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93화 (193/333)

193. 하늘이 얇아지는 곳(4)

#193

“뭔, 씨발···!”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다물린 이빨 사이로 비명이 새나왔다. 불의 어머니 앞에서도 욕설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맹렬한 통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버텨야 한다.”

나바르도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그녀가 힘을 주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터라 일어날 수도 없었다. 손톱이 파고든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로난은 거칠게 숨을 들이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전체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강력한 마나의 대류 현상이 그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줄곧 로난의 심장을 응시하던 나바르도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저주군. 자식의 몸에 이런 걸 심을 생각을 한 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여태껏 버텨온 너도 만만치 않구나.”

“이게···정확히 뭐 하는 저주인데요?”

“뭐야, 내 말이 들리는 게냐? 고통이 극심할 텐데.”

“또 지나고 보니···버틸 만도 한 것···같아서.”

로난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바르도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염 마법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녀는 지금의 해주가 로난에게 얼마나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는지 알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용암으로 변한 느낌일 텐데, 기절하기는커녕 대화를 청한다라. 피식 웃은 그녀가 반대편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견한 아이구나.”

“크흐흐···누나한테 받을 때와는···또 느낌이···다르네···.”

로난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고통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도 이런 느낌으로 나와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까.

‘빌어먹을, 아프니까 별 생각이 다 드는군’

로난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더럽게 아픈 것은 변함이 없었다. 흐려지고 선명해지는 것을 반복하는 시야 속에서 나바르도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손대고 있는 저주는 이제 이름조차 사라진 불의 마법이다. 대상자의 심장에 불씨를 심어서 내부의 힘부터 태워 버리는 용도지. 원래는 살해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저주거늘···.”

“살해···? 이런 썅···그렇게 끔찍한 거였어요?”

“그래. 내부의 힘과 기력을 모두 태워버린 불은 끝내 육신마저 삼켜 버리니까. 헌데···.”

나바르도제가 말꼬리를 끌었다. 화염 주머니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가 짐짓 심각해져 있었다. 한순간 심장을 불사르던 열기가 잦아들었다.

“···태울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야. ■■. 이런 식으로 해주를 막아 놓았나.”

“후우, 해주를···막다니요?”

“말 그대로란다. 지금 이걸 바로 없애 버리면 네 몸이 견디지 못해. 각각 바람과 물에서 기인한 저주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어서 어느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저주가 폭발적으로 강해지게 설계되어 있어.”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좆된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불이 꺼지면 물이 범람하고 해일이 일어날 거다. 반대로 물이 마르면 불길은 바람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겠지. 원래 저주처럼, 네 몸을 완전히 태워 버릴 때까지.”

“그러면···커윽,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불의 열기를 유지하면서도 저주를 없애 봐야지. 번거롭게 되었구나.”

“그게···가능해요?”

로난이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고민을 끝마친 나바르도제가 그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나를 믿어라 아이야. 다만 조금 힘을 써야 하니 대화는 삼가자꾸나.”

“예?”

나바르도제가 주문처럼 들리는 단어 몇 마디를 속삭였다. 별안간 눈꺼풀이 빠르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기의 살결처럼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쉿···잠들려무나.”

가슴을 누르고 있는 손바닥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참다못한 로난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은 이미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으으윽···씨발···.”

로난은 눈을 떴다. 열병이 나은 뒤 맞이하는 아침처럼 눈앞이 상쾌했다. 땀을 잔뜩 흘렸는지 몸이 전체적으로 축축했다. 숨을 고르던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장소는 여전히 아버지의 방이었다. 야릇한 적색광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별다른 신체적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땀이 식으면서 추위를 느낄 만도 한데, 몸이 외투를 껴입은 것처럼 후끈거렸다. 그때 뒤쪽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느냐, 아이야.”

“아, 거기 있었어···”

나바르도제의 목소리였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로난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끝맺지 못한 어미가 잔여물처럼 흘러나왔다.

“···요?”

“이렇게 금방 정신을 차리다니 역시 대단하구나. 후후···나는 조금 쉬어야겠다.”

나바르도제는 바로 옆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로난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는 피곤하지만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로난이 굵직한 침을 삼켰다.

‘설마.’

한 번 신경을 쓰자 전체적으로 흐트러진 차림새도 눈에 들어왔다. 빳빳하던 드레스에는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살짝 젖은 채 헝클어져 있었다.

로난은 깊은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불순한 생각들을 날려 보냈다. 최소한의 용기를 되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있던 거죠?”

“계획을 변경하느라 애를 좀 먹었단다. 결국은 성공했지만.”

“그 말인즉슨 제 저주가···.”

“그래. 완전하지는 않지만 대체하는 데 성공했지. 지금 네 가슴 속에서는 저주와 나의 불씨가 함께 타오르고 있단다.”

나바르도제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얼빠진 착각 따위는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불씨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란다. 내 힘의 근간을 이루는 불을 조금 떼서 너의 심장에 심었지. 한 번에 교체했다가는 무리가 갈 수 있어서 극소량만 집어 넣었단다. 그래도 인간이 이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거늘···.”

로난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순수한 감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로난은 길을 걷다가 화분이라도 머리에 맞은 사람처럼 벙찐 채 앉아 있었다.

‘시발, 뭘 넣었다고?’

현실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설명이었다. 물론 나바르도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 아마 진실일 터였다. 로난이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까지···.”

“약속한 것을 지켰을 뿐이란다. 이르를 구한 보답을 하겠다고 말했지 않느냐.”

명쾌한 사유였다. 그녀가 피곤해하는 것도 이제는 단번에 이해가 갔다. 힘의 근간을 떼어냈다는 건 결국 자신의 생명력을 나눠주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기지개를 켠 나바르도제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은 별로 달라진 것을 못 느낄 수도 있다. 기껏해야 평소보다 상쾌한 정도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연한 차이를 느낄 거란다. 너를 해치고 억누르기 위한 저주와는 궤가 다른 힘이니까. 네가 강해질수록 나의 불씨가 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완전히 저주를 소각해 버릴 거란다.”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원본보다 좋은 가짜 부품을 끼워 넣은 것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강력하다는게 흠이었지만 어찌 됐건 저주보다는 나을 터였다.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있던 로난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바르도제.”

“고개를 들거라 아이야. 나야말로 감사하고 싶구나. 사실 내 딸을 구해주는 것도 보았거든.”

“아, 그걸 봤어요?”

“그래.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 일부러 앞에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로난은 그제야 주섬주섬 상의를 챙겨 입었다. 옷을 못 입을 정도로 체온이 올라가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이 입속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어째 몸이 점점 이상해지는 거 같은데.’

저주가 풀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세니엘인지 뭔지 하는 돌멩이 귀신. 바쥬라의 코어로 모자라서 이번에는 태초의 불씨였다. 워낙에 바쥬라가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만큼 이번에는 무슨 지랄이 일어날지가 두려웠다. 뭐 반짝이는 마나가 나오게 되는 것만큼 충격적이기야 하겠냐만은.

“얼마나 지났죠?”

“여섯 시간 정도. 경이로운 회복력이더구나.”

“확실히 얼마 안 지나기는 했네요.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여기서 뭘···음?”

한순간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분명 처음 들어왔을때는 보이지 않던 푸른 기운이 연구용 책상 아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세하게 점멸하는 것을 보아하니 네뷸라 클라지에의 상징인 반짝이는 마나가 함유되어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느냐?”

“아니···잠깐만요. 저게 뭐지?”

로난은 천천히 마나 쪽으로 다가갔다. 나바르도제의 반응으로 추측했을 때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몸을 숙여 책상 아래로 들어가자 기운이 한층 강렬해졌다. 면밀하게 주위를 살피던 로난은 머지않아 책상 아랫면에 붙어 있는 종이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겉모습만 보기에는 평범한 양피지였다. 정체불명의 마나는 거기에서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특수한 마법적 조치 없이 그냥 아교로 대충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로난은 양피지를 입에 문 채 엉금거리며 책상 아래에서 빠져 나왔다. 나바르도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지금 확인해 보려구요.”

로난이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백지만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두 번 접힌 양피지를 펼치자 웬 그림 하나가 나타났다.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건···!”

조악하기는 하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는 지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바르도제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중얼거렸다.

“이런 걸 남겨 두다니.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늘.”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로난도 원래는 찾아내지 못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해주가 진행되면서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효과를 볼 줄은 몰랐는데. 지도를 살피던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이 해안선은···어쩐지 낯이 익은데.’

평범한 잉크로 그린 그림은 어느 바닷가 부근을 표시하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대양이 넓은 여백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그것도 최근에 본 형태였다. 빠르게 머릿속을 뒤적이던 로난은 금세 결과를 도출해 냈다.

“아.”

정체불명의 지도는 알로긴이 보내준 대장간의 약도와 거의 같은 곳을 그리고 있었다. 헤이란. 성검을 벼릴 대장간이 있다는 대륙의 북쪽 끄트머리.

‘북부로 갔다더니. 이 정도로 멀리 간 건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정황상 둘 중의 한 명이 그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지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양피지가 살짝 구겨짐과 동시에 지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북해를 묘사한 넒은 여백에 웬 얼룩이 생기고 있었다. 로난이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묘하게 반작거리는 것이 기존의 지도를 그려낸 잉크와는 소재가 달랐다.

얼룩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확장되었다. 나바르도제 또한 로난의 옆에 바짝 붙어서 그 흥미로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지도 위의 움직임이 멎었을 때, 로난은 그것이 어떤 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여백을 넓게 처리한 거였군. 엘시아가 남긴 걸까요?”

“모르겠구나. 네 마나에 반응해서 지도가 바뀐 거  보면 ■■가 직접 남겼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여기에 섬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음? 그게 무슨 소리니?”

“망령의 바다잖아요. 여기.”

로난이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나바르도제가 작게 탄성했다. 섬이 그려진 곳은 망령의 바다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도대체 여기에 뭐가 있길래.’

바닷물조차 얼어붙고 산보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부표처럼 배회하는 극한의 오지. 뱃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 조차 꺼려하는, 이 별에서 손꼽히는 마경 중 하나였다.

“확실히 수상하구나. 추위와 죽음만이 존재하는  곳이거늘.”

“그쵸.”

“그것과 별개로 기분도 조금 나쁘고 말이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 자체가 너무 작위적이야.”

나바르도제가 미간을 좁혔다. 로난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지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꼭···네가 발견할 줄 알고 거기에 놓아둔 것 같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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