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하늘이 얇아지는 곳(5)
#194
“꼭···네가 발견할 줄 알고 거기에 놓아둔 것 같지 않으냐.”
“그러니까요.”
로난이 무겁게 주억거렸다. 지도를 발견하게 된 상황 자체가 너무 절묘했다. 특히 나바르도제조차 찾아내지 못하게 처리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 이 지도가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었다.
“엘시아가 여기서 떠난 게 5년 전이라고 했죠?”
“그래. 그 무렵이었지.”
“여기서는 그 여자가 지도를 남겼다고 보는 것이 맞겠네요. 이건 제가 챙길게요.”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건 직접 찾아가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로난은 지도를 반듯하게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려무나. 일단 저 섬에 무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으음. 여기의 일이 바쁘지만 않는다면 도와주는 것을···.”
나바르도제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투로 중얼거렸다. 첫 대면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참 괜찮은 드래곤이었다. 나보다 훨씬 강한 것을 알면서도 안위가 걱정될 만큼.
예쁘장한 얼굴에는 여전히 피로감이 묻어나 있었다. 보나 마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싸움터로 나서겠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기왕 온 김에 조금 썰고 갈까요?”
“으음? 썬다는 게 무슨 소리니?”
“자랑은 아니지만 저런 이상한 괴물들을 죽이는게 제 특기라서요. 훈련도 할 겸 제가 나바르도제 님 대신 전선에 설 테니까 며칠 정도는 푹 쉬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호오?”
나바르도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날카롭게 좁아졌던 눈매가 다시 둥글게 변했다. 로난은 괜스레 뺨을 긁적였다. 호의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때때로 쑥스러운 법이다.
“필레온에 연락만 넣으면 안 될 것도 없어서···아 진짜,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요?”
횡설수설 말을 잇던 로난이 결국 못 참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바르도제의 눈빛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소리 내어 웃은 그녀가 로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 차이가 제법 나서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아하하, 대견하고 귀여워서 그렇단다. 이르가 참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으윽.”
로난이 눈가를 찡그렸다. 애 취급을 받는 것은 언제나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생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하지만 거절하마. 배웅해 줄 테니 이번 일을 마치는 대로 돌아가거라.”
“진심이에요? 여깄는 멍청이들 태반보다는 잘 싸울 자신이 있는데.”
“그래. 왜냐하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착한 아이거든.”
한번에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로난이 고개를 갸웃렸다. 나바르도도제가 말을 이었다.
“아이야, 나도 네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분명히 당장 전선에 투입해도 손색이 없겠지. 마법을 베어내는 ■■의 능력을 물려 받은 만큼, 어지간한 불멸자들보다 나은 활약을 펼칠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왜···.”
“하지만 그렇기에 너는 여기를 떠나지 못할 거란다. 브니하르도와 이라니엘을 구해 줬던 것과 같은 상황이 몇 번씩이나 벌어질 테고, 그럴 때마다 너는 드리무어를 떠나는 것을 주저하게 되겠지.”
나바르도제의 목소리는 사근사근하면서도 진지했다. 내가 그런 걸 왜 신경 쓰겠느냐며 반박하려던 로난이 턱밑까지 치민 말을 삼켰다.
‘젠장. 일리가 있어.’
생각해 보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의견은 아닌 것 같았다. 로난이 입매를 뒤틀었다. 돌이켜 보면 징벌 부대에서 구르던 때도 그런 일이 몇 번인가 있었다.
허무하게 뒈져 나가는 걸 보기 싫어서 하나둘씩 챙기다 보니 어느새 제법 많은 식충이를 책임지게 됐었다. 답도 없는 범죄자 새끼들이었지만 결국에는 정이 들어 버렸고,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은혜를 갚았다.
기껏 살려준 목숨까지 내던져 가면서 아하유테까지 이어지는 길을 뚫어 주는 것으로.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더욱 큰 그림을 그려 봤으면 한다. 모두를 구하는 법을 찾아 헤메던 ■■나 엘시아처럼.”
“나바르도제.”
“그러니 여기는, 걱정 말고 우리에게 맡기거라.”
머리에서 손을 뗀 나바르도제가 이번에는 뺨을 만지기 시작했다. 마른 입술 사이로 침음이 새나왔다.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분명 무리없이 저 괴물들을 죽이겠지. 틱틱대던 불멸자들도 결국에는 실력을 인정할 테고, 필레온에서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야···정이 들 만큼.’
그녀의 말이 옳았다. 로난은 자신의 구질구질한 성격과 더불어 발목이 붙들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체스 말처럼 쓰는 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나.’
못 해도 오 년에서 칠 년 안에는 승부를 봐야 했다. 나바르도제의 말마따나 외계 세력으로부터의 방어는 드리무어에게 일임하고, 날개 달린 대머리들을 잡아 족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머지않아 결단을 내린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늘 돌아갈게요.”
“그래. 똑똑한 아이구나.”
“대신, 할 말이 있어요”
“으음?”
“좀 심각한 이야기에요.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엄연히 제가 알아낸 사실들이에요. 부디 믿어 주시면 좋겠네요.”
애초에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을 보상으로 요구한 것도 이걸 위해서였다.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할 예정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냐는 듯한 눈치였다. 심호흡한 로난이 입을 열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그러니까 성운 교단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세요?”
“성운 교단이라면···아아, 어느 순간 이상해졌다는 그 조직 말인가. 최근 벌어진 사건들과 연관이 있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구나.”
나바르도제의 반응은 예상대로 심심했다. 불멸자다운 반응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의 흥망성쇠 따위는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교단의 창시자인 구원자가 그녀의 일족인 가르가렌스의 뿔을 자른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네뷸라 클라지에가 창시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잘못 말하면 아셀이 좆되겠지.’
잠시 이타르간드 살인 미수와 연관지어 그녀의 분노를 이끌어내 볼까도 생각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그것은 네뷸라 클라지에 보다는 겨울 마녀 당사자의 악행이었고, 섣부르게 말했다가는 되려 마녀에게 과외를 받고 있는 아셀이 불똥을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에는 정면 승부군. 입속말을 중얼거린 로난이 안주머니에서 여명패를 꺼내들었다. 블러드 미스릴의 아름다운 자태에 나바르도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황제 폐하에게 받은 신분증명서에요.”
로난은 여명이라는 직책과 그 임무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원활한 설득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설명을 듣던 그녀가 흥미로운 듯 콧소리를 냈다.
“오호···제국의 관리였나. 내 생각보다 더 능력이 있는 아이였구나.”
“그냥 제국에서 저보다 그 개새끼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제가 지금부터 말하는 건, 그 광신도들이 앞으로 저지를 일에 관한 이야기에요.”
로난은 생각을 충분히 정리한 뒤 입을 뗐다. 그는 파르잔에서 벌어졌던 다르만의 거인화 사건을 근거로 머지않아 벌어질 ‘별의 강림’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칠 년 뒤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대머리들과 그들의 비현실적인 강함. 장차 모든 것을 잃게 될 미래까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칠 년 뒤에 다르만이라는 놈의 원본이 되는 괴물들이 세상에 내려온다는 소리인 게냐? 드리무어가 무너지는 것도 그 무렵이고?”
“정확해요.”
“···솔직히 믿기 힘들구나. 정체는 모르겠지만 고작 세 마리에게 드리무어가 뚫리다니.”
“제가 확인한 정보가 사실이라면 한 명이라도 막기 어려울 거에요. 파괴력은 둘째치더라도 모든 피해를 막아 내는 보호막을 기본으로 달고 있으니까.”
로난은 손짓까지 해 가며 거인들의 능력을 묘사했다. 중요한 것은 전생에 직접 경험한 것을 최근에 어디선가 본 자료처럼 꾸며 말하는 일이었다.
회귀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으니까. 그건 다르만 찬스를 사용해도 헛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나바르도제가 침음을 흘렸다.
“내 말이 사실이라면···으음. 확실히 문제로구나.”
다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잠꼬대 같은 이야기를 나름의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거인처럼 변한 다르만의 모습을 다수의, 그것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보았으니까.
‘사실상 그 병신이 쐐기를 박은 거지.’
한 집단의 수장들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만으로도 판도는 변한다. 괜히 다르만의 거인화를 분기점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몇 분이 지나고, 마침내 로난이 원하던 답변이 돌아왔다.
“진지하게 검토해 보마. 오늘중으로 아드렌에 서신을 보내야겠구나.”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순간부터 네뷸라 클라지에는 제국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 가는 전력을 적으로 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 벌레들이 드래곤의 불을 맞이할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무슨 비밀 병기가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창세 이래 가장 완전한 종족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터였다. 흥분을 가라앉힌 로난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해요.”
“나야말로 그런 중요한 정보를 알려 줘서 고맙구나.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겠지.”
대화는 머지않아 끝났다.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 샅샅이 방을 뒤져 봤지만 처음에 발견한 지도를 제외하고는 쓸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로난은 나바르도제의 말마따나 곧바로 요새를 떠나기로 했다.
“미안하구나. 직접 데려다주고 싶었는데.”
“괜찮아요.”
나바르도제는 시간 문제 때문에 로난을 직접 배웅해주지 못했다. 그녀가 미리 준비해둔 포탈은 처음 드리무어에 착지했던 자리에 생성되어 있었다. 검은 하늘과 푸르른 별의 대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불의 어머니 본인과 조금 전에 함께 싸웠던 이라니엘이라는 엘프, 웬 처음 보는 여인이 그를 배웅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로난 님. 마음이 바뀌거나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으시다면 저 이라니엘 레마티온을 찾아와 주세요.”
“다음에는 숫자도 안 세고 때릴 거야.”
“연구만 하게 해 주신다면 좀 맞아도 상관 없습니다.”
이라니엘이 악수를 청했다. 픽 웃은 로난이 그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입을 삐죽 내밀고 있던 여인이 툭 내뱉었다.
“잘 가라. 인간.”
“음?”
로난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인상은 좀 사나웠지만 부정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문제는 이 여자가 누구길래 나를 배웅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실례지만, 누구신지?”
“하, 머리라도 다친 건가.”
여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실소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적갈색 머리카락과 자기주장이 확실한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나바르도제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폭력적이라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폭력적. 폭력적이라···불현듯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린 로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설마 브니하르도?”
“눈치가 참 빠르군.”
브니하르도가 코웃음 쳤다. 아무래도 이것이 그녀의 인간형 폴리모프인듯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지만 드래곤 형태와는 도저히 연관 지을 수 없는 외모였다. 벙쪄 있던 로난이 입을 뗐다.
“나바르도제 님을 닮으셨네요. 여러모로.”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나저나 갑자기 예를 갖추는 걸 보니 뒤늦게나마 나의 위대함을 깨달은 건가?”
“어···그렇다 칩시다.”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된 채였다. 전생에는 마냥 재수 없게만 느껴지던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좋아지려 하고 있었다. 브니하르도는 양손을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웃음을 흘렸다.
“보기보다는 현명한 인간이군. 후흐흐, 앞으로도 그렇게 예를 갖추도록 해라.”
처음 만났을 때의 이타르간드 못지않게 머리가 나빠 보였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나바르도제가 속삭이듯 전음을 보냈다.
[네가 이해해 주려무나. 니브가 나쁜 아이는 아닌데···.]
그녀는 자신의 딸을 애정과 한심함이 반반쯤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 참 그림이 좋았다. 로난은 슬며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린. 다음 네 주인은 드래곤도 괜찮을 것 같다.’
어쨌든 이제는 떠날 시간이었다. 여러모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몰려오는 괴물, 아버지의 방과 불의 저주, 여러모로 흉악한 드래곤 모녀까지. 책을 써서 팔면 돈 좀 만지게 될 소재였다. 막 포탈로 들어서려던 찰나, 나바르도제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럼 잘 가거라. 아이야. 또 보자꾸나.”
“신세 많이 졌어요.”
히죽 웃어준 로난이 걸음을 내디뎠다. 공간이 비틀림과 동시에 모든 내장이 무도회를 벌이는 것처럼 좆같은 감각이 닥쳐왔다.
그가 필레온 대광장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정확히 30분이 소모되었다. 잠시 암전되었던 시야가 밝아지니 달이 휘영청 한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이 대자로 뻗어 있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돌아왔군.”
벌어졌던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설마 하늘 너머의 하늘을 만지고 올 줄이야. 가슴 속에서 아롱이는 나바르도제의 불씨만이 지금껏 벌어진 일이 실존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일단 북부로 떠날 계획을 짜 봐야겠지. 그리 읊조린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등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던 도중,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한 번 과감하게 쐬는군. 별이라도 관측하고 있던 건가.”
“엉?”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비쩍 마른 사내의 모습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자로딘 교수님?”
“오랜만이군. 해주는 잘 끝마쳤나.”
불세출의 대지 마법사인 자로딘이 꼿꼿하게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2년 만의 대면이었다. 앙상한 손목과 푹 들어간 뺨은 여전히 안쓰러웠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저야···음?”
로난이 살갑게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문득 자로딘의 등 뒤에 숨어 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매미처럼 달라붙은 채 얼굴만 빼꼼 내민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그 여성분은?”
“아아, 너는 몰랐었겠군.”
로난이 검지를 뻗어 여인을 가리켰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다시 등 뒤로 숨었다. 자로딘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인사해라. 내 아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