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79화 (179/333)

179. 오러(1)

#179

“으윽···.”

로난은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웠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 봐도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는 잠시 자신이 장님이 된 것이 아닌가 착각했다.

오해를 풀어준 것은 어둠 곳곳을 가로지르고 있는 가늘고 붉은 빛줄기였다. 로난은 머지않아 그것이 바위 틈새로 스며드는 석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추락한 건가.’

다르만의 발차기에 맞은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코 뒤쪽에 피가 고여서인지 냄새는 나지 않았다. 숨을 한번 들이 내쉴 때마다 침과 피, 위액이 적당하게 섞인 액체가 턱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 지금 누워 있구나.

“···씨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둠에 적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사방을 뒤덮고 있는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돌무덤에 산 채로 갇히면 이런 기분일까. 마차에 밟힌 생쥐 꼴이 되지 않은 걸 보니 운이 좋게도 몇몇 바위가 지지대 역할을 하며 공간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크으윽···.”

불현듯 온 몸을 걸레처럼 쥐어짜 내는듯한 통증이 로난을 덮쳤다. 조각난 뼛조각이 내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위험했다. 누운 채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지랄 났네···.”

안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그의 손에는 베인 상처만이 남아 있었다. 상비용으로 들고 다니는 바렌의 특제 포션은 완전히 박살나서 유리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는 조예가 있는 로난이었지만 이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힘들어. 먼저 회복해야 해.’

빠르게 판단을 내린 로난이 눈을 감았다. 뭐라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금이라도 몸의 상태를 호전시켜야 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심장에 모여 있던 마나를 전신으로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언젠가 필레온에서 배운 적이 있던 응급 치료법이었다.

‘좆됐군. 한시가 급한데.’

로난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현 상황에서는 최선의 판단이었지만, 자가 수복은 시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중상을 낫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치유력도 모자랐다. 더군다나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탓에 집중도 잘 되지 않았다.

“린···.”

린의 희생을 떠올린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녀는 로난을 대신하여 칼에 찔렸다. 바닥을 뒹굴며 신음하던 린의 몸은 지나칠 정도로 가녀렸다.

복수를 위해서라도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르만과 싸우던 순간이 뭉게뭉게 떠오르며 집중을 방해했다.

명백한 패배였다. 로난은 스스로를 형제라 주장하는 그 개자식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엿 같은 가족 문제 때문에 싸움에 통 집중하지 못했다는 점을 참작해야 했지만.

‘강하고 지능적이었지. 가장 엿 같은 부류야.’

아직도 자이파가 칼을 맞던 장면이 눈에 선했다. 공중으로 솟구치던 원로들의 머리도. 다르만은 그들이 의식 때문에 힘이 빠지는 순간을 노렸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보통 실력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저런 놈이 갑자기 어디서 불거진 건지가 의문이었다. 그날 심상 세계에서 본 작자들을 제외하고도 저런 강자가 있을 줄이야. 별안간 다르만이 전투 도중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 일이 정리되면 한 번 더 권유하마. 뤼코포스에 들어와라.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시에는 개소리 말고 내 좆이나 핥으라며 검격으로 응수했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단어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던 끝에 마침내 단어의 출처를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분명히 그때 사막에서···.’

위치는 다인하르의 심장부. 발언자는 주교 테라닐이었다. 로난에게 큰 부상을 입은 그는 뤼코포스가 네놈을 추격할 것이라며 협박 조로 말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랬던가. 유추하건데 암살자나 네뷸라 클라지에에서 가장 강한 전사들이 모이는 특수 조직 같았다. 문득 로난은 다르만의 검에 베인 상처가 학살당한 여명 부대원들의 시체에 남아 있던 것과 같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새끼도 공범이었군”

그제서야 그 많은 정예군이 무력하게 쓸려 나간 것이 납득이 갔다. 폭류검과 더불어 저런 놈이 나타났으니 그들로서는 불가항력이었을 터였다. 몸이 최소한으로 회복된 것을 확인한 로난이 상체를 일으켰다.

“끄으윽···!”

밀려오는 격통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움직일 때마다 몸 곳곳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간신히 앉는 것에 성공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썅···이건 너무 날카롭잖아.”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이 정도의 암석은 베어서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오른손에 칼자루가 쥐어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지랄을 떨면서 추락한 와중에도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선을 내린 로난의 얼굴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개씨발.”

라만차가 파괴되어 있었다. 뜯기듯이 부서진 검신은 절반 정도가 소실되어 있었다.

로난은 그제야 다르만의 발차기를 자신이 라만차의 칼배로 막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서둘러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먹여 봤지만, 균열이 붙으며 예기가 살아날 뿐 없어진 부분이 다시 자라나지는 않았다.

‘이걸 또 언제 찾냐.’

이건 정말 너무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을 찾아서 접합하면 착 달라 붙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짧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린 로난이 코어를 전환했다. 반짝이는 마나가 그의 어깨 위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한번 뒈져 보자.”

테라닐의 오러인 충격파를 발동하면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산사태가 일어나거나 높게 솟구친 바위가 머리 위로 떨어지면 그대로 저승 직행 마차를 타게 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하나하나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막 오러를 발현하려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모해.”

“······!”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로난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린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린?”

린이 회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풍성한 백발이 바닥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많이 다쳤네. 아프겠···”

린이 무덤덤하게 위로를 건네려던 차였다. 팔을 뻗은 로난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몸의 통증 따위는 한순간에 잊혀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벙쪄 있던 린이 피식 웃었다.

“과감하네. 조금만 더 빨리 해주지.”

“너, 괜찮냐?”

몸을 떼어낸 로난이 린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아무리 뜯어 살펴 봐도 린이 맞았다. 분명히 그때 죽은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들은 린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럴리가. 이 꼴이 괜찮아 보여?”

그녀가 검지를 뻗어 로난의 이마를 꾹꾹 찔렀다. 로난은 그제야 린의 가슴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다르만의 검에 꿰뚫린 자리에는 휑한 바람구멍이 뚫려 있었다. 건너편이 훤히 보이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극심한 중상이었다. 상처와 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기껏 구성한 육신인데 안타깝게 됐지. 그래도 후회는 없어.”

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문 모를 소리를 들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데없이 육신이라니? 툴툴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 내 질문에 아직 대답 안했어.”

“질문?”

“응. 가지고 싶냐고 물어봤었잖아.”

그때 로난은 린의 몸이 살짝 투명한 것을 알아챘다. 머리카락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꼭 정령을 보는 것 같았다.

찰나 다르만이 깽판을 치기 직전에 린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성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지. 당시에 세웠던 가설을 기억해낸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너···.”

“시간 없어. 직접 보고 판단해.”

갑자기 린이 악수하듯 손을 내밀었다.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고사리 같은 손을 맞잡았다. 찰나 환상이 파도처럼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성지에 소환된 검령을 쥐었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무슨···!’

황야의 한복판에서 검은 용이 포효하고 있었다. 시타처럼 두 쌍을 이루는 날개는 시야를 전부  뒤덮을 만큼 거대했다. 백조처럼 구부러진 목은 제국의 성벽보다 드높았다.

용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림이나 동화책으로만 봤지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로난은 저도 모르게 그 사악한 피조물의 이름을 읊조렸다.

“오르세.”

천 년이 넘도록 대륙 중앙에서 군림해온 마룡이었다. 그런 오르세를 향해 셀 수 없이 많은 병사가 돌진하고 있었다. 새하얀 검을 치켜든 사내가 말에 탄 채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군대 중간중간에 솟아난 깃발에는 발론 제국의 상징인 매가 그려져 있었다.

용이 네 장의 날개를 펼치며 토해낸 불이 그들을 향해 쏘아졌다. 최소 수천 명이 잿더미로 변해버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화염의 급류가 병사들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선두를 달리던 사내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불이 장작이라도 된 것처럼 양옆으로 쪼개지며 오르세와 이어진 길이 나타났다. 마룡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필멸자가 감히 내게 도전하는가!】

“이야아아아아!”

사내는 대답하는 대신 거친 함성을 내질렀다. 오르세가 다시 불을 뿜었지만 새하얀 검은 그마저도 잘라 버렸다. 불현듯 사내의 얼굴을 본 로난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용과 맞서는 청년은 자신이 얼마 전에 알현했던 발론44세와 매우 닮아 있었다.

“저 사람은···!”

“맞아. 발론이야.”

어디선가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르세와 발론이 격돌하는 순간 장소가 변했다. 그도 익히 아는 파르잔의 성지였다. 별이 흘러넘칠 정도로 찬란한 밤하늘 아래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온통 새하얀 검은 발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발론에게 실망해서 도망친 곳이었지.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생각해.”

린의 말과 함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해와 달이 수천 번씩 떴다가 가라앉는 것을 반복했다. 어느샌가 빛이 고이는 분화구의 외곽에는 원로들이 기거하는 건물이 세워졌다. 주인을 추억하는 검의 영혼들이 하얀 검의 곁에 하나둘씩 자라났다.

그렇게 몇 번이나 계절이 바뀌었을까. 갑자기 하얀 검의 모습이 일렁이더니 웬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새하얗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검신의 색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주변에서 아무 검이나 뽑아 등에 멘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익히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난데없이 쪼그려 앉은 그녀가 로난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둑.”

“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주변의 풍경은 어느새 낯익은 마을로 변해 있었다. 그란 파르잔의 한복판에 선 로난의 손에는 화려한 단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그가 린을 마주보며 말했다.

“···네가 성검이구나.”

“응. 아쉽게 됐어. 네가 말한 아카데미라는 곳, 다녀보고 싶었는데.”

“이제 못 가?”

“그건 아니지만 인간의 몸으로 즐겨보고 싶었어. 직접 먹고 마시고 만지면서.”

“불순한 꼬맹일세.”

로난이 피식 웃었다. 린은 자신은 꼬맹이가 아닌 레이디라며 또박또박 따졌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몸은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성검. 내가 가질게. 가진다는 표현은 마음에 안 드니까 같이 가는 걸로 하자.”

“탁월한 선택이야.”

“시발, 이제 좀 희망이 생겼네. 나도 그럼 발론만큼 강해지는 거냐?”

“그건 네 잠재력에 달린 거라 장담 못 해. 밑천이 남지 않았다면 별다른 변화는 없을지도.”

린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용자의 잠재력을 꺼내 주는 것이라 설명했다. 로난을 위아래로 훑어본 그녀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리고 네 몸 상태는 지금 매우 좋지 않아. 충분한 휴식과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야. 잠들어 있는 힘을 섣불리 깨웠다가는 잘못될 수도 있어.”

“그건 신경 쓰지 마. 괜찮으니까.”

“너는 참 신기해.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똘망한 눈동자는 너 같은 놈은 생전 처음 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입안에 고여 있는 피를 뱉어낸 로난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왜 안 그러겠냐. 좆나게 무섭지.”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아까도 다르만이라는 아이가 너보다 강한 걸 알고 있었잖아.”

“별 거 없어.”

로난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짓말이 아니라 지금은 아셀이랑 육탄전을 벌여도 질 것 같았다. 린의 말마따나 그는 다르만에게 질 걸 알면서도 덤벼들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심호흡한 로난이 말을 이었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한 거지.”

“흐응.”

린이 웃었다. 제법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점점 흐릿해지던 그녀의 몸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윽···!”

로난이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빛은 머지않아 가라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로난은 몸이 더는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신을 뒤덮은 상처도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린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이건···.”

라만차가 완전히 복구되어 있었다. 다만 부러져서 소실된 자리를 채운 검신은 린의 머리카락처럼 찬란한 백색을 띠고 있었다. 꼭 그림자 속에서 빛이 자라난 듯한 모습이었다. 침묵하던 로난의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로난은 묵묵히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팔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심장이 아하유테를 상대하던 그날과 같은 속도로 맥박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뒤덮고 있던 바위 틈새로 찬란한 빛무리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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