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75화 (175/333)

175. 검의 제전(18)

#175

제전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참가자들은 충분한 휴식을 마친 뒤 오후부터 산을 타기 시작했다. 마지막 거점과 성지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고 알로긴은 설명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로난 일행을 포함하여 스무 명이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올라온 용사들이라 그런지 눈빛부터가 남달랐다. 그들을 둘러보던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걸러질 대로 걸러진 것 같군. 몇 놈은 우리보다 세 보이는데.”

“온 대륙에서 모인 인재들이니까.”

슐리펜이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대련을 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저마다의 위치에서 검성으로 추대받던 자들일 터였다. 불현듯 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로난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맞다. 너 머리는 괜찮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웃기는 놈일세 이거. 어제 그 주접을 떨어 놓고 시치미를 떼?”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실소했다. 한 모금만으로 만취한 슐리펜은 그가 잠자리에 든 이후로도 이릴을 예찬했다. 눈이 풀린 채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미치광이였다. 덕분에 러셀과 라일리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찝찝함을 덜어낼 수 있기는 했지만.

“뭐라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 하긴 그러니까 아침에 목을 안 메달고 살아 있는 거겠지.”

“전부 기억난다. 그리고 나는 사실을 나열한 걸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미친놈.”

“다만 술의 힘을 빌려야 정직해질 수 있다는 점은 안타깝군. 내게는 용기가 부족하다.”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는 것이 사실 진짜 위험한 것은 폭류검이 아니라 이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올랐다. 린은 나비로제의 손을 잡은 채 서른 걸음 정도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로난과 슐리펜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그녀가 고민스레 혼잣말했다.

“으음. 고민되네.”

“뭐가 말이냐.”

“어느 쪽 엉덩이가 더 나을 것 같아? 저 두 사람의 선생님이면 잘 알 거 아냐.”

“···음?”

나비로제는 분명 바람 소리 탓에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라 확신했다. 제자들의 엉덩이가 어떤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러나 한 번 더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얼굴은 사납게 생긴 쪽이 좀 더 취향인데, 뒤쪽은 비등비등하단 말이지. 저쪽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매력이라면 도련님 쪽은···”

별안간 린이 두 제자의 둔부를 품평하기 시작했다. 표정이 세상 진지한 것이 암소를 고르는 축산업자도 이 정도의 열정은 없을 것 같았다. 영양가라고는 없는 소리였지만 듣다 보니 은근히 흥미가 생기는 것이 두려웠다. 힘겹게 호기심을 절제해낸 나비로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 그런 거.”

“오늘까지는 정해야 하는데 큰일이야. 그냥 너로 해버릴까.”

린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비로제의 흉부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다시 침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굉장히 고민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있지. 나비로제.”

“왜 그러나.”

“나. 진짜로 너희 아카데미 가도 돼?”

나비로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로난에게 입학을 권유받았다고 싱글벙글하며 자랑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가 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재능 있는 이들에게 필레온은 언제나 열려 있다.”

“고마워. 그러면 정말로 가야겠다.”

“하지만 거기서 로난을 추행하는 건 좀 자제해야 할 거다.”

나비로제가 큭큭거렸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안 본지도 제법 되었다. 따돌림을 당하다가 학생회장까지 치고 올라간 아이니까 분명 잘 하고 있겠지마는. 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강력한 연적이 있거든. 소심한 것이 흠이기는 하다만.”

“아, 그런 거라면 괜찮아. 내가 더 예쁠 테니까.”

린이 풍성한 백발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나비로제가 헛웃음을 쳤다. 쬐깐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몸짓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던 알로긴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생 많았네. 여기가 파르잔의 정상일세.”

바로 뒤를 따르던 로난과 슐리펜도 덩달아서 정지했다. 더는 올라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생전 본 적 없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쭉 둘러보던 로난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분화구?”

숟가락으로 퍼낸 듯이 음푹 들어가 있는 지형은 한때 파르잔이 불을 토해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지름이 족히 3km는 되어 보이는 분화구는 온통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기울어 가는 태양이 뿌리는 햇살이 만년설에 반사되는 광경은 꼭 성지가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착시를 주고 있었다. 알로긴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긍정했다.

“그래. 빛이 고이는 웅덩이지. 여기 어딘가에 성검이 잠들어 있다네.”

“빛이 고이는 웅덩이라···.”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잘 지은 별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화구의 외곽에는 장로들이 기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제법 고풍스러운 것이 필레온의 별관 하나를 똑 떼서 가져온 느낌이었다. 알로긴은 그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짐을 내려놓음과 더불어 짧은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건물은 생각보다 넓지는 않았다. 천장이 높고 거대한 기둥이 여러 개 세워져 있는 것이 여러모로 신전을 연상케 하는 구조였다.

원로 대부분이 자글자글한 노친네라 수발을 드는 사람이 잔뜩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기들끼리 자급자족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참가자들에게는 휴식과 함께 몸을 씻을 시간이 주어졌다. 내부를 돌아다니던 원로들이 그들에게 검례를 보냈다.

“어서 오시게. 최후의 시련마저 통과한 검사들이여. 기다리고 있었다네.”

“아, 네. 안녕하세요.”

로난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늙은 것과 별개로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신성한 의식을 앞둬서인지 원로들은 모두 같은 제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때 웬 덩치 좋은 노파 하나가 로난의 앞에 멈춰섰다.

“아하, 자네가 그 44번 참가자군. 우리 원로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네.”

“좋은 쪽이죠?”

“아하하. 나는 너를 아주 좋아한단다. 그거면 된 거 아니겠느냐.”

노파는 걸걸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체격도 건장하고 웃음소리도 호쾌한 것이 북방의 전사를 연상케 하는 늙은이였다. 자신을 은검의 주인이라 소개한 그녀가 로난의 어깨를 퍽퍽 두드리며 말했다.

“이 중에 누구든 성검을 찾으면 좋겠구나. 정말로, 이제는 나타날 때가 되었어.”

“꼭 예전에 누가 찾았던 것처럼 말하네요. 단순한 전설 아니었어요?”

“성검은 실존한단다. 세간에서는 전설이나 동화로 치부되고 있지만 우리 원로들은 그것이 엄연한 역사라는 걸 알고 있어. 그리고 첫 번째 성검의 주인은 너도 익히 아는 사람이란다.”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요?”

영문 모를 소리에 로난이 갸웃거렸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노파가 입을 열었다.

“일개 인간이 마룡 오르세를 어떻게 패퇴시켰을지 의문을 품어본 적 있느냐?”

“오르세면···설마 초대 제국의 황제?”

로난의 눈이 커졌다.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초대 황제가 블랙 드래곤 오르세를 꺾을 수 있던 것이 성검 덕이었다니. 이야기의 도입부를 읊던 노파가 말을 끊었다.

“후후. 자세한 이야기는 의식이 끝나면 더 말해주마.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니? 뭘 좀 먹어야지.”

“괜찮아요. 이미 먹고 와서.”

“아냐. 이렇게 말라서는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없단다. 요즘 애들은 참, 일부러 살을 빼기라도 하는 건지.”

노파가 혀를 쯧쯧 찼다. 말랐다니. 이릴을 제외한 사람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물론 진짜 마른 것은 아니고 그녀 개인만의 기준일 터였다. 족히 일흔은 되어 보이는 노파의 팔 두께는 로난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외쳤다.

“얘야! 다르만!”

“엉?”

익숙한 이름에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머지않아 건물 저편에서 웬 소년 한 명이 달려왔다. 발이 얼마나 빠른지 잔상이 보일 지경이었다. 그가 노파의 앞에 멈춰섰다.

“마담 올가, 부르셨어요?”

“그래. 이 아이를 식당으로 안내해 주면 고맙겠구나. 다른 배고픈 참가자들도.”

“그렇게 할게요. 내일 산 아래로 내려갈 것 같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오냐. 착하기도 하지. 나는 의식을 준비해야 하니 이만 가 보마.”

소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노파가 몸을 돌렸다. 로난은 벙찐 채 낯익은 소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유약한 인상. 회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역시 자신이 아는 놈이 맞았다. 자이파의 검을 운반하던 칼 배달부였다.

“···다르만?”

“어엇?! 로난 님?”

뒤늦게 로난의 존재를 알아차린 다르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반응이었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자이파한테 준다는 칼은?”

“아하하···그게 이야기가 좀 복잡한데요.”

다르만이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기묘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파르잔까지는 어찌어찌 도착했으나 며칠을 돌아다녀 봐도 자이파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가져온 식량도 돈도 다 떨어져서 거점과 성지를 오가는 잡부 역에 지원했다.

원래대로라면 자이파를 만날 때까지만 할 생각이었으나 그는 제전이 마치는 날까지 자이파를 찾지 못했다. 헌데 일이 의외로 적성에 맞았고, 사람들도 똑 부러진 그를 마음에 들어 해서 생각보다 오래 일을 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야기를 마친 다르만이 제자리에서 방정맞게 뛰어 보였다.

“제가 발이 좀 빠르거든요. 주문한 물자가 빨리 오니까 다들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 좆나게 빠르기는 하더라. 뭔가 꼬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된 거 같아 다행이네.”

“히히, 그날 구해 주신 덕이죠. 자이파 님은 오늘도 안 오셨나요?”

“아, 금방 올 거야. 의식에는 참여한다고 했으니까.”

로난은 그 호랑이가 사람 만나는 게 귀찮아서 따로 마련한 거처에서 머문다고 말해 주었다. 다르만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아, 안 보이던 이유가 있었군요. 어쩐지···.”

“그래. 오늘 전해주면 돼.”

“으윽···그래야겠어요. 일단 식당으로 가실래요?”

“그럴까. 이것도 기념이니까.”

로난은 다르만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방금의 노파가 직접 요리했다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개좆 같은 맛을 자랑했다.

"시발. 도대체 물고기 대가리가 파이에 왜 꽂혀 있는 건데. 그 할망구, 치매 걸린 거 아냐?"

"하하...마담 올가의 요리가 조금 특이하긴 하죠."

온갖 저주를 퍼붓던 로난은 다르만이 임기응변식으로 만든 달걀 요리를 먹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 여기까지 오는 도중 벌어진 이야기를 다르만에게 해 주었다.

“포, 폭류검 크로덴? 그 사람이 왔었다고요?!”

“그래. 자이파가 단번에 반으로 쪼개버렸지.”

“그럴 수가···.”

다르만은 표정을 다양하게 일그러트리며 로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반응이 대체적으로 격하고 다채로워 이야기해줄 맛이 났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의식을 시작해야 하니 나와 달라는 공지가 전달되었다. 다르만이 로난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꼭 성검을 찾으시길 바래요.”

“오냐. 자이파더러 한번 여기 들르라고 말해 볼 테니까 너도 준비해 놔.”

로난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르만을 제외한 모두가 건물을 나섰다. 덩그러니 비어 있는 건물 속에서 경쾌한 콧노래가 울려 퍼졌다.

****

의식은 성지의 한복판에서 진행되었다. 분화구의 안쪽은 모두 성지로 간주되어 원로나 검성, 최종 시험을 통과한 참가자들을 제외하고는 밟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사람들은 별빛이 고인다는 성지의 중앙에서 열을 맞춰 도열했다. 일곱 원로들이 원형으로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원로들은 모두 저마다의 무기를 빼든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소용돌이치며 모여드는 마나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새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자이파도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손을 닿으면 잡힐 것처럼 가까워진 하늘에는 석양의 적색이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로난이 혼잣말치고는 조금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의식이라는 거, 도대체 뭘까?”

“그렇게 해도 안 알려줄 거다.”

나비로제가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녀는 아직 로난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꽤 오래 입은 거라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잘 입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로난이 말했다.

“에이, 치사하게 굴지 말고 알려줘요.”

“그럴 수 없다. 감격이 반감되니까.”

“감격까지 할 정도에요?”

“처음 경험하는 자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생전 본 적 없는 광경일 테니까.”

나비로제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저 정도로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뭐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늘에서 곧바로 배어 나온 듯한 찬바람이 고고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불현듯 알로긴이 검을 치켜들었다.

“의식을, 시작하겠소.”

롱소드의 검신을 타고 푸른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다른 원로들도 함께 무기를 쳐들었다. 그들은 참가자들이 미처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저마다의 무기를 바닥에 꽂아 넣었다. 파아아아-! 세찬 빛무리가 성지를 휘감듯이 퍼져 나갔다.

“시발, 갑자기 무슨···!”

로난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빛이었다. 다른 참가자들 또한 별반 다를 것 없는 반응을 보였다. 얼굴을 덮은 손바닥마저 뚫고 들어오는 빛무리 속에서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제···마지···이네.”

다만 바람 소리가 거세서 뭐라 말하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실눈을 떠서 돌아본 그녀는 태연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삼 분 정도가 지났을까, 마침내 빛이 사그라들었다. 주변의 마나가 진정된 것을 확인한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그리고 그대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비로제의 말마따나 생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오직 새하얀 눈만이 쌓여 있던 분화구는 꽃이 만발한 화단으로 변해 있었다.

다만 그 꽃은 사람들의 익히 아는 식물의 기관이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병장기가 머리를 땅에 박아넣은 채 거꾸로 솟아나 있었다. 해를 받아 서늘한 빛을 뿌리는 날붙이들의 모습은 마치 강철로 만든 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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