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봄이여 오라(4) >
#139
얼음 파편이 비산했다. 갇혀 있던 마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양팔로 그녀를 받아낸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쓰으읍, 더럽게 차갑네.”
꼭 알몸으로 얼음덩이를 끌어안는 것 같았다. 두꺼운 외투도 그녀의 몸에서 스며 나오는 냉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녀의 얼굴을 본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겉모습은 그냥 평범한데.’
이벨린은 아셀이 입은 것과 같은 새카만 로브를 입고 있었다. 소매 부분에는 필레온 마법과의 신입생임을 상징하는 노란색 뱃지가 매달려 있었다.
아직 덜 자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전생에 보았던 마녀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냥 귀엽게 생긴 소녀였다. 빌어먹을 냉기와 하얗게 탈색된 머리카락만 아니라면 필레온에서 남학생깨나 홀렸을 얼굴이었다.
“이봐, 정신 차려.”
로난이 마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 머리통은 몸에 달린 부속품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죽은 거 아냐?’
로난은 다급하게 검지를 마녀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다행히도 미약하게나마 숨을 들이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몸 역시 핏기없이 창백하기는 했지만 상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물어볼 게 많단 말야.”
하지만 계속 의식이 없는 걸 보면 상태가 좋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로난이 외투를 벗어서 마녀에게 입혔다.
“으으···시발.”
이타르간드가 온도를 높여 놔서 망정이었다. 안 그랬다면 갈비뼈가 동파되었을 테니까. 단추를 하나씩 채우던 와중, 뒤쪽에서 에르제베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님···?”
그러고 보니 주위가 조용했다.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멈춰서 있었다.
이타르간드 또한 바닥에 널브러진 얼음 파편들을 벙찐 채 쳐다보고 있었다. 침묵은 삼십 초 가량 더 이어졌다. 그를 안내했던 심문관이 펄쩍 뛰어오르며 외쳤다.
“어, 어, 얼음이 깨졌다!”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제야 사람들의 말문이 트였다. 점점 커지던 웅성거림은 감탄이 되어 터져 나왔다.
“마, 마녀의 껍질이 깨졌다!”
“세상에, 설마 저 검으로 자른 거요?!”
“나, 나도 못 봤소···!”
그들은 온갖 호들갑을 떨며 자신이 본 기적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마녀가 무서운 탓인지 쉽사리 다가오지는 못했다. 천천히 걸음을 뗀 에르제베트가 마녀의 앞에 멈춰 섰다.
“···이벨린.”
에르제베트가 목의 상처를 매만졌다. 입술을 연신 짓씹어 대는 걸로 봐서 감정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수차례 반복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혀 못 봤어요.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냥 칼로 잘랐지 뭐.”
“그게 전부?”
“엉.”
“···2년만에 봐도 여전하시네요.”
에르제베트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여명 마탑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불현듯 복도 저편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선을 돌리자 새부리 가면을 뒤집어 쓴 사람 대여섯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카라카와 같은 심문관으로 보였다.
“···맙소사. 보고가 사실이었군요.”
주변을 둘러본 심문관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저마다의 작업에 착수했다. 누군가는 얼음 파편을 주워서 상자에 넣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수첩에다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랫동안 현장을 살피던 사내가 로난에게 다가왔다. 부엉이를 형상화한 가면이 인상적이었다. 로난과 마녀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특수 심문관 아흐자입니다. 혹시 껍질을 깬 본인이십니까?”
“네.”
로난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놀란 기색을 비친 사내가 재차 질문했다.
“혹 성함과 소속이 어떻게 되십니까?”
“필레온 아카데미에서 온 로난이에요.”
“그렇군요. 로난 님,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방금 제도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눈이 그쳤다고 합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일 년을 내리 퍼붓던 눈이 그치고 푸른 하늘이 드러났다는 연락이 왔다 전달했다. 이렇게 일이 빠르게 해결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심문관 아흐자는 앞으로의 절차와 받게 될 보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로난이 헛웃음을 치는 빈도가 늘어났다. 원체 큰 사건이었어서 그런지 보상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아흐자가 말을 이었다.
“아마 조만간 황궁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대기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니미, 황제를 만난다고요?”
“제도에 봄을 되찾아준 영웅인데 당연한 일이지요. 아무리 못해도 만찬 정도는 같이 하게 되실 겁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실소했다. 두 번의 삶을 통틀어서 황제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내용을 모두 전달한 아흐자가 허리춤에서 검은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럼 잠시 물러서 주시겠습니까? 겨울의 마녀를 구속하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왜 그러십니까?”
“얘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요. 일단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좀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아흐자의 얼굴이 굳었다. 오 초 정도 경직되어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이벨린 드로자의 신분은 어엿한 죄수입니다.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는 흉악범을 자유롭게 둘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아흐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엄정한 말투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 개기기도 애매했다. 이걸 어떻게 설득하지 머리를 굴리는 찰나였다. 뒷짐을 진 채 다가온 카라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허허, 너무 딱딱하게 구시지 말고 바람 정도는 쐬게 해주시지요.”
“카라카 심문관님.”
“제도를 구한 영웅이잖습니까. 설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으으음···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같은 심문관으로서 부탁드리지요.”
아흐자가 침음을 흘렸다. 한창 정보 수집에 착수하던 심문관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카라카는 심문관 중에서 제법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심문관님을 믿겠습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너무 오랜 시간은 안 걸리게 부탁드립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아흐자가 등을 돌렸다. 자료 수집을 마친 심문관들이 주테카를 벗어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라카가 로난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늙은이가.’
로난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아마 이것이 카라카가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일 터였다. 똑같이 윙크를 보낸 로난이 마녀를 안아들었다.
“우선 눕혀 놔야겠죠?”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조금만 올라가면 집무실이 있으니 거기로 가시지요.”
“좋아요. 거기로 가요."
의식이 없으니 안아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외투를 입혀놔서 그런지 아까보다 몸이 훨씬 따뜻해진 것 같았다. 문득 이변을 포착한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으음?”
스아아···마녀의 머리카락색이 변하고 있었다. 온통 새하얗던 백발은 뿌리 부분부터 건강한 갈색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로난의 미간이 가볍게 좁혀졌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꼭 눈이 녹으며 그 아래 파묻혀 있던 흙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저주 같은 게 풀리기라도 한 걸까?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에르제베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셀 님, 왜 그래요?”
“으음?”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서 있는 아셀과 그의 앞에서 손뼉을 치고 있는 에르제베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의 난리 통에도 아셀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 거예요? 아셀 님!”
에르제베트가 무슨 짓을 해도 아셀은 반응하지 않았다. 넋을 놓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셀?”
****
“···핫!”
아셀이 눈을 떴다. 불가사의한 감각이었다. 원래도 눈을 뜨고 있던 것 같은데. 흐릿하던 시야가 명료해지며 자신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는 에르제베트가 나타났다.
“흐야악?!”
아셀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에르제베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엉거주춤한 자세임에도 몸의 균형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 여기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아셀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멈춰 있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마녀를 끌어안은 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로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여전히 벙찐 채 서 있는 이타르간드까지. 모두가 정지해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떠올리려 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로난이 얼음을 부수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다음 장면이 끊겨 있었다.
그때,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구나, 아이야.】
“흐억···!”
여인의 목소리였다.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심장이 배꼽까지 내려앉은 것 같았다. 심호흡을 수십 차례 반복한 아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녀가 손을 들며 싱긋 웃었다.
【아주 예쁜 아이구나.】
“끄아아아아악!!”
아셀이 축적하고 있던 비명을 터트렸다. 쿠당탕! 뒤로 튕겨져 나가다시피 한 그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여인은 그 모습이 재밌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아셀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입을 열었다.
“누, 누구세요···?!”
【누구라. 흥미로운 질문이구나.】
여인이 눈웃음을 쳤다.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눈으로 짜낸 비단 같았다. 탁한 청안과 새빨간 입술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얀색을 띠었다.
겉모습만 보기에는 나비로제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지만 분위기가 기묘하여 정확히는 짐작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름이 많으니 마음에 드는 것으로 부르려무나. 가장 잔인한 계절, 하얀 땅, 아니면···】
잠시 여인이 말꼬리를 끌었다. 우아한 몸짓으로 걸어간 그녀가 이벨린의 옆에 섰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겨울의 마녀라 불러도 좋단다.】
“겨, 겨울의 마녀···?”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겨울의 마녀의 얼굴을 아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가 로난에게 안겨 있는 이벨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애가 겨울의 마녀가 아니었나요?”
【이벨린은 내 그릇에 불과하단다. 가엾은 아이지. 웬 괴한들에게 사로잡혀 일 년을 차디찬 얼음 속에서 보내다니···.】
여인은 기절한 이벨린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갈색으로 변해 가는 이벨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헛된 시간은 아니었단다. 이렇게 반짝이는 별이 내 품으로 찾아왔으니. 이벨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
“바, 반짝이는 별···? 그, 그보다 제게 무슨 일이신지···.”
【아아, 별 건 아니란다.】
쓰다듬는 것을 멈춘 여인이 아셀에게 다가왔다. 쪼그리고 앉은 그녀가 아셀의 양쪽 볼을 살며시 붙잡았다.
【정말 별 거 아닌 일이야···.】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차가웠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로 늘어진 드레스 사이로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입을 맞출 듯이 얼굴을 밀착시킨 여인이 작게 속삭였다.
【네 몸을···내게 다오.】
“네?”
아셀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아셀은 자라난 여인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팔다리를 휘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무리 용을 써 봐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황급히 주문을 영창하려 했으나 순식간에 자라난 머리카락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으으읍!”
【괜찮단다 아이야. 괜찮아···.】
감미롭게 속삭인 여인이 아셀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의식이 점차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머리카락을 물어뜯은 그가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로, 로난!!”
****
“···아.”
아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서 손뼉을 치던 에르제베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뭐야, 정신이 들어요?”
아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발을 이리저리 움직여본 그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랍구나···로르혼 그 늙은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 아셀 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다.”
“···괜찮은 거 맞죠?”
아셀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달라진 분위기에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투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한 것 같았다.
“얌마, 너 괜찮아?”
그때 로난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벨린은 카라카에게 넘겨준 채였다. 그가 아셀의 한쪽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조용해? 무슨 일 있어?”
“그대는···.”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로난을 응시하던 아셀이 배시시 웃었다. 난데없이 로난을 끌어안은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의 왕자님···.”
“이,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래?”
로난의 얼굴이 암석처럼 일그러졌다. 에르제베트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세상 질색하며 아셀의 양어깨를 붙잡아서 떨쳐냈다.
“너 돌았어? 엉?”
“야속하군. 이 정도는 해 줄수 있는 것 아닌가.”
아셀이 한쪽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꼭 소녀 같은 행동거지였다.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긴 아셀이 작게 웅얼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미모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여전히 눈이 참 높구나.”
“···돌아버린 게 확실하군.”
닭살 같은 소름이 로난의 목덜미를 타고 오소소 올라왔다. 경멸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에르제베트가 입을 열었다.
“이, 이 짐승···아데샨 언니를 두고 어떻게 이런···심지어 아셀 님은···!”
“에르제베트. 닥쳐.”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셀은 여전히 여성스러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위 때문에 뇌 일부가 얼어 버린 것 같았다. 물리적인 치료가 시급해 보였다. 로난이 막 소매를 걷어붙이려는 찰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멈춰라.”
“엉?”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레드 헤츨링 이타르간드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밖으로 꺼낸 날개는 아직도 집어넣지 않은 채였다.
“어떻게 한 거지?”
“뭘?”
“너는 나조차도 녹이지 못한 얼음을 부쉈다. 무슨 속임수를 쓴 거냐.”
“속임수는 무슨. 실패했으면 조용히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로난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이타르간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 납득할 수 없다.”
“그럼 어쩔 건데?”
“네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타르간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뭐라 할 새도 없이 그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거목을 연상케 하는 꼬리가 자라나고 있었다. 쿠구구구! 입이 길게 튀어나오며 악어 같은 주둥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붉은 색채를 더해가는 날개를 보며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순 미친 새끼 아냐 이거!”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라.”
아무리 레드 드래곤 중에 막 나가는 놈이 많다고는 해도 이건 좀 심했다. 주테카가 진동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심문관들이 달려와 필사적으로 그를 말렸다.
“이, 이타르간드 님! 안 됩니다!!”
“닥쳐라!”
이타르간드가 포효했다. 피어에 압도당한 몇몇 심문관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이미 반쯤 드래곤으로 변해 있었다.
‘돌겠네 진짜.’
지금 그들의 위치는 깊은 해저였다. 저 철없는 용이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외벽이 무너지며 모조리 수장 당할 가능성이 컸다.
이쯤 되면 피를 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반쯤 죽여서라도 이타르간드를 저지해야 했다. 한숨을 내쉰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기려는 차였다.
푹! 로난의 머리 위로 쏘아진 무언가가 이타르간드의 가슴에 박혔다.
“···어?”
너무 빨라서 미처 제대로 보지 못했다.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이타르간드가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커헉···!”
가로수만한 얼음송곳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일렁이며 스며나오는 한기가 이타르간드의 몸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음이었다. 로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겨냥하듯 손을 뻗고 있는 아셀이 눈에 들어왔다.
“아셀···?”
【아아, 역시 대단하구나.】
아셀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균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하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