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봄이여 오라(3) >
#138
“시체는 알아서 추려 가라.”
“네? 이, 이타르간드 님. 그···겨울을 끝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살려서···.”
심문관의 얼굴이 굳었다. 섣불리 마녀를 죽였다가 겨울이 안 끝나면 그만큼 곤란한 상황도 없을 터였다. 허나 이타르간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팔을 쳐든 이타르간드가 겨울의 마녀를 겨냥했다. 주위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킨 사람들이 다급하게 복도 쪽으로 피신했다.
“빠, 빨리 가!”
“타, 타 죽는다! 어서 피해!”
구구절절한 영창 따위는 없었다. 이타르간드의 손바닥 앞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마지막 도전자가 복도에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쿠아아아아!! 마법진으로부터 주홍색 화염이 격류처럼 쏟아져 나왔다.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위력이었다. 비명과 탄성이 산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허어억!”
제방이 붕괴하며 물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흐르는 불이라는 이명에 걸맞는 화려함이었다. 지옥의 강이나 하천이 범람한다면 이런 광경이 펼쳐질 것 같았다.
“누, 눈이···!”
“젠장!”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섬광이 주테카를 휘감았다. 사람들이 황급히 눈을 가렸으나 빛은 손등을 뚫고 빠져 나왔다. 막다른 벽에 부딫힌 화염이 복도 쪽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방어막을 쳐요!”
에르제베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반투명한 장막이 복도와 탁 트인 공간 사이에 세워졌다. 동시에 역류해온 불길이 방어막을 덮쳤다.
“하윽···!”
에르제베트가 이를 악물었다. 세 겹으로 설치한 방어막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차례대로 주문을 영창했다.
“스, 스톤 월!”
“마나 배리어!”
각양각색의 방어 마법이 에르제베트의 장막에 덧대졌다. 그럼에도 화염을 완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입술을 짓씹던 에르제베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으,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손에서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형의 마나였다.
‘오러.’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에르제베트의 오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드럽게 흘러간 보랏빛 마나는 그대로 방어막에 덧씌워졌다.
“이, 이건···?”
“세상에, 방어막이 강화되고 있어.”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붕괴되던 마법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암벽이 녹아내린 부분에 새로운 돌이 차올랐다. 마나 장벽을 뒤덮고 있던 실금이 감쪽같이 메워졌다. 더는 불길이 새나오지 않았다. 로난이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에르제베트를 내려보며 말했다.
“그런 능력이었군. 좋은데?”
“놀리지 마세요. 으으···양 떼들을 보조하는 게 제 능력이라니.”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좋은 오러였지만 본인은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언제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계집애였으니까. 그렇게 일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열기가 잦아든 것을 느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끄, 끝났나?”
“그런 것 같은데요.”
방어막이 하도 많이 겹쳐져 있어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눈빛을 교환한 마법사들이 방어 마법을 하나씩 해제했다.
불길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두터운 암벽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후아아악! 사나운 열풍이 복도를 휩쓸었다.
“꺄앗···!”
“젠장, 요란하게도 저질러 주셨군.”
로난이 혀를 찼다. 다행히도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드러난 공간에서는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약한 잔불이 비 온 뒤의 물웅덩이처럼 여기저기서 타오르고 있었다.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팽배해 있는 것이 꼭 사막에 온 것 같았다. 벽과 바닥을 뒤덮은 서리나 천장에 자라 있던 사람만한 고드름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마녀는 어떻게 된 거지?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하, 무슨···.”
푸른 기둥에는 녹아내린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겨울의 마녀는 여전히 웅크린 채 얼음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타르간드는 멍하니 서서 건재한 얼음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 녹이지 못한 거야?”
“말도 안 돼. 드래곤의 불마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주변 온도가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었다. 얼음 기둥에서 배어 나오는 한기 탓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이타르간드가 입술을 비틀었다.
“필멸자 치고는 제법이군.”
이타르간드가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양쪽 팔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다시금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쿠아아아!! 다시금 급류 같은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만 들어도 아까의 배는 될법한 규모였다.
머지않아 열기가 잦아들자 사람들이 방어막을 해제했다. 조금 전과 별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그라드는 불길 사이에서 이타르간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럴 리가···.”
얼음 기둥은 아주 조금만 녹았을 뿐 여전히 건재했다. 그마저도 곧바로 다시 얼어붙어 버렸다. 이타르간드는 무리를 했는지 숨을 가볍게 몰아쉬고 있었다.
충격과 절망이 사람들의 눈동자를 스치고 있었다. 자신에게 영웅이 될 기회가 남아 있다고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뜨겁다고 알려진 레드 드래곤의 불조차 저 얼음을 녹이지 못하다니. 로난이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개자식. 온갖 큰소리는 다 치더니.”
이로서 제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털모자나 쓰면서 살아갈 확률이 높아졌다. 로난이 경멸 섞인 눈길로 이타르간드를 바라보던 찰나였다. 익숙한 기운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저건···?’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틀림없었다. 얼음이 녹았던 자리에서 반짝이는 마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야 시발. 저게 왜 저기서 나와?’
틀림없이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얼음이 조금이나마 녹은 뒤에 드러났다는 것은 얼음을 이루는 성분에 저게 함유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기억의 편린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결코 우연은 아닐 터였다. 반짝이는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것은 네뷸라 클라지에 뿐이다.
더군다나 교주로 추정되는 자의 검로가 얼음의 표면에 새겨져 있다. 도발하듯 정교하게 모방한 검술. 발견 당시 이미 얼음 속에 갇혀 있던 마녀.
사건의 윤곽이 점차 명료해지고 있었다. 카앙! 분을 이기지 못한 이타르간드가 주먹으로 얼음을 후려쳤다.
“빌어먹을!”
하지만 이변은 벌어지지 않았다. 심문관을 돌아본 그가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하등한 인간의 모습이다 보니 출력이 떨어진 것 같군. 마녀를 바깥으로 옮겨라.”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마녀는 이 주테카에 봉인해 뒀습니다. 해제를 위해서는 얼음을 없애거나 봉인술사들이 다시 모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태워 주겠다!”
이타르간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둥그렇던 눈동자가 가느다란 마름모꼴로 좁혀졌다. 촤악! 거대한 날개 한 쌍이 그의 등을 찢으며 자라났다. 심문관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아, 안 됩니다! 로돌란이 무너집니다!”
“감히 내게 명령하는 건가! 나는 흐르는 불 이타르간드다!”
이타르간드가 포효했다. 공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사람들은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묵묵히 턱을 매만지던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게 된 거였군.’
퍼즐이 맞춰졌다. 그는 얼음 기둥을 향해 곧바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셀이 당혹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로, 로난. 어디 가?”
“이제 다 알았어.”
“뭐···?”
“저 얼음. 부술 수 있을 거 같다.”
아셀의 눈이 커졌다. 이타르간드를 무시하고 지나친 로난이 얼음 기둥 앞에 섰다. 다시 검흔을 매만지던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 개자식들이 먼저 손을 댔어.’
원래대로라면 몇 년 뒤에야 나타날 겨울의 마녀가 지금 등장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기존의 그녀는 철저하게 계획적이고 주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헌데 지금의 마녀는 제도에 겨울을 불러온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이 역시 어마어마한 악행이었으나 궤가 조금 달랐다. 발견 당시 저 얼음 속에 가두어져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애도 당한 거야.’
로난의 예상이 맞다면 마녀 본인 또한 저 얼음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아마 무슨 수를 써서 겨울을 불러오게 한 뒤 저 안에 봉인한 거겠지.
반짝이는 마나를 다루는 것으로 모자라 다른 물질과 배합하는 것은 네뷸라 클라지에에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설마 진짜로 도발이었을 줄이야.’
검흔에서 도발하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 또한 착각이 아니었다. 로난은 유심한 관찰 끝에 깨달을 수 있었다. 표면에 남은 검흔은 얼음을 부술 수 있는 답안지였다.
저걸 그대로 따라 벤다면 얼음은 틀림없이 부서질 터였다. 다만 저 검흔을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눈앞에 솟아나 있는 얼음 기둥은 일종의 편지인 셈이었다. 제도를 구하고 싶다면 모습을 드러내라는.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구원자가 어딘가에 살아있다.’
결론에 도달한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해답을 알아낸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스르릉! 칼을 뽑아든 로난이 검끝으로 얼음을 겨누었다.
‘똑같이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어렴풋이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재현하기에는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난잡하게나마 그려진 검로는 그의 기억과 맞물려 정교한 영상으로 변모했다.
‘한번에.’
여전히 이타르간드가 난동을 부리고 있어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로난의 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나를 머금어 붉어진 칼날이 얼음 위를 춤추듯이 미끄러졌다.
짧은 참격이 빗발치는 1초식, 검 끝에서 혜성을 쏘아내는 2초식,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3초식. 저마다 모양이 다른 수백 획의 검격이 찰나에 행해졌다.
“으음? 로난?”
뒤늦게 그를 발견한 카라카가 눈썹을 치켜떴다. 그가 눈을 깜빡였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검격을 마친 로난이 납도했다. 철컥. 칼집이 라만차의 뿌리를 삼키는 순간이었다.
쩌저적! 줄곧 미끈하던 얼음 기둥 위로 거대한 균열이 발생했다. 반짝이는 마나가 핏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타르간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무슨···!”
“살아 있어서 기쁘군.”
로난이 픽 웃었다. 균열이 표면을 완전히 뒤덮음과 동시에 얼음 기둥이 폭발했다.
콰아앙! 정갈하게 토막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가두어져 있던 마녀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