···.”
“제대로 하는 게 좋을걸. 낮이라 불리하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로난이 다시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오필리아가 속삭이듯 주문을 영창했다. 콰아악! 피로 이루어진 늑대의 아가리가 지면에서 솟구치며 로난을 삼켰다.
“그런 말···안 해.”
오필리아가 주먹을 쥐었다. 늑대의 머리 위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쏴아아! 그림자로 이루어진 도검류가 마법진 안쪽에서 쏟아져 내렸다. 꼭 검은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아파···졸려···.”
원래대로라면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형체도 남지 않을 기술이었다. 로난의 탈락을 확신한 오필리아가 몸을 돌리는 찰나였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료받고 나와. 시타가 대기하고 있으니까.”
“뭐···?”
촤악! 늑대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직선으로 날아온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오필리아를 덮쳤다.
반응할 틈 따위는 없었다. 우웅! 검기에 직격당한 그녀의 형체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쏟아지던 그림자 흉기도 연기처럼 흩어졌다. 로난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툴툴거렸다.
“얘들이 영 감을 못 잡네. 몇 번이나 구르려고 그러지.”
-콰직!
그때였다.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동아리 건물의 문이 열렸다. 앞서 탈락한 세 명의 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 갑자기 그런 게 어딨어? 진짜로 베?!”
“주, 죽는 줄 알았어···!”
“으음. 다시 당해도 기분 나쁜 감각이군.”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부원들의 눈빛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대검을 한 바퀴 돌려 쥔 마르야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하고는 못 살지. 가자!”
“동감이다!”
“자, 잠깐! 아직 오필리아가···!”
브라움 또한 대방패를 앞세우며 몸을 날렸다. 아셀이 당황 섞인 목소리로 외쳤으나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범위 내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로난이 무미건조하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넓직한 검기가 쏘아짐과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으하하하! 이거 정말 좋은데!”
연기 안쪽에서 브라움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기를 막아낸 대방패에는 생채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역시 잘 만든다니까.”
로난이 중얼거리는 차였다. 탓! 브라움의 어깨를 밟으며 뛰어오른 마르야가 수직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하아아압!”
“제법인데.”
로난이 입꼬리를 올렸다. 위압감이 상당했다. 마나를 머금을수록 무거워지는 그녀의 대검은 완전히 푸르른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래서는 정면 승부는 무리였다. 로난이 막 어깨를 비틀어 회피하려는 찰나였다.
“그, 그래비티 바인드!”
저 먼 곳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허공에 네 개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촤륵! 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투명한 사슬들이 순식간에 로난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얼씨구?”
고개를 힐끔 돌린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아셀이 손을 뻗어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여기서도 보였다.
“미, 미안해 로난···! 하지만 너가 하라고 해서···!”
“어째 감정이 실린 거 같다.”
바쥬라를 어지간히도 열심히 읽은 모양이었다. 평소에 아셀이 쓰는 인비저블 핸드보다 훨씬 상급의 마법이었다. 힘을 줘 봐도 몸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괜스레 뿌듯해진 로난이 픽 웃었다.
“니들 열심히 했구나.”
“잘했어! 귀염둥이!”
마르야가 쾌재를 불렀다. 푸른 호를 그리며 내려오던 대검이 로난의 쇄골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그럼 나도 힘 좀 써 볼까.”
로난이 동력원을 전환했다. 금빛 기운이 그의 오른팔을 타고 올라왔다. 힘을 증폭시키는 바렌의 오러였다.
팔을 휘두르자 손목을 휘감고 있던 줄기가 속절없이 뜯어져 나갔다. 스각! 라만차를 움켜쥔 로난이 나머지 사슬을 잘라 냈다.
“그, 그래비티 바인드가!”
아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렇게 간단하게 파훼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로난이 어깨를 비틈과 동시에 마르야의 대검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쿠아아아앙! 거대한 균열이 생기며 산산조각난 포석이 튀어올랐다.
“아, 안 돼···!”
공격이 빗나간 마르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로난은 그녀가 대검을 뽑는 시간을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서걱. 로난이 가볍게 칼을 휘두르자 마르야의 형체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마르야!!”
흥분한 브라움이 쿵쿵거리며 달려왔다. 과몰입을 하게 된다는 것이 이 훈련의 최대 장점이었다. 방패를 들지 않은 반대편 손에는 예리한 한손검이 쥐어져 있었다.
검과 방패라. 나쁘지 않지. 그리 읊조린 로난이 단검 이미르를 뽑아들었다. 쐐액! 그가 팔을 휘두르는 순간 멈춰선 브라움이 방패를 치켜들었다.
“흐음!”
“등신아. 마법사를 먼저 지켜야지.”
브라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을 때 단검은 이미 아셀의 미간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브라움이 뭐라 외치기도 전에 아셀의 형체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푹! 끝까지 날아간 이미르가 동아리 건물의 외벽에 박혔다.
“한눈도 팔면 안 되고. 너가 전위잖아.”
로난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다. 스산한 소름이 브라움의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시선을 내리자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로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허어어억!”
그는 이미 방패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서걱. 칼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브라움의 모습이 사라졌다. 부원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3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씨! 다시 해!”
“다 같이···가야 할 것 같아.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부원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보다 더욱 독기에 찬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아데샨은 그들의 동작이나 습관을 계속해서 종이에 기록하고 있었다. 마르야의 검법을 스케치하던 그녀가 감탄을 흘렸다.
“굉장해···전부 표준적인 실력을 훨씬 웃돌고 있어.”
“가르칠 맛 좀 날 거 같지 않아요?”
“응. 네 명 모두 뿌린 것 이상으로 거둘 유형이야. 애초에 내가 뭘 가르칠 실력이 못 되지만···.”
“자신감을 가져요. 아직까지 선배보다 이쪽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못 봤으니까.”
로난이 아데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배시시 웃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마친 마르야가 함성을 터트렸다.
“가자-!!”
“내가 먼저 혈마법으로···발을 묶을게···.”
이번에는 네 명이 전부 달려들었다. 오필리아까지 가세하니 확실히 더욱 공격이 매서워졌다.
로난은 정확히 네 번의 칼질로 부원들을 전원 제압했다. 쿠당탕탕!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지 머지않아 동아리의 문이 열렸다.
“다시!”
아데샨의 정보 수집은 그들이 다섯 번 정도 죽었을 무렵에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악에 받친 부원들은 해가 저물 때까지 덤벼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 27번째 사망 처리를 당한 마르야가 로난을 노려 보며 으르렁거렸다.
“허억···이쯤 했으면···헉, 한 번쯤 죽어라···!”
“싫어.”
“천하에···치사한···.”
풀썩. 대검으로 몸을 지탱하던 마르야가 바닥에 엎어졌다. 마지막 탈락자였다. 주변에는 진작에 탈진한 아셀과 브라움, 오필리아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로난은 한 번도 죽지 않았다. 다만 전투를 거듭하는 내내 깜짝깜짝 놀랐다. 부원들의 실력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몇 배는 뛰어났다.
‘몇 번은 정말 위험했지.’
실제로 두세 번은 까닥하면 죽을 뻔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위험했던 순간을 복기하던 그가 부원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고맙다. 멍청이들아.”
걱정 없이 떠나도 될 것 같았다.
****
로난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세크리트의 말을 들은 뒤 많은 고민을 했다.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벌어질 수 있는 변수들 때문이었다.
‘쉽지 않군.’
가장 큰 위협은 역시 네뷸라 클라지에였다. 지부장 정도 되는 강자들이 밀고 들어오면 답이 없었다. 별의 가호를 베어낼 수 있는 건 현재로서는 로난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거물이 제도 한복판까지 쳐들어오지는 않을 거야. 마나 흔적도 확실하게 지웠고.’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교단에는 로난의 주거지로 찾아올 만한 단서가 없었다.
로난은 테라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현장에 남아 있던 마나의 흔적을 따라 자신을 추적했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증거만 치워 버리면 추적할 길은 요원하다는 의미였다.
‘무리해서라도 둘 다 죽여버리기 잘 했어.’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라닐과 유리아를 살해한 그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현장에 남아 있는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시타와 그 예민한 슐리펜이 작업을 도왔으니 아마 조처는 확실하게 됐을 터였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떠나기 전에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끝났다. 부원들의 방향성도 잡았고, 누나의 안전 또한 확보했다. 강림 사태가 앞당겨서 벌어지지 않는 이상 별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최후의 만찬을 하러 가 볼까.’
로난이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는 어젯밤부터 제도에 새로 마련한 집에 와 있었다. 큰 일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이와 밥을 먹고 싶었다.
로난의 왼손에는 해주의 준비가 끝났다는 세크리트의 편지가 쥐어져 있었다. 계단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이릴의 전매특허인 감자 스튜 냄새였다.
“누나답군.”
막 1층으로 내려온 로난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뭐 이렇게 많이 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