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96화 (196/333)

196. 북부로(2)

#196

“그럼 승낙한 걸로 알고 있을게요. 또 봐요.”

“응. 조심해서 가.”

용건을 마친 로난이 학생회실을 떠났다. 아데샨은 특유의 사근사근한 미소로 그를 배웅했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적막 속에 번졌다.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서류 더미를 바라보던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여행.”

아데샨은 로난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행. 그것도 하루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닌 장기 여행이라니.

그녀는 조용히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심호흡한 아데샨이 머리카락을 넘기자 사과처럼 달아오른 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지···.’

틀림없이 동요한 것을 들켰을 터였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심장 뛰는 소리와 가빠진 숨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애초에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았거니와 로난은 워낙에 눈치가 빠르니까.

수많은 감정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일단은 부끄러웠고, 보다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단번에 승낙한 것이 너무 쉬운 여자처럼 보인 게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내가 이런 거에 능숙했다면 한 번 정도는 튕겼을 텐데.

“···에헤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입꼬리는 올라갔다. 안 그래도 이번 여름방학에 같이 놀러 가자고 조심스레 제안해 보려고 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그녀가 약간 모자라 보이는 웃음을 흘리던 와중이었다. 난데없이 학생회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웬 소녀 한 명이 들어왔다.

“아데샨 언니!”

“에, 에리?!”

“오늘 온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놀라요? 히히, 보고 싶었어요.”

아데샨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강아지처럼 달려온 에르제베트가 그녀를 폭 끌어안았다.

“하아···이거죠. 이게 부족했어요.”

에르제베트가 아데샨의 가슴께에 얼굴을 부벼 대며 중얼거렸다. 워낙에 고양이를 닮은 관상이라, 강아지보다는 애교가 많은 고양이처럼 보였다. 피식 웃은 아데샨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리도 참···.”

“진짜에요. 저는 지금 굉장히 진지하다구요.”

에르제베트가 얼굴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녀가 고단한 마탑 연수 생활에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귀찮은 잡무를 대신해줄 하인도, 긍지 높은 마법사들의 칭찬도 아닌 끌어안길 아데샨의 품이었다.

“연수 끝난거 축하해. 여명 마탑은 어땠어?”

“좋았어요. 세상이 넓은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랑시아의 꼬마도 제법 숙녀다워 졌고···아운 필라 님은 역시 화염 마법의 천재에요.”

아데샨의 질문에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해줄 거리가 산더미였다. 그녀가 막 탑주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다는 깜짝 소식을 전해 주려는 차였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아데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으응? 아, 아니···그런 거 없어.”

“거짓말. 또 로난 님이랑 관련된 일이죠?”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에르제베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거리며 그녀의 볼을 콕콕 찔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어, 어떻게···알았어?”

“그야 간단하죠.    언니는 그분이랑 관련된 일에만 동요하거든요.”

에르제베트가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완벽한 학생 회장을 흐트러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필레온에 오직 한 명뿐이었다.

갑자기 그게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짜증이 살짝 났다. 그녀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질문했다.

“그럼 이제 말해 봐요. 이번에는 그 악당이 또 무슨 짓을 해서 우리 언니를 괴롭힌 거죠?”

“아, 악당이라니···그런···.”

“언니가 그렇게 마음을 써 주는데 하나도 몰라주잖아요. 맨날 다쳐서 오기나 하고. 이번에 실려 왔을 때도 하루종일 간병해 줬다면서요.”

에르제베트가 툴툴거렸다. 물론 그녀는 로난을 굉장히 좋게 보고 있었지만, 아데샨과의 관계는 또 다른 문제였다. 자신이 숭배하는 신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기 싫다고 해야 하나. 머뭇거리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아데샨은 로난에게 들었던 제안을 그대로 전했다. 에르제베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세상에. 여행이요?”

“아하하···안 믿어지지.”

“승낙했어요? 아니, 당연히 했겠지. 내가 뭘 물어보는 걸까요.”

아데샨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던 얼굴에 단풍이 들어 있었다. 세상에, 진짠가 보네. 벙쪄 있던 에르제베트가 그녀의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언니. 이건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아요. 먼저 고백하기를 유도하고, 정 답답하면 괘씸죄로 덮쳐 버리죠.”

말투가 빠르면서도 진지했다. 보랏빛 눈동자는 여태껏 본 적 없던 열의로 타오르고 있었다. 과감한 제안에 아데샨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에, 에리. 덮치다니···!”

“아니면 못 해도 고백은 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 능력 사람한테는 못 쓰는 거에요?”

에르제베트가 아데샨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투도 표정도 매서워진 것이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아데샨의 입술이 당황스레 달싹였다.

“아직 실험 안 해 봤는데···그,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언니. 이런 말을 드리기는 싫었는데, 솔직히 언니는 조금 위기감을 느낄 필요가 있어요.”

“······위기감?”

“네. 당장 로난 님 주변에 있는 여자들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에르제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설명해줘야 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이 정도로 눈치가 없는 게 아니었다면 이미 2년 전부터 오순도순 사귀고 있었을 테니까.

“여, 여자라면···구체적으로 어떤?”

“후보는 많지만 역시 경계해야 할 건 동아리 사람들이죠. 저는 브라움 선배만 아니었으면 얼굴을 보고 부원을 뽑는 줄 알았을 거에요. 유일한 위안거리는 마법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난 아셀 님이 남자라는 점일까요? 물론 저는 언니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에르제베트가 말꼬리를 끌었다. 어렵잖게 뒷내용을 유추한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정말 로난 주변의 여인들은 하나같이 동화책에서 나온 것 같은 미녀뿐이었다. 마르야와 뱀파이어 공주님 오필리아, 최근 들어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비로제 교관님까지. 턱을 매만지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위험한 건 마르야 님이에요.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부유하기까지 하니···더군다나 로난 님을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아요.”

“···심상치 않다니?”

“있어요 그런 게.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다고 할까. 확실한 건 언니보다 과감하게 행동할 여지가 크다는 거죠.”

과감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에르제베트는 마르야가 로난에게 있어 소꿉친구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점, 그로 인해 가져갈 수 있는 전략적 우위에 관해 덧붙여 설명했다.

“허물없다는 점이 가장 무섭죠. 동아리에서도 보면 두 분은 엄청나게 친해요. 더군다나 마르야 님이 원체 스킨십을 좋아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어요.”

에르제베트는 잠시 그녀와 동아리 활동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심심하면 인형처럼 예쁘다면서 막 끌어안는데, 파괴력이 굉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상에 잠식하는 거죠. 친구끼리 뭐 어떻냐는 이유를 창 삼아서 파고드는 거에요. 친구끼린데 손 좀 잡으면 어때. 친구끼린데 포옹 좀 하면 어때. 결국에는 천둥 치는 날 밤에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친구끼린데 같이 좀 자면···”

“그, 그만해! 알았어, 충분히 알아 들었어.”

아데샨이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말렸다. 발갛던 얼굴은 다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안 돼.’

갑자기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떠올렸던 달콤한 망상은 어느덧 로난과 마르야의 입맞춤을 나무 뒤에서 지켜보며 흐느끼는 장면으로 변모해 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손발이 벌벌 떨려왔다.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 에리···나, 어떻게 해야 하지? 그, 그런 건···.”

“괜찮아요 언니. 다 잘 될 거에요.”

“고, 고마워···.”

“뭘요.”

에르제베트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상상만으로 이렇게 동요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부럽기도 하지. 입속말로 중얼거린 그녀가 옅게 웃었다.

“저는 언니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어요.”

조금은 쓴 미소였다. 커튼 사이로 새어든 저녁놀이 절묘하게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어쩐지 이번 여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늦은 입학식이 개최되었던 시점이 봄의 말미였던지라 초목은 머지않아 완연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어느덧 필레온에 온 이후 두 번째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이 푸르름이 그리웠지요. 다들 즐겁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고 오세요.”

크라티르의 짧은 훈화와 함께 방학식이 끝났다. 지천에 팽배한 매미 소리가 귀를 찌르고 있었다. 부원들과의 인사를 마친 로난은 슐리펜과 나란히 기숙사로 돌아갔다.

“뭔 놈의 여름이 이렇게 빨리 오냐.”

“그만큼 겨울이 길었으니까. 애초에 입학식도 늦게 열렸지.”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런데 너는 안 덥냐? 땀 한 방울 안 흘리네.”

“마나로 땀샘을 조절하고 있지. 수행 중 하나다.”

“미친 새끼.”

로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리 도움이 된다 해도 그런 짓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우면 손부채질을 하면서 땀을 줄줄 흘리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어울렸다.

오늘이 방학식이라 그런지 학생들의 표정은 전체적으로 밝았다. 가장 신이 난 것은 입학한 지 세 달도 지나지 않아 여름방학을 맞이한 신입생들이었다.

매미 소리가 짜증나게 들릴 만큼 더운 여름이었음에도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명랑했다. 문득 뙤약볕 아래서 공놀이를 하는 신입생들을 본 로난이 혀를 빼물며 질색했다.

“다 돌아 버린 거 아냐?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거진 이 년 만에 맞이하는 여름이니까. 어지간히도 그리웠겠지.”

공놀이 구성원 중에는 놀랍게도 이타르간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날아오는 상대 측의 공을 피할 때마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르, 거기 받아!”

“내게 명령하지 마라.”

그리 말한 이타르간드가 공을 받았다. 오만한 말투는 그대로인데 행동은 협조적인 것이 우스웠다. 그의 추종자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운동장 한측에 앉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인간 사회에 잘 녹아든 모습에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저 새끼, 은근 잘 어울려서 노네.”

“듣자하니 차기 학생회장으로 나간다는 소문도 있더군.”

“뭐, 잘 된 일이지. 나바르도제 님도 좋아하시겠어.”

로난이 낄낄거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던 두 사람은 어느덧 기숙사 건물에 도착했다. 로난은 한 층을 더 올라가야 하는 슐리펜에게 미리 작별 인사를 했다.

“방학 잘 보내라.”

“그러지. 바로 북부로 가는 건가?”

“엉. 더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다녀와라. 여색에 빠져서 약해지지만 않으면 좋겠군.”

슐리펜은 그 말을 남긴 채 층계를 올라갔다. 여색은 지랄.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한 로난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셀 정도는 집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가방이 현관 앞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로난이 지난 두 달간 미리 준비해 둔 여행용 짐이었다. 방한용 장비가 많아서 부피가 큼직했다. 아데샨의 얼굴을 떠올린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승낙해 줘서 다행이야.’

아데샨과 함께 하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사실 조금 더 자주 데리고 다니고 싶었는데 학생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이후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통 어려웠다.

대장간 구경도 시켜 주고 싶어서 말을 꺼내 봤는데 잘 합의가 돼서 다행이었다. 북부는 선배의 고향이니까 내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알고 있겠지. 가족의 위령비도 북부에 있다 했으니 가는 길에 겸사겸사 들러도 좋을 것 같았다.

“슬슬 가 볼까.”

생각을 정리한 로난이 배낭을 짊어졌다. 시타에게는 누나를 지킬 것을 명령했기에 이번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네뷸라 클라지에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시기라 보복이 들어올 확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약속 장소는 필레온의 서쪽 대문 앞이었다. 어쩌다 보니 조금 일찍 나온 터라 아직은 아무도 나오지 않은 채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덥혀진 공기를 들이마신 로난이 만족스레 끄덕였다. 피부를 찌르는 볕의 세기로 미루어 보아 북부를 뒤덮은 눈과 얼음도 제법 녹아내렸을 터였다.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그가 기지개를 쭉쭉 켜던 와중이었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

“흐아아암···아, 왔어요?”

생각보다 이른 만남이었다.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장신의 숙녀가 배낭을 짊어진 채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이 둥글게 떠졌다.

“···아데샨 선배?”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아데샨이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잠시나마 로난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건 진짜 장난 아닌데.’

한 달 전에 봤던 아데샨이 아니었다. 딱히 꾸민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람이 달라 보였다. 격무에 찌들려 초췌하던 얼굴은 다시 탄력을 되찾았고,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고와져 있었다. 다물어진 입술은 무언가를 가볍게 바르기라도 했는지 산호를 연상케 하는 연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냥 예뻐져 있었다. 벙쪄 있던 로난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다행이다. 그럼, 갈까?”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쓸어넘긴 그녀가 나긋하게 웃었다. 연상자의 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에리의 조언에 따라 연습한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물론 심장은 당장에라도 가슴을 찢고 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 잠시만요. 아직 올 사람이 남아 있어서요.”

“······올 사람?”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이 가는 게 아니었나? 직감에서 기인한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차였다. 저 뒤쪽에서 도약해온 무언가가 로난의 목에 매달렸다.

“얍!”

“커억!”

예상치 못한 기습에 로난이 휘청거렸다. 아데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금발을 뒤로 묶은 소녀가 로난에게 매달려 깔깔거리고 있었다.

청록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자기주장이 강한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마르야가 로난의 머리를 막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정확하게 맞춰서 왔는데 먼저 와 있었네? 시간 약속 잘 지키는 거 아주 좋아.”

키 차이가 크게 나는 탓에 소녀의 발은 바닥에서 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로난이 그녀의 팔을 탁탁 두드렸다.

“얌마. 무거우니까 내려가.”

“에이, 남자가 뭐 이런 거 가지고 엄살이야?”

“배낭 무게는 생각 안 하냐? 그리고 너 이제는 근육 덩어리가 되어서 진짜로 무겁다고.”

“아하하, 그건 좀 듣기 좋은 소리네.”

로난이 상체를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마르야는 쉽사리 팔을 풀지 않았다. 그 막역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데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잿빛 시선은 로난의 등과 맞닿아서 눌려 있는 마르야의 가슴에 고정되어 있었다. 참다 못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앗, 안녕하세요 아데샨 언니!”

아데샨이 뭐라 한마디를 하기도 전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마르야가 로난의 목에서 팔을 풀고 달려왔다. 아데샨과 마주선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번에 같이 가게 돼서 너무 좋아요. 잘 부탁드려요!”

“···으응. 나도 잘 부탁해.”

이렇게 싹싹하게 나오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데샨이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어른의 미소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두 여자를 지켜보던 로난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사이가 좋군. 잘 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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