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40화 (140/333)

< 140 봄이여 오라(5) >

#140

아셀의 머리카락이 뿌리부터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자그마한 손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냉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지금 무슨···.”

【아하하, 이토록 우수한 그릇은 처음이야.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구나.】

아셀이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웃음소리에서 죄책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왜 이딴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내야 했다. 찰나 몇 가지 기이한 요소들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갑자기 갈색으로 돌아온 이벨린의 머리카락과 그를 대신하듯 탈색되고 있는 아셀. 섬뜩할 정도로 호모스러워진 태도. 추리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젠장, 빙의체였나.’

아무래도 겨울의 마녀는 바쥬라와 같은 영체인 모양이었다. 육신 없이 세상을 떠돌며 숙주를 찾아다니는. 전생에는 경험치 못했기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로난이 아셀에게 달려들었다. 콱! 아셀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린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 거냐. 겨울의 마녀.”

【아아, 웬일로 거칠구나.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아셀이 교태롭게 눈웃음쳤다. 머리카락을 완전히 잠식한 백색은 속눈썹마저 새하얗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그 자식 몸에서 나와.”

【아까부터 일부러 그러는 거니? 계속 모른척을 하면 조금 슬프단다.】

“나는 너를 몰라.”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너는 얼굴도 어려진 것 같구나. 부러워라.】

아셀은 대답하는 대신 영문 모를 소리만 지껄여 댔다. 아무래도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목이 상당히 조일 텐데도 아셀의 표정은 변화 없이 태연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로난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만 애태우고···어서 나를 이름으로 불러다오. 너만은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지 않느냐.】

“염병.”

연인에게 말하듯 다정한 말투였다.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한 로난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그가 아셀의 관자놀이에 주먹을 꽂으려는 찰나였다. 뒤쪽에서 고막이 찢어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악!!”

“에이, 씨발.”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로난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음에 직격당한 이타르간드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의 몸이 벽이나 바닥에 부딫힐 때마다 로돌란이 흔들렸다. 가슴에 반쯤 파묻힌 얼음 송곳에서는 끊임없이 한기가 새나오고 있었다. 고통 탓인지 뽑아낼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셀이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영 시끄럽구나. 간만의 재회인데.】

팔을 들어올린 아셀이 이타르간드를 겨냥했다. 순식간에 모여든 한기가 그의 손 앞에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사색이 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그만두지 못해!”

로난은 다급하게 아셀의 팔을 쳐냈다. 동시에 먼젓번에 쏜 것과 같은 얼음 송곳이 발사되었다. 콰직! 이타르간드의 목을 스치며 날아간 얼음이 벽면에 처박혔다. 아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방해하느냐?】

“몰라서 묻는 거냐? 저 애송이는 나바르도제의 일족이야.”

【아하, 어쩐지 핏줄만은 고귀해 보이더니. 확실히 죽인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지겠구나.】

아셀이 팔을 내렸다. 다행히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가만히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헌데, 딱히 상관없지 않느냐.】

“뭐?”

딱! 벽면에 박혀 있던 송곳이 뽑혀 나왔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매끄럽게 회전한 송곳이 다시 이타르간드를 향해 쏘아졌다.

“빌어먹을···!”

몸을 돌린 로난이 검을 휘둘렀다. 쐐액! 초승달 형상의 검기 다섯 개가 요격하듯 쏘아졌다.

하지만 얼음 송곳은 자유자재로 경로를 뒤틀어 가며 결국 목표에 도달했다. 전생에 본 마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작이 정교했다. 푸욱! 이타르간드의 등을 사선으로 꿰뚫은 송곳이 그의 옆구리로 빠져 나왔다.

“허어어억!”

이타르간드가 헛숨을 들이켰다. 난동이 멎었다. 그는 옆구리에 자라난 얼음 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쿵! 히죽거리던 아셀이 말을 이었다.

【그대와 나의 힘을 합친다면, 불의 어머니도 적수가 되지 못할 테니까.】

“미친년이···!”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이렇게 막 나갈 줄은 몰랐다. 빡!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그가 칼자루로 아셀의 뒷목을 내리쳤다.

【아윽!】

다행히도 이번에는 통했다. 아셀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의식을 잃었다. 끔찍한 적막이 주테카에 내려앉았다. 죽은 듯이 굳어 있던 에르제베트가 입을 열었다.

“이,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나도 몰라. 아무래도 빙의당해서 몸을 빼앗긴 것 같다.”

“비, 빙의라고요? 누구에게···.”

“겨울의 마녀지 누구긴 누구겠어.”

에르제베트의 눈이 커졌다. 문득 로난은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나저나 다 어디 갔어?”

“양떼들은 이타르간드가 날뛸 때 전부 도망갔어요. 한심한 사람들.”

“아냐,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있어 봤자 별 도움도 안될 터였다. 다만 에르제베트만 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멍하니 서있던 카라카가 입을 뗐다.

“···당황스럽군요.”

카라카는 당혹을 금치 못한 채 난장판이 되어 버린 주테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벨린 드로자는 여전히 그에게 안긴 채 숨을 색색거리고 있었다.

“아직 있었네요. 카라카.”

“죄수를 관리하는 것이 제 임무니까요. 그나저나 이건···.”

갈라진 목소리에서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심문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하얗게 변한 아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쩌다가 이 사단이 났는지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로난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카라카. 그 애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줘요. 그리고 다들 최대한 빨리 도망치거나 몸을 지킬 준비를 하고 있으라 전해줘요. 뭔가 느낌이 안 좋으니까. 여기로는 아무도 못 오게 해 주고요.”

“···로난 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최대한 수습해 봐야죠. 어서 가요.”

로난이 그를 채근했다. 잠시 고민하던 카라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벨린을 안아든 채 주테카를 빠져나갔다.

로난은 축 늘어진 아셀을 벽에 기대 앉혀 놓았다. 아셀의 상태를 살피던 그가 에르제베트를 돌아보았다.

“너는 나 좀 도와 주라. 2년 동안 염력도 좀 늘었냐?”

“그야 어느 정도는···뭘 하시려구요?”

“저 자식, 죽으면 안 돼.”

로난이 이타르간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엎어진 거체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숨을 위태롭게 껄떡이는 것이 저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오 분 내로 죽을 것 같았다.

‘골치아프군. 하필이면 오늘 이런 일이···.’

만약 여기서 이타르간드가 죽었다간 용의 도시 아드렌과 제국 간에 불화가 생길 터였다. 그의 죽음을 빌미 삼은 급진주의자 드래곤들이 전쟁을 주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두 세력이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종말이 몇 년 밖에 안 남은 시점이라면 더더욱.

로난은 머뭇거리는 에르제베트의 손목을 붙잡고 이타르간드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인간도 드래곤도 아닌 기묘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상처가 완전히 얼어붙어서 피는 흐르지 않고 있었다.

“으이구 등신아, 엄마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크으···허어억···인간···.”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겨울의 마녀가 악독한 이유였다. 저 얼음에 당한 부상은 치료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송곳을 안 뽑고 내버려 두면 냉기가 그를 완전히 잠식할 테고, 섵불리 뽑았다가는 이미 얼어붙은 장기가 바스라질 터였다. 비상용 포션은 가지고 있었지만 덩치에 비해 양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문득 로난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잠깐, 내가 그걸 썼던가?’

이런 상황에 적합한 물건이 하나 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받기만 하고 쓴 기억은 없었다.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로난이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있네.”

작고 햐얀 구슬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대륙의 최북단에서만 나는 만년설화 진주였다.

마나량을 늘려주고 냉기 저항을 높여주는 성질이 있는 지고의 약재. 2년 전에 아데샨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아깝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금전적인 가치는 둘째치고 그냥 남에게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아니라면 당장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대의를 위해서. 그리 되뇌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이타르간드. 너는 이대로 내버려 두면 곧 죽어.”

“뭣···이···.”

“마녀의 냉기는 네 심장을 얼려 버릴 거야. 저항해도 소용 없어. 드래곤이라고 해서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종국에는 네 몸 전체가 얼음으로 변해서 무너지겠지. ”

로난이 담담하게 말했다. 전생에 본 것을 기반으로 한 묘사에 과장은 섞여 있지 않았다. 이타르간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침묵하던 그의 이빨 사이로 나지막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죽고 싶지···않다.”

“좋아. 그럼 내가 시키는대로 해. 이 부잣집 고양이처럼 생긴 아가씨가 네 몸에 박힌 송곳을 뽑을 거야. 그러면 너는 즉시 인간으로 폴리모프 해야 돼. 죽고 싶을 만큼 아프겠지만 네가 살 길은 그것뿐이야.”

그리 말한 로난이 만년설화 진주를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절반을 이타르간드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꿀꺽. 이타르간드가 진주를 삼켰다. 머지않아 얼어 있던 그의 상처가 녹으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타르간드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크흐..크허어어···!”

“아, 악화된 거 아니에요?”

“진주의 효력이 몸속의 냉기를 몰아내고 있는 거야. 슬슬 하자.”

로난이 에르제베트에게 눈짓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염력을 발현했다. 촤아악! 이타르간드의 몸에 박혀 있던 송곳들이 뿌리째 뽑혀 나왔다. 붉은 선혈이 물보라처럼 흩날렸다.

“크아아아아아아!”

“폴리모프!”

로난이 다시 날뛰려는 이타르간드를 향해 외쳤다. 포효를 내지르던 그의 몸이 빛으로 휩싸였다. 머지않아 백금발의 청년으로 변한 이타르간드가 바닥에 엎어졌다.

“허억! 크어어억!”

황급히 달려간 로난이 이타르간드를 부축했다. 네 개의 구멍에서 피가 울걱울걱 샘솟고 있었다.

몸이 줄어들어서 해볼 만 했다. 그는 비상용 포션을 환부에 들이부었다. 치이익···! 물이 증발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피가 멎은 것을 확인한 로난이 픽 웃었다.

“빌어먹을 놈. 욕 봤다.”

“흐···흐으으···너는···도대체···.”

이타르간드가 로난을 올려보았다. 저승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시기가 사라져 있었다. 한참이나 로난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크윽···.”

“그래. 시끄럽게 굴지 말고 좀 자라.”

다행히도 죽은 게 아니라 지쳐서 기절한 것이었다. 이로서 용과 인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일축되었다. 큰 고비를 넘긴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누구지?】

“젠장.”

마녀의 목소리였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로난은 서둘러 남아 있는 만년설화 진주를 다시 반으로 쪼갰다. 한 쪽은 자신이 먹고, 나머지 한 쪽은 에르제베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로, 로난 님?”

“먹어 둬.”

“으엡···! 켁! 켁!”

얼떨결에 진주를 삼킨 에르제베트가 콜록거렸다. 호흡을 가다듬은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아셀이 그들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왜 저러고 있어?”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울처럼 평평한 얼음벽이 아셀의 앞에 솟아나 있었다. 얼음에 비친 로난을 바라보던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아니야. 어째서···.】

감출 수 없는 실망이 목소리에 묻어나 있었다. 드디어 로난이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로난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젠장, 그걸 이제야 알았냐?”

【이건 불가능해. 그렇게나 닮았는데···! 너, 아버지의 이름이 뭐지?】

“나도 몰라.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네가 찾는 사람이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냐?”

【아···아아아···!】

아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절망에 찬 표정을 지으며 신음하던 그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아이···여자가 아니구나.】

“뭐야, 모르고 있었어?”

【말도 안 돼. 이렇게나 아름다운데···이렇게 살결이 부드러운데···!】

“···하긴 헷갈릴만하긴 하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셀이 남자라는 것을 믿지 못했으니까. 멋모르고 저 난쟁이에게 고백했다가 마음이 파괴당한 남학생의 수만 두 자리가 넘는다고 들었다.

【이러면 다 틀어졌지 않느냐···내가 어떻게 로르혼의 감옥을 탈출했는데···아름다운 그릇에 담겨 그 아이와 재회하겠다는 나의 계획이···.】

아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걸 보면 보통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닌 듯했다.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거지?”

예상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이상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로난이 두 개의 칼자루를 동시에 잡아당겼다. 스르릉! 라만차의 시커먼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집째로 뽑혀 나온 이미르가 반짝이는 마나를 흩뿌렸다.

이미르를 뽑지 않은 것은 아셀을 베지 않고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라만차로 아셀을 겨눈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럼 이제 내 친구 몸에서 나와. 주제도 모르는 아줌마.”

로난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에르제베트가 주문을 영창했다. 벌어져 있던 아셀의 입술 사이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밉구나···모든 것이.】

이미르의 칼집이 그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든 아셀이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아아앙! 주테카의 벽면이 폭발하며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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