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알현(3) >
#151
“모두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인이 말했다. 조곤조곤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두 맹수의 기싸움에 얼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발을 뗐다.
“그렇다는군요. 검성이여.”
바렌이 자이파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성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바렌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물러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혀를 한번 찬 자이파가 로난을 내려보며 말했다.
“···나중에 보지.”
“뭘 생각하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그거 분명 오해일 걸.”
자이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꼬리를 거칠게 휘적인 그가 몸을 돌렸다. 알현실로 향하는 자이파의 바짓단에서는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저딴 몰골로 가는 거야?’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갈 때의 복장도 저것보다는 단정할 것 같았다. 바렌은 여전히 대치하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자이파가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바렌의 입에서 폐가 뽑혀 나올 듯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우···죽는 줄 알았습니다···!”
“뭐야, 쫄고 있었어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 눈동자는 정말이지···흐흐흑, 거의 기절할 뻔했습니다.”
바렌은 간발의 차로 목숨을 구한 사람처럼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동아리 활동 보고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로난이 픽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굉장히 당당하게 맞서던데요.”
“그야···학생을 지키는 건 교육자의 의무니까요. 해야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습니까.”
“멋졌어요. 고마워요.”
로난은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여러모로 인간보다 나은 사자였다. 심호흡으로 감정을 진정시킨 바렌이 말을 이었다.
“도대체 검성과 무슨 마찰이 있던 겁니까? 워낙 성미가 거친 분이라 듣기는 했지만 저건 보통 화가 나서는 나오지 않을 반응이던데요. ”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정말로.”
로난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막을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바렌은 의문스러운 듯이 침음을 흘리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오해가 부디 풀렸으면 좋겠군요.”
어느새 응접실에는 로난과 바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안내를 담당하는 여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서둘러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네. 죄송합니다.”
바렌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로난도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았다. 두 사람이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길고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붉은 융단이 대로처럼 깔려 있었다.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이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복도의 양쪽 벽면에는 화려한 액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모든 액자에는 정밀하게 묘사된 초상화가 끼워져 있었다. 연령대와 성별은 남녀노소 다양했지만 생김새에는 전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날카로운 콧대나 흑진주처럼 새카만 눈동자 같은 것들.
대부분의 면면은 필레온에서의 역사 수업 시간에 본 기억이 있었다. 로난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대 황제들인가 보네요.”
“네. 천년제국의 지배자들이죠.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 번도 핏줄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의 황제는 발론 44세였다. 제국의 존속 기간과 황제의 재위 기간을 고려해서 나누어 보았을 때 결코 많은 수는 아니었다.
“몇 분이 특출나게 장수하신 덕이지요. 가장 잘 알려진 유혈제만 해도 200년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으니···.”
복도를 걷는 내내 바렌은 역대 황제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나열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 만에 암살당한 이도 있었고,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통치한 유혈제 같은 작자도 있었다.
초상화는 알현실과 가까워질수록 과거의 인물이 나오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근엄한 표정을 짓는 초대 황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복도가 끝났다.
들어왔던 것과 똑같이 생긴 대문이 그들의 앞에 세워져 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금군(禁軍)들이 문을 열자 1 투기장에 버금갈 정도로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먼저 들어왔던 사람들이 문을 등진 채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가만히 양손을 모은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안 들어가고 뭐 해요?”
로난이 질문했으나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불현듯 헛숨을 들이킨 바렌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윽고 그 또한 고개를 숙였다. 왜들 염병하는 거지? 사람들을 우회한 로난의 시야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그들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이파?”
알현실의 중앙에서 자이파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붉은 안개가 그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전신의 털을 모조리 곤두세운 그의 입에서는 고통 섞인 신음이 나지막이 새나오고 있었다.
“크으으으···.”
웬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자이파의 앞에서 뒷짐을 선 채 서 있었다. 이제 막 중년으로 접어드는 나이대로 보였는데, 고생을 많이 했는지 머리의 절반 정도가 벌써 희긋하게 세어 있었다.
그는 발론 제국을 상징하는 진홍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세심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것이 여태껏 로난이 보아온 옷 중에서 가장 비싸 보였다.
문득 로난의 시선이 옥좌에 닿았다. 제국의 지배자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로난이 입술을 뒤틀었다. 사내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황제.’
발론 44세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격하게 치켜뜬 눈매는 7대 황제인 유혈제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이채가 새카만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황제의 옆에는 웬 여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운채 서 있었다. 두터운 입술과 어지간한 장정보다 거대한 체구가 인상적이었다. 근육으로 굴곡진 어깨는 로난과 견줄 수 있을 만큼 떡 벌어져 있었다.
갑옷이 온통 새카만 걸 보니 황제의 친위대인 금군 소속이었다. 그녀는 예리한 단창으로 자이파를 겨누고 있었다. 붉은 안개는 그 창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자이파를 내려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금군장. 출력을 올려라.”
“예.”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파를 뒤덮은 안개가 한층 짙어졌다. 으득. 그의 입 안쪽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크으으윽···!”
이를 지나치게 강하게 악문 모양이었다. 주둥이 아래로 피 몇 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황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이파. 짐이라고 자네에게 면박을 주고 싶지는 않았어. 애초에 오늘 자네를 황궁으로 부른 것도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였고.”
“오늘 새벽에 벌어진 일에 대해···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지. 참담한 비극이더군.”
아무래도 여명 부대가 학살당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자이파의 몸은 금방이라도 폭발하며 일대를 날려 버릴 것처럼 들썩이기 시작했다. 다물린 송곳니 사이로 노기 섞인 목소리가 새나왔다.
“그렇다면 어째서···이따위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겁니까···!”
“이따위 일이 아니야 자이파. 순서와 도리를 지키는 거지. 오늘 그대들을 갑작스레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야. 앞으로는 굉장히 바빠질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자네의 비통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별안간 황제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이파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게 짐에게 함부로 굴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해. 감히 피와 진흙이 묻은 발로 알현실을 밟다니···.”
“크으으···!”
“우리는 대등하지 않다는 걸 명심해라. 자이파.”
애완 고양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다시 자이파의 입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고통 때문이 아닌 듯했다. 황제는 자이파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물러가라. 오늘의 무례는 네가 겨우내 세웠던 공으로 무마해 주겠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새로운 명을 하달할 테니 대기하도록.”
황제가 손을 뗐다. 금군장이 검을 내림과 동시에 붉은 안개가 사라졌다.
자이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렌과 대치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살기가 그의 어깨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나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일말의 동요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말없이 그에게 묵례한 자이파가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로난을 비롯한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뭘 본거야 시발.’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그 자이파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황제와 피의 맹약을 맺었다지만 저 정도로 상하관계가 분명할 줄은 몰랐다. 자이파의 발자국을 보며 혀를 차던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군. 겨울의 영웅들에게 별로 좋지 못한 꼴을 보였어.”
황제가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이파의 기강을 잡던 아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부디 오늘 본 것은 비밀로 부쳐 다오. 짐과 검성의 체면을 봐서라도 말이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바렌이었다. 그는 양손을 모은 채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황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웠다.
“이거 오랜만이군, 바렌 공. 자네가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는 잘 들었어.”
“과찬이십니다.”
“고개를 들게. 먼저 짐부터 예를 갖춰야겠지···.”
그리 말한 황제가 금군장에게 손짓했다. 알현실을 나간 그녀는 머지않아 수십 명의 금군과 시종을 데리고 돌아왔다.
시종들은 자이파가 더럽힌 알현실을 순식간에 말끔하게 청소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금군들이 옥좌와 이어진 융단의 좌우로 도열하며 벽을 만들었다.
중구난방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건해졌다. 사람들은 옥좌를 마주보며 나란히 늘어섰다. 모두 아홉 명이었지만 워낙에 융단이 넓어서 공간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황제가 옥좌에 걸터앉았다. 근엄한 목소리가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만나서 반갑군. 현 제국의 황제, 발론44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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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인 인사는 금새 끝났다. 황제는 모인 이들의 공을 차례대로 치하하기 시작했다. 그가 콧수염이 멋지게 자란 사내를 내려보며 말했다.
“그래, 노들렌 경. 그대는 사병을 동원하여 제도 곳곳에 출몰하는 스노우 비스트 퇴치에 큰 공헌을 해 주었지. 그대를 네일스 백작에 임명하는 바일세.”
“가, 감사합니다. 폐하···!”
“부디 앞으로도 귀족의 책무를 다해 주기를 바라네.”
백작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걸로 아홉 명 중에서 일곱 명이 작위가 상승하거나 평민임에도 귀족이 되었다.
‘역시 황제라 그런가 통이 크군.’
지금껏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모든 면에서 격이 달랐다. 대수롭지 않은 듯이 하는 행동이 제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바렌에게 시선을 돌린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바렌 파나시르. 그대는 개인이 재배한 약초로 포션과 약을 만들어 고통받는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배부했지. 사실상 로난 공과 더불어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영웅이라 생각하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날이 갈수록 희귀해지고 있는 가치관이지. 이번에야말로 귀족이 되어 보지 않겠나? 자네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
“성은이 망극합니다만···저는 아직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좋습니다. 약초 재배가 안정화되는 대로 다시 교권에 복귀할 예정입니다.”
바렌이 말했다. 정중한 거절이었다. 황제가 아쉽다는 듯이 눈썹을 으쓱였다.
“흐음...그렇다면 약초를 재배할 땅과 인력을 지원해 주지. 브린힐스 평야의 3할을 자네의 사유지로 삼게나.”
“그, 그건···!”
“반박은 받지 않겠네. 재주껏 가꿔 보도록.”
황제가 그렇게까지 말한 이상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입을 벙긋거리던 바렌이 머리를 조아렸다.
로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브린힐스라면 제국령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비옥한 땅이었다.
씨를 뿌리기만 해도 대풍작을 거두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바렌의 약초 사업이 얼마나 번창할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시금 움직인 황제의 시선이 로난에게 닿았다.
“그래···그대가 소문의 주인공이군. 로난 공, 맞나?”
“예.”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분위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목석처럼 굳어 있던 금군장의 눈동자에도 흥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누구도 깨지 못한 얼음을 부쉈다고 들었네. 겨울의 마녀를 퇴치한 것도 사실상 자네고 말이지. 예상보다 어릴 거라고 로르혼에게 전해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어릴 줄은 몰랐군.”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그야 물론···여봐라, 금군장.”
별안간 황제가 금군장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엄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공신들을 연회장으로 인솔해라. 알현실에 나와 로난 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렌 또한 당황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큼성큼 걸어온 금군장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럼, 따라오십시오.”
“자, 잠깐···이게 무슨···.”
“대화는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알현실에는 정말로 로난과 황제만이 남게 되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텅 비어버린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로난의 머릿속은 황제가 귀족이 될 것을 제안할 경우 그걸 승낙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갖게 되는 것은 좋았지만 앞으로의 행동에 발이 묶일 수도 있었고, 고귀함에는 의무도 동반되었으니까.
정말정말 심도 깊은 고민을 한 끝에 드디어 결론이 나오려 했는데 전부 똥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자네에게 제안할 것이 하나 있네.”
“제안이요?”
“그래. 나는 그대가 제국의 여명이 되어 줬으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