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50화 (150/333)

< 150. 알현(2) >

#150

“생존자가 있었다니 놀랍구나. 그런데 왜 저 모양이 된 거냐.”

“···나도 몰라요.”

나비로제의 질문에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국군 장정 다섯 명이 각각 소령의 머리와 팔다리를 붙들고 옮기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채 호송 마차에 태워지는 모습이 영 안쓰러웠다.

“안타깝군. 강직한 군인인데.”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래, 그녀가 황실 기사단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보았지. 도대체 뭘 보았길래···.”

나비로제가 말꼬리를 끌었다. 그러고 보니 네메아는 원래 황실 기사단 소속의 엘리트였다.

소령은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공황 상태에 빠져 날뛰던 그녀는 결국 진정제를 다섯 발씩이나 맞고 나서야 발작을 멈췄다. 로난의 담배를 한번 더 뺏어서 피우던 나비로제가 방금 전의 그 중령을 불러세웠다.

“거기, 중령.”

“네, 넵! 나비로제 님!”

“네메아 소령이 정신을 차리려면 어느 정도 걸릴 것 같나?”

“저,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발견 당시의 상태로 미루어 봐서 제법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무리 웨어라이온이라도 보통은 두 발 정도로 잠들기 마련인데···.”

중령이 자신 없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문득 네메아가 했던 행동이 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두려워했다.

이건 제법 큰 단서였다. 주홍색 눈동자에 저렇게 칼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서도 세 명이 전부였으니까.

‘역시 그 자식이 한 짓인가. 그렇다기에는 검흔이 조잡한데.’

생각할수록 의문이 커졌다. 딱 들어맞는 용의자가 없었다. 로브쟁이가 했다기에는 실력이 미흡했고, 구원자와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일단 구한 게 어디야.’

자세한 것은 소령이 정신을 차리면 밝혀질 터였다. 의외로 다친 곳도 없었으니 안정을 되찾으면 증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시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생했어. 시타.”

“뺘아~”

일단 로난은 한 명이라도 살렸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상황이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나비로제가 입을 열었다.

“일단 돌아가지. 고생 많았다.”

“교관님도요.”

“오늘 사건으로 많은 것이 바뀌겠군···.”

나비로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로난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황제의 명령으로 신설된 부대가 이렇게 제도와 가까운 곳에서 떼죽음을 당한 것은 결코 쉽사리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 역대 최강이라 불리우는 검성이 연루되어 있다면 더더욱.

하늘은 어느덧 완전히 개어 있었다. 참담했던 사건과는 별개로 화창한 햇볕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말에 올라탄 그들이 왔던 길을 따라 달렸다. 필레온에 막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정문 앞에 웬 으리으리한 마차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뭐야?”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얼마나 화려했는지 학생들이 바글바글하게 몰려서 마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비단옷을 차려입은 노인 하나가 마차 앞에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다.

어쨌든 저기로는 못 지나가겠군. 로난이 막 말머리를 돌리려는 차였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노인과 로난의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 거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엉?”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염소처럼 돋아난 수염이 인상적인 노친네였다. 로난의 얼굴을 뜯어 살피던 그가 입을 열었다.

“로난 님. 맞으십니까.”

“어...맞는데요.”

“그렇군요. 지금 바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노인이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니라면 이런 늙은이와 선약을 잡은 기억은 없었다.

“지금 당장요?”

“그렇습니다.”

“보다시피 제 꼴이 지금 말이 아닌데.”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갈아입을 옷을 드리겠습니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피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옷차림만 봐도 누군가의 초대를 받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 텐데. 참다 못한 로난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영감은 뭐길래 남한테 오라 가라야? 황제께서 나를 부르기라도 했어?”

“그렇습니다.”

“···엉?”

한순간 로난의 뇌가 굳었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지? 황제라고? 노인이 허리를 한결 깊게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제 태도가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디 저와 함께 가 주셨으면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귀공을 급히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갈아입을 옷을 빌려준다는 말을 덧붙였다. 로난이 나비로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아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오늘 대련은 못할 것 같군.”

“···그러게요.”

“기다리지. 잘 다녀와라.”

말에서 내린 로난이 마차로 갈아탔다. 대신 고삐를 잡은 나비로제가 교정 안쪽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로난을 태운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얼떨결에 마차에 올라탄 로난은 그대로 황궁으로 향했다. 근위병들이 어떤 제지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다행히도 황제의 부름을 악용하는 살인마 집단은 아닌 것 같았다.

황궁은 처음이었다. 전생에도 멀찍이서 보기만 했지 들어가본 적은 없었다. 이번 생 역시 발을 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제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라 여겨지는 천년제국의 심장. 그 웅장하면서도 고매한 자태를 보고 싶은 마음은 로난도 굴뚝같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병신 같은 옷으로 갈아입는 데 모든 시간과 기력을 소모한 탓이엇다.

“젠장, 이게 맞아요? 숨을 못 쉬겠는데.”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체격이 좋으셔서···.”

“그리고 뭐가 이렇게 화려해요? 야생 앵무새도 아니고.”

“조금 예전에 만들어진 예복이라···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난은 인상을 한껏 찡그린 채 옷깃을 바로잡았다. 노인이 갈아입으라고 건네준 옷은 여지껏 입어본 의복 중에서 손꼽히게 끔찍했다.

비단뱀처럼 조여드는 것으로 모자라서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화려한 장식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만약 장식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로난은 노인의 수염을 모조리 뽑아 이마에 붙여 버렸을 터였다.

언젠가 감자 포대에 구멍만 뚫어서 입어본 적이 있었는데, 차라리 편의성 면에서는 그게 더 나은 듯했다. 노인이 말했다.

“아, 칼은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니미, 칼도 못 가져가요?”

“그야 황제 폐하를 뵈는 일이니까요. 소중히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흉기가 될 만한 물건을 맡겨야 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라 개기기도 애매했다. 로난이 마지못해 칼을 반납하는 순간이었다. 끼이익.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군요.”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바깥에는 웅장한 성채나 아름다운 정원 대신, 무슨 마차를 세우는 터널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결국 황궁 구경은 하나도 하지 못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이쪽입니다.”

염소 수염은 뻔뻔스레 로난을 안내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응접실로 보이는 넓은 공간이었다.

화려한 방에는 휴식을 위한 가구와 소품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반대쪽 벽면에 으리으리한 대문이 하나 더 나 있었는데 아마 알현실과 이어지는 문인 듯했다. 노인이 말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조금만 기다리시면 황제께서 호출하실 겁니다.”

“썩 사라져요.”

노인은 바람처럼 물러났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로난이 심호흡했다. 참 정신 없는 하루였다. 사실 자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이건 다 꿈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응접실에는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로난과는 달리 세련된 옷을 차려입은 그들은 저마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에게 시선이 닿은 로난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어?”

정장을 차려입은 웨어라이온 한 마리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아는 사람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로난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바렌.”

“음?”

사자가 고개를 돌렸다. 로난과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책을 덮은 바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로난? 정말 당신인가요?”

“오랜만이에요.”

“오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요.”

2년 만의 재회였다. 바렌이 양팔을 벌려 그를 포옹했다. 짐승의 강렬한 체취가 아닌, 신사에게서나 날법한 향수 냄새가 났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정말 많이 자랐군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뭐, 나름대로요. 교수님은 어디에 가 있던 거에요?”

“아아, 남부의 파타르에 있었죠. 어제 막 정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남부? 정리?”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해주를 끝마치고 바렌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종의 사정으로 필레온을 떠났다고는 들었는데 뜬금없이 남부라니? 바렌이 말을 이었다.

“제도에 겨울이 닥쳐온 탓에 약초를 재배할 수 없었거든요. 당신은 제게 있어서도 진정한 영웅입니다.”

로난의 양손을 붙잡은 바렌이 머리를 연신 숙여댔다. 그는 마녀가 불러온 겨울 때문에 하마터면 약초를 모두 죽일 뻔했다고 말했다.

로난은 그제야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업도 있는데 그 귀한 풀을 다 죽일 수는 없었겠지. 그가 질문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에요?”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저희 말고도 몇 명이 더 있더군요. 저 같은 경우는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포션을 무상으로 나눠준 공을 인정받아서 왔습니다.”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제도에 겨울이 닥쳤을 당시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수염을 기른 중년의 귀족은 자신의 숲을 땔감 확보 목적으로 벌목하는 것을 허락했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귀부인은 가진 보석을 팔아 시민들에게 식량과 옷가지를 배급해 주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전부 상을 주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다만 의문이 가는 점이 있다면 편할 때 오라 해놓고 왜 지금 이렇게 단번에 불렀냐는 점이었다.

물론 이 멍청한 옷을 제외하면 딱히 불만은 없었다. 밀린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바렌과 재회한 기쁨이 아침부터 축적되어 있던 분노를 중화시키고 있었다.

“뭐, 일단 앉죠. 그래서 남부에서는 죽여주는 암사자 좀 만났···”

로난이 말을 이으려는 차였다. 콰앙! 대기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응접실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시커멓고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앞으로 꺾인 발을 내디딜 때마다 피 섞인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로난을 안내했던 노인이 황급히 그를 뒤따르며 외쳤다.

“거, 검성이여! 안 됩니다!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춰 주십시오!”

“닥쳐라.”

그림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헛숨을 들이킨 노인이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굳은 것은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자이파.”

“···너는?”

자이파가 고개를 돌렸다. 로난과 마주친 그가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에 보는 자이파의 몰골은 결코 좋아 보인다 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온몸의 털이 쫄딱 젖어 있었다. 바지는 원래 붉은색이었나 싶을 정도로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아침에 듣기로 부대원들을 죽인 범인을 잡으러 갔다 했었는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탕! 로난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자이파가 꼬리로 바닥을 때렸다.

“로난.”

별안간 그가 로난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기세에 압도당한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저 높은 곳에서 붉은 눈동자가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라기에는 너무 살기등등했다. 딱히 캥기는 것이 없는 로난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그를 응시했다.

왜 갑자기 지랄이지? 문득 로난의 머릿속에 과거 자이파가 남긴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그는 네뷸라 클라지에를 직감으로 잡는다고 했다. 반짝이는 마나를 볼 수는 없었지만 느끼는 것이라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로난의 가슴 속에는 반짝이는 마나로 이루어진 심장이 맥박치고 있었다.

‘이거 좆된 건가?’

갑자기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칼이 없는 것이 낭패스러울 따름이었다. 자이파의 검지손가락은 거의 그의 손목만큼 두꺼웠다. 두 사람의 간격이 거의 좁혀지던 찰나였다.

“허허, 검성이여. 제 학생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별안간 바렌이 자이파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이파가 눈살을 찌푸렸다.

“비켜라. 동포.”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방해하는 거지. 우린 구면이다.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야.”

“살기부터 거두시지요. 몸이 아플 지경입니다.”

바렌이 정색했다. 자이파가 나지막이 으르렁거렸으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바렌의 암갈색 갈기가 뾰족하게 곤두서 있었다.

전체적인 덩치는 자이파가 더 컸지만 바렌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두 맹수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박감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이파의 시커먼 팔뚝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네놈···.”

그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끼이익···갑자기 반대편의 대문이 열리며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한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이 입을 열었다.

“다들 입장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준비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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