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76화 (176/333)

176. 검의 제전(19)

#176

강철의 정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서 자라난 병장기들이 서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불규칙한 간격으로 분화구 전체를 메운 것이 족히 수만 자루는 될 것 같았다.

나비로제의 말대로였다. 경험이 없는 참가자들이 당황을 금치 못한 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다 뭐야? 여기서 성검을 찾으라는 거야?”

“마법···인가.”

“유령에게 홀린 것 같군. 그나저나 이 무기들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소?”

당황한 것은 로난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번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이런 풍경은 본 적이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알로긴에게 물었다.

“무슨 요술을 부린 거에요?”

“으음···잠깐만 기다리게. 어째 매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군.”

알로긴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하게 묻어나 있었다. 다른 원로들과 자이파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삼 일 정도를 재우지 않은 몰골로 변해 있는 것이 썩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숨을 고르던 알로긴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검령을 모두 불러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 일곱 명씩이나 되는 원로들이 밥을 축내면서 성지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일세.”

“검령?”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다만 어감으로 추측해 보건데, 가끔씩 풍문을 통해 존재한다 전해지던 귀신 들린 무기와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날아와서 적의 목을 찌른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알로긴이 대답했다.

“그래. 쉽게 말하자면 검령이란 무기에 깃든 영혼일세.”

“그···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말하는 무기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아, 에고 웨폰을 말하는 거군. 그렇다네. 검령이 극도로 강해지면 그런 기물이 탄생하지. 자네가 보고 있는 것 또한 파르잔에 바쳐진 무기들의 검령이 실체화된 걸세. 금속으로 된 육체를 잃었음에도 세상을 떠나지 못한 채 꿈을 꾸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지.”

유령이라는 말을 들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로긴은 눈앞에 솟아 있는 날붙이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라 설명했다. 어쩐지 으스스한 것이 바람이 한층 더 차게 느껴졌다.

“···원리가 뭐죠? 솔직히 좀 기분 나쁜데.”

“정확하게는 알려지지 않았다네. 다만 우리 원로들은 주인의 애착과 유대에서 기인한 현상이라 추측하고 있지.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경험해 보는 게 빠를 걸세. 한 번 잡아보겠나?”

알로긴이 로난의 앞에 솟아나 있는 롱소드를 가리켰다. 로난은 미심쩍어 하는 표정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

그 순간 머릿속에 정전기가 튀기는 듯한 감각과 함께 어떤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전장을 내달리는 사내, 적군의 갑옷을 파고드는 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 철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생애를 나열해놓은 것 같은 영상이었다.

“빌어먹을, 뭐야?”

화들짝 놀란 로난이 검을 뿌리쳤다. 영상이 끊어짐과 동시에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실제로는 몇 초에 불과했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생에 경험해본 주마등과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스아아···위태롭게 흔들리던 검이 쓰러지며 기체의 형태로 화하여 사라졌다. 알로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게 바로 검령이자 무기들이 꾸고 있는 꿈일세. 주인과 함께 피를 마시던 나날을 추억하는 거지.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군.”

“잠깐만. 그러면 의식이라는 건···.”

“자네가 예상하는 게 맞다네.”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알로긴을 비롯한 원로들이 일제히 무기를 내렸다. 알로긴이 참가자들을 돌아보며 공지했다.

“그대들은 이곳 성지를 돌아다니면서 성검으로 추정되는 무기를 뽑으면 된다네. 성검이 아니라면 곧바로 연기가 되어 사라질 테니 헷갈릴 염려는 없을 걸세.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시도해도 상관없지만, 손을 댈 때마다 검의 기억이 밀려 들어올 테니 최대한 신중하게 고르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게야.”

알로긴은 의식이 오늘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하늘의 색으로 미루어 보니 대략 두세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또한 그는 무기를 고를 때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했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기억이 밀려들어오는게 뽑는 횟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한번 쥐어 보면 바로 알 걸세. 하나의 역사를 감당한다는 것은 의외로 굉장한 피로감을 동반하는 일이거든. 무리해서 손을 대다가 본인의 자아가 망가진 참가자도 여럿 있었으니 부디 신중하시게나.”

과연 로난은 가볍게 밖을 뛰고 온듯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곧바로 손을 떼서 망정이지 완전히 뽑힐 때까지 쥐고 있었으면 괜한 고생을 할 뻔했다.

이어서 알로긴은 이 중에 한 자루는 반드시 성검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로난은 참가자들을 그토록 까다롭게 걸러 내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의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접신이었다. 몸과 정신이 어지간히 단련된 자가 아니라면 순식간에 미쳐 버리거나 폐인이 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최종 시험까지 통과해서 풀어져 있던 참가자들의 얼굴이 굳어 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네. 부디 누군가 잠들어 있는 성검을 깨워주기를.”

알로긴이 말했다. 저마다의 각오를 다진 참가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원로들과 검성 또한 의식에 참여했기에, 성지에는 모두 스물여덟 명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머지않아 곳곳에서 경악 어린 탄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젠장! 더는 못 해먹겠군.”

갑옷을 입은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드러누웠다. 그는 끝내 자신의 눈앞에 박혀 있는 장창을 뽑아내지 못했다. 몸이 추를 단 듯이 무거워진 것은 둘째 치더라도, 머릿속을 어지럽게 휘젓는 날붙이들의 기억이 도저히 시도할 엄두를 안 나게 했다. 환상을 볼 때마다 자아가 흐릿해지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성창 기사단의 부단장이군···당신은 몇 자루 뽑았소?”

그때 터덜거리며 다가온 다른 참가자가 사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그늘이 짙게 내려온 것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듯했다.

“일곱 자루. 이제 한계요.”

“많이도 뽑았군···나는 겨우 다섯 자루인데.”

“빌어먹을, 성검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소. 전부 짜고 치는 사기극 아니오?”

“나도 잠깐 그 생각을 했지. 헌데 그렇다기에는···저 자들이 너무 열심히 하고 있더군.”

눈그늘 짙은 참가자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누워 있던 사내가 머리만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입은 원로들이 날붙이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삼 분에 하나 꼴로 무기를 뽑고 있었다. 꼭 무를 수확하는 농부들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형체가 분해되며 피어난 연기가 바람에 뒤섞여 사라지고 있었다. 다시 드러누운 사내가 질렸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괴물들이군.”

“그러니까 원로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거 아니겠소. 저들 말고도 유달리 잘 뽑는 이들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우리는 수행이 부족한 것 같소. 제국의 샛별이나 만사의 주인께서도 벌써 두 자릿수를 뽑으셨더군.”

“하, 지당한 말씀이오···그러고 보니 그 청년은 어떻게 됐소?”

사내가 누운 채로 질문했다. 의식이 시작된 이후로 통 보이지가 않았다.

“누구 말이오?”

“왜, 폭류검의 기술을 막아낸 친구 있잖소. 같이 술도 마셨었는데···오늘따라 안 보이는군.”

“······그러게 말이오?”

두 사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틀림없이 가장 유력한 참가자들 중 한 명이었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려 봐도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난은 의식이 시작된 지 삽십 분 만에 성검을 찾는 것을 때려치우고 분화구의 서쪽 외곽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으니까. 한결 붉어진 햇빛이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성지를 등진 채 산 아래의 경치를 감상하던 그가 툭 읊조렸다.

“죽이는군.”

대륙의 서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울퉁불퉁한 지평선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시야가 닿는 곳에는 더 높은 산이 없었기에 세상의 지붕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고향 님버튼과 제도를 가로지르는 로마이라 산맥이 보였다.

운 좋게 올라가는 비탈길을 발견한 덕에 올라올 수 있었다. 성지에 포함되는지가 모호한 위치인지라 로난은 라만차를 자신의 오른쪽에 꽂아 두고 있었다.

혹시나 원로들이 거기서 뭐 하냐고 트집을 잡았을 때 핑계를 대기 위한 용도였다. 기지개를 쭉쭉 뻗은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성검은 지랄.”

“여기서 뭐 해?”

“허억···!”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해서 정말로 놀랐다.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린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린이 풍성한 백발을 흩날리며 서 있었다.

“에이씨, 놀랐잖아.”

“너는 성검 안 찾아?"

린이 갸웃거렸다. 특유의 무표정과 건조한 말투가 은근히 열받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로난이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신경 꺼.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모습을 드러냈겠지.”

“태도가 불량하네. 출세해도 신사 소리는 못 듣겠어.”

“듣고 싶은 마음도 없수다.”

로난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애초에 성검을 찾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시간이나 떼우다 돌아갈 심산이었다. 그런 로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연스레 로난의 무릎 위에 걸터 앉았다.

“내 어이가 없어서.”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이건 또 뜻밖의 전개였다. 로난은 시선을 내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가슴팍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는 그녀를 내려보았다.

“댁도 레이디 치고는 품행이 영 방정맞은데.”

“삶의 의미는 하고 싶은 걸 하는 데 있어.”

“그렇군. 무거우니까 내려가 인마.”

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로난은 그대로 린의 뒷덜미를 잡아서 자신의 옆에 내려놓았다. 물론 전혀 무겁지는 않았지만 늘 피를 문질러 닦는 바지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토라진 듯이 혀를 살짝 빼물었다.

“치사하긴.”

“시끄러워. 너도 성검이나 찾을 것이지 여긴 왜 왔어?”

“내 마음이야.”

로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린은 한 자루도 손대지 않았다고 말했고, 로난은 그건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석양을 감상했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창백한 보름달과 대조되어 몽환적인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양털을 찢어서 뿌린 것 같은 구름들은 가을날의 단풍처럼 무르익어 있었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린이 입을 열었다.

“노을을 좋아하나 봐.”

“음···아마도. 원래는 싫어했는데, 지금은 나쁘지 않아.”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서 노을이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었으니. 린이 질문했다.

“왜?”

“그냥, 아는 사람이 한번 색다른 설명을 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거든. 죽어가는 해의 마지막 투쟁이라고 했었나.”

“투쟁? 신기하네.”

“그치. 석양이 붉게 타오르는 것은 살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있는 거랬어. 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 장작을 찾는 것처럼.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 설명이 마음에 들더라고.”

사계의 언덕에서 아데샨과 나눈 대화였다. 전생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늦여름 청춘의 기억이었다. 그게 벌써 2년이나 지난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로난은 당시에 있었던 일을 즐겁게 설명했다. 미묘하게 다정해진 눈빛을 본 린이 콧소리를 흘렸다.

“흐응. 나비로제가 말한 게 그 사람이구나. 쉽지 않겠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됐어. 아무나 꼬시고 다니는 놈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지. 그것보다 나 궁금한 거 있어. 아주아주 중요한 질문이야.”

별안간 고개를 돌린 그녀가 로난을 마주 보았다. 머리카락처럼 백색을 띠는 눈동자는 맑은 것을 넘어서 투명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늘 생각했지만 참 신비한 인상을 주는 소녀였다. 그나저나 ‘아주’가 두 번이나 들어갈 정도라니, 도대체 뭘 물어보려는 걸까. 린이 말을 이었다.

“성검. 너가 가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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