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24화 (124/333)

< 124. 비명을 찾아서(1) >

#124

“···뭐 이렇게 많이 모였어요?”

이른 아침임에도 주방은 낯익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말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왔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를 발견한 이릴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앗! 로난, 일어났구나!”

“누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히히, 나도 모르겠어. 네 친구들 말고는 다들 차례대로 오시던데?”

이릴은 모두가 엇비슷한 시간에 따로따로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누군가의 초대를 받고 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각자가 로난을 생각해서 찾아왔다는 의미였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이지. 제자가 긴 수행을 떠난다는데.”

“정확히는 수행이라기보다는 해주다. 이래서 뇌가 근육으로 된 칼잡이들은···커억!”

한순간 나비로제의 팔꿈치가 사라졌다. 뻑!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자로딘이 고꾸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렌 파나시르가 인자하게 웃었다.

“하하, 두 분은 여전하시군요. 보기 좋습니다.”

“바렌···.”

“긴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비로제 교관님의 말씀처럼 이런 자리는 참석하는 게 당연하지요.”

바렌은 천장 조명을 부수는 일이 없도록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바렌의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소년이 로난에게 다가왔다.

“가, 감사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 발루스. 잘 지내고 있냐?”

과거 로난의 징벌 부대 동기이자 밀렵꾼이었던 발루스였다. 전체적으로 멀끔해진 차림새 때문에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입속말을 우물거리던 그가 별안간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얌마, 잘 지내냐니까 왜 질질 짜고 있어. 재수없게시리.”

“태,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찾은 기분입니다. 정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참 나···바렌, 이 자식 잘라 버려요. 이렇게 유약한 걸 어디에 써먹어?”

“허허, 발루스 군은 최고의 조수입니다. 정말로 잘 해주고 있어요.”

바렌이 발루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가 업무를 돕기 시작한 이후 바렌의 일처리 속도는 거의 두 배가 빨라졌다고 했다. 어쨌든 밀렵꾼이 되어 징벌 부대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었다. 픽 웃은 로난이 발루스의 등을 두드렸다.

“계속 잘 해봐. 멋지다.”

“네. 반드시···!”

발루스가 허리를 반으로 숙였다. 화로 주변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릴이 요리가 담긴 접시들을 슐리펜에게 내밀며 말했다.

“슐리펜 님! 이것 좀 탁자 위에 놔 주시겠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알. 겠소.”

슐리펜이 뻣뻣한 동작으로 이릴이 내민 접시를 받아들었다. 어느새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걸작이군. 평민 여인의 지시를 받아 접시를 나르는 제국의 샛별이라.’

디디칸의 기계로 그림을 한 장 뽑아내면 아주 비싸게 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마르야가 스튜가 담긴 솥단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솥은 이리 주세요 언니. 제가 나를게요.”

“우와, 마르야는 힘이 진짜 세구나···!”

이릴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감탄했다. 아셀과 마르야를 비롯한 특급 모험 동아리의 부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상을 차리는 것을 돕고 있었다.

“우리 아셀도 와줘서 고마워! 여기서도 이웃이라 너무 좋아!”

“네, 넵! 저도 좋습니다!”

빠릿한 행색을 보아하니 아마 교수들보다 한참 이전에 온 모양이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하여튼 오지랖이 넓은 놈들이었다. 로난도 막 거들려는 차였다.

“엉?”

낯익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검보라빛 머리칼은 방금 자다 일어난 것처럼 부스스했다. 염력으로 식기를 나르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줄곧 이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데샨 언니보다 예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대가문 아칼루시아의 영애인 에르제베트였다. 아운 필라가 준 여명 마탑의 훈장이 그녀의 옷깃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로난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야, 오랜만이다.”

“핫, 로난 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르제베트가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로난을 마주 보던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맨몸에 포션을 발라 주던 기억이 뭉실뭉실 떠오르고 있었다.

“···아데샨 언니를 따라온 것뿐이에요! 그랑시아의 장남이 올 줄은 몰랐다구요.”

“그래, 고맙다. 이 시간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로난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에르제베트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소식 들었어요. 조심해서 다녀와요.”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온 귀가 붉었다. 몸을 돌린 그녀가 다시 식기를 놓기 시작했다. 그때 로난의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복이 많네.”

“선배?”

“게다가 다 미인이고.”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앞치마를 두른 아데샨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녀가 눈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준비 다 됐어. 어서 밥 먹자.”

로난이 움찔거렸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나 할까. 목소리도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혹시 화났어요?”

“아니. 내가 왜 화가 났겠어.”

“그럼 다행이고요. 나 돌아오면 그 언덕 또 같이 가요.”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풀어진 표정을 보니 어째서인지 마음이 놓였다.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나비로제가 피식 웃었다.

“조금은 발전했군.”

식사 준비가 끝나자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로난의 자리는 이릴과 아데샨의 사이였다.

반가운 면면들을 보고 있자니 제도로 이사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님버튼의 집 같았다면 모두 들어오지도 못했을 터였다.

거대한 솥단지에서는 감자 스튜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릴이 양팔을 활짝 벌리며 소리쳤다.

“에헤헤, 제 동생을 위해 이렇게 모여 주셔서 고마워요. 모두 많이 드세요!”

“잘. 먹겠소.”

슐리펜이 기계적으로 스튜를 퍼먹는 것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기세를 보아하니 잔반이 남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먼저 교육진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을 남겼다.

“잘 다녀와라 로난. 돌아오면 두 배로 훈련하기로 약속한 걸 잊지 말도록.”

“야만인 아니랄까 봐 격려해주지는 못할망정 협박이 앞서는군. 네 마나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바로 조처할 테니 안심하고 다녀와라.”

“얼른 오셨으면 좋겠군요. 다음 동아리 활동을 해야 하니까요. 그나저나 이 스튜 정말 맛있는데, 정말 감자로 만든 게 맞습니까?”

바렌과 나비로제, 자로딘은 격려와 함께 저마다의 조언을 해주었다. 다음은 이릴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헛기침을 한 그녀가 로난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흠흠, 로난. 위험한 일이라는 설명도 들었고, 혼자 고민도 많이 했지만 나는 말리지 않기로 했어. 누나가 되서 동생의 발목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까.”

“누나.”

“꼭 돌아오겠다고만 약속해줘. 그거면 충분해.”

입을 꾹 다문 이릴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로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에헤헤···고마워.”

이릴은 그제야 배시시한 웃음을 흘렸다. 소매로 눈가를 닦은 그녀가 로난의 뺨에 입을 맞췄다. 뒤이어 동아리 부원들과 에르제베트, 발루스와 아데샨이 차례대로 격려의 말을 건넸다.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원하는 바를 이루고 와.”

아데샨의 말을 마지막으로 적막이 찾아왔다. 영 목이 메는 것이 아무래도 각오 한 마디 정도는 뱉어 줘야 식사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씹던 스튜를 삼킨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있잖아요···”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먼지가 들어갔는지 별안간 눈앞이 시큰거렸다. 잠시 천장을 올려보던 그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다들 고마워요.”

로난이 히죽 웃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더 나은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머지않아 식사가 재개되었다. 그의 예상대로 이릴이 만든 감자 스튜는 한 숟갈도 남지 않았다.

****

간단한 송별회를 마친 로난은 곧바로 해주를 위해 이동했다. 특급 모험 동아리의 부원들과 시타만이 그를 자로딘의 집무실에 있는 세파라치오의 입구까지 배웅했다. 아셀이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로, 로난···금방 오는 거지?”

“너 같으면 그럴 수 있겠냐? 최소 한 달은 채우고 올 거야.”

로난이 낄낄거렸다.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심이었다. 그런 성대한 배웅을 받았는데 하루이틀만에 돌아오면 그만한 꼴값도 없을 터였다. 아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린 그가 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까는 말 못했는데, 다들 정말 고맙다. 열심히 살고 있어.”

“걱정하지···마.”

“으하하! 꼭 죽으러 가는 사람 같으니 그런 말은 자제하시게!”

“꼭 와. 못 돌아오면 죽여버릴 거야.”

“뺘···!”

시타가 뺨에다가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마르야의 숨 막히는 포옹을 마지막으로 인사가 끝났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슐리펜뿐이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재수 없는 놈아. 너는 여기까지 쫒아와 놓고 무게를 잡냐.”

“어차피 돌아올 걸 알고 있다. 육체가 무뎌지기 전에 조속히 복귀했으면 좋겠군.”

“어이가 없어서.”

로난이 헛웃음쳤다. 갑자기 표정을 굳힌 그가 슐리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로난은 코가 맞닿을 때까지 얼굴을 들이댄 채 입을 열었다.

“너한테는 많은 거 안 바란다.”

노을빛 눈동자가 타오르듯 일렁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사나운 기세에도 슐리펜은 동요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로난이 말을 이었다.

“누나를 지켜.”

“맹세하지.”

슐리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난은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몸을 돌렸다. 부원들의 격려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어두운 복도가 로난의 뒷모습을 삼켰다.

“왔느냐.”

“미안해요. 좀 늦었죠.”

복도를 빠져나오기 무섭게 세파라치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훨씬 더 복잡해진 마법진이었다.

기하학적인 문양은 바닥으로 모자라 벽면, 천장까지 뒤덮고 있었다. 아직 소녀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세크리트가 그를 맞이했다.

“아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지.”

세크리트가 껄껄 웃었다. 그는 로난이 어떤 배웅을 받은 지 알고 있었다. 로난은 딱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긴 하죠.”

“솔직해서 좋구나.”

“그래서···저걸 제 머리에 집어넣는다 이거죠?”

로난이 턱 끝으로 서재 한복판을 가리켰다. 악마의 심장을 연상케 하는 시커먼 덩어리가 공중에 뜬 채 맥박치고 있었다.

이번에 로난이 해주해야 할 저주가 실체화된 것이었다. 세크리트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도 제 저주의 원흉을 베고 나오면 되는 건가요?”

“정확하단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게야.”

세크리트는 해주할 시의 주의사항을 설명해 주었다. 술식을 개량하며 안정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네가 가져온 마석이 워낙 좋아서 도중에 풀릴 일은 없을 게다. 이제 모든 것은 네 하기에 따라 달렸어.”

“언제나 그랬죠. 준비됐어요.”

“그럼, 시작하겠다.”

로난은 덩어리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세크리트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파아아아···! 서재를 뒤덮은 마법진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덩어리가 작게 압축되더니 로난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돌아오기를 기다리마.”

뇌를 얼음물에 담그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세크리트의 입에서 노래하는 듯한 영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식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로난이 눈을 감았다. 이성을 유지하던 마지막 밧줄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일어나! 이 거지 자식아!!”

가까운 곳에서 성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로난이 눈을 떴다. 목조로 된 건물들이 시야의 양옆을 가리고 있었다. 좁고 푸른 하늘 속에서 깃털처럼 생긴 구름이 표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긴···?”

로난은 자신이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법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는지 등이 뻐근한 것이 느껴졌다. 으슥하게 그늘이 드리워 있는 것이 아무래도 어느 도시나 마을의 뒷골목인 듯했다.

“칼은···없군.”

습관적으로 허리춤을 만져 봤지만 검은 두 자루 모두 메어져 있지 않았다. 약간 더 커진 손이 눈에 들어왔다. 무사히 심상세계로 진입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얼굴 위로 차가운 액체가 끼얹어졌다.

“프헙!”

촤아악! 비린내 나는 흙탕물이 눈과 콧구멍 속으로 침투했다. 난데없는 기습을 당한 로난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눈에 흙이 끼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무언가 단단한 것이 광대뼈 아래를 강타했다. 뻐억! 고개가 거칠게 젖혀짐과 동시에 억센 손아귀가 로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까와 같은,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이 거지 새끼야. 일어나라는 말이 안 들려?! 여긴 우리 구역이니까 다른 데로 꺼지라고!”

“아···씨발···.”

앞머리를 쓸어넘긴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웬 뚱뚱하고 꼬질꼬질한 소년 하나가 자신의 멱살을 쥔 채 흔들고 있었다. 행색으로 미루어 보아 반박의 여지가 없는 거지새끼였다.

푸들거리는 턱살에는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그 옆에서는 웨어 소금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마르고 왜소한 애새끼 하나가 낄낄거리고 있었다.

“푸헤헤헤, 홀딱 젖은 꼴 좀 봐.”

두 놈 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면상이었다. 내가 이 새끼들을 어디서 봤더라? 로난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멱살을 잡은 돼지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어쭈, 째려보기까지 하네? 너 내가 누군지 알···크억!”

돼지가 으름장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로난의 주먹이 그의 입에 쑤셔박혔다. 콰직! 가리비를 격파하는 듯한 감촉과 함께 부러진 이빨이 튀어올랐다.

“히익···!”

소금쟁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돼지가 휘청거리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허억!!"

뻑! 로난은 곧바로 돼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서 처박힌 돼지가 바닥에 엎어졌다.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로난은 주머니에 양 손을 꽂은 채 돼지를 밟아대기 시작했다.

“이 좆만한 거지새끼야. 내가 니 친구야?”

“꾸이이익! 사, 살려줘!”

“우는 소리도 돼지 같네.”

“제, 제발···! 내가 잘못했어! 그만···!”

로난은 대꾸하지 않았다. 구타를 견디지 못한 돼지가 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로난은 그제야 발길질을 멈췄다.

“후···재수가 없으려니까.”

심상 세계에 진입하자마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거지한테 처맞다니, 최악의 도입부였다. 바지춤을 내린 로난이 기절한 돼지 위에 오줌을 갈겼다. 혹시 이거 현실에서도 지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체념했다.

‘에이, 세크리트가 알아서 닦아 주겠지.’

아직 머리가 몽롱한 것이 우선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소금쟁이는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얼어붙은 채 그 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볼일을 마친 로난이 소금쟁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담배 있냐?”

“흐, 흐아아아악!”

소금쟁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머지않아 그의 모습이 골목길 바깥으로 사라졌다.

골목의 양쪽 끝은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굽이 다그닥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웅성거림이 부산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 볼까···.”

돼지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챙긴 로난이 발걸음을 옮겼다. 뒷골목을 벗어나는 순간 환한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여긴.”

로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풍경이 어쩐지 익숙했다. 뾰족한 지붕을 가진 목조 주택들도, 나름대로 널찍한 도로도, 심심찮게 보이는 비싸 보이는 마차도 모두 눈에 익었다.

마침내 회상에 성공한 로난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가···자수했던 마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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