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197화 (197/333)

197. 북부로(3)

#197

필레온을 떠난 로난 일행은 북부 대로로 걸음을 옮겼다. 본격적으로 여정을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광장을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대로 위를 사람들이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광활한 풍경에 로난이 질린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언제 봐도 더럽게 넓구만.”

황궁을 중심으로 제도를 양단하는 이 널찍한 길은 겨울의 시작점이라 불리는 도시 아스탄까지 이어져 있었다. 제국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교역로였기에 발론 내의 북부 대로는 언제나 상인과 그들이 끌고 다니는 짐마차로 북적거렸다.

마차 추돌 사고로 언성을 높이고 있는 마부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수십 채의 상인과 용병 길드. 경호원을 고용할 돈이 없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상인들과 그들을 노리고 다가오는 자유 용병들.

평소에는 볼 일이 없는 시장 뒤편의 세계의 모습을 로난이 흥미롭게 관찰하던 와중이었다. 앞장서서 걷던 마르야가 검지를 뻗어 대로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아, 저깄다!”

“뭐야, 저게 카라벨 상단이야?”

고개를 돌린 로난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으리으리한 짐마차 열두 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하나하나가 임시 숙소로 써도 될 정도로 큼직한 마차에는 덩치 좋은 말이 최소 네 마리씩은 붙어 있었다.

모든 짐마차의 측면에는 카라벨 상단의 상호가 적힌 금속 명패가 달려 있었다. 2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의 발전이었다. 로난을 돌아본 마르야가 눈웃음을 쳤다.

“흐흥. 네가 없는 동안에도 열심히 했지. 이제 제국 상단 순위에서 30위 안에는 들걸?”

“···그럴 만 하네.”

로난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어째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없이 뒤따르던 아데샨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기, 로난···혹시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계획이 변경된 이유가 뭐야? 그···이동 수단도 그렇고, 일정이 내가 들었던 거랑 좀 다른 것 같아서.”

아데샨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자칫하다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게 될 것 같았다. 잠시 입술에 침을 바른 그녀가 개미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리고···둘이 간다고···했던 것 같은데···.”

지금의 행적은 로난에게 처음 들었던 일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로난이 면목없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워낙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설명을 생략하고 말았다. 그가 마르야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아, 미리 이야기해줬어야 하는데 미안해요. 어제 동아리 애들한테 계획을 말했는데, 때마침 요 기집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단이 룬달리안까지 간다고 하더라고요.”

“룬달리안? 투칸 고원에 있는 도시?”

“네. 역시 고향이라 그런지 잘 아시네요.”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룬달리안은 북부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교역로가 트인지도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는데, 카라벨 상단이 마침 그곳의 특산품인 한철(寒鐵)을 구하기 위해 간다고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룬달리안까지 가는 길이었다. 험난한 지형은 둘째 치더라도 치안이 너무 좋지 않았다.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호위를 동원하는 것이 필수였고, 그마저도 어설프면 수인으로 구성된 도적단에게 속옷까지 털리기 일쑤였다. 정해진 교역로에서 벗어나는 것은 벌거벗은 미녀가 보석으로 치장한 채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워낙에 오랫동안 제국의 탄압을 받아 온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상인들은 북부 진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만큼 아직 돈이 될만한 요소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르야는 기왕 북부로 가는 거면 동행하는 것이 어떠냐 제안했다. 룬달리안은 로난의 일차적인 목적지인 헤이란과도 상당히 가까웠기에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한철이라는 말을 들은 아데샨이 눈썹을 으쓱였다.

“한철···비싼 물건을 가지러 가는구나.”

“네. 그래서 실력 있는 호위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마침 저희가 나타난 거죠.”

일행은 편안한 잠자리와 질 좋은 식사를 제공 받고, 카라벨 상단은 든든한 호위를 얻게 되는 것이었으니 서로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다. 북부의 험난함을 알고 있는아데샨은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은 생각같아. 말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편하게 갈 수 있는 데 까지는 편하게 가야죠.”

로난이 히죽 웃었다. 마음만 같으면 내가 지새운 날밤을 돌려 내라며 따지고 싶었지만, 합리적인 판단에 대해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아데샨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을 삐죽 내미는 것밖에 없었다. 룬달리안부터 헤이안까지는 둘이 가는 것 같으니 그 점을 위안 삼을 수밖에 없었다. 상단의 선두에 도착한 마르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빠, 나 왔어!”

“오오, 우리 딸. 방학 축하한다. 로난 님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상단은 이미 출발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로난을 알아본 상단주가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2년 전부터 인연을 맺었던 마르야의 아버지, 두온 카라벨이었다.

“이야, 몰라보게 듬직해졌군요. 황실 기사단 소속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잘 지냈죠?”

간만에 보는 두온은 살이 좀 빠져 있었다. 산더미처럼 돈을 벌어들일 텐데 이렇게 된 걸 보면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업무에 매진하는 듯했다. 악수를 마친 그가 로난과 마르야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허허허, 저야 뭐 예전하고 다름없이 지내고 있죠. 그래서, 저희 딸은 언제 데려가실 겁니까?”

“아빠!”

두온이 껄껄 웃었다. 로난은 실없는 웃음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지극히도 아저씨다운 농담에 마르야가 빽 소리를 질렀다.

“2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진짜 얘 볼 때마다 왜 그래?!”

“딸아. 로난 님 같은 반려를 만나는 것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란다. 한 발 앞선 아비의 선구안을 왜 몰라주는 게냐. 그리고 로난 님, 솔직히 저희 딸 정도면 훌륭한 미모 아닙니까?”

“예쁘기는 하죠.”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야가 예쁜 것은 사실이었기에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왼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마르야가 로난의 팔뚝을 퍽퍽 때렸다.

“아 진짜, 너는 또 왜 그래!”

“아프다. 얌마. 진짜로 아프다고.”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원체 힘이 세서 더럽게 아팠다. 마르야는 그만 하라며 난리를 피웠지만, 손으로 가린 입가에 웃음기가 감도는 걸 보면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바로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데샨이 셔츠 자락을 꽉 쥐었다.

‘데려가지 마.’

농담인 걸 알면서도 가슴이 답답했다. 예쁘냐는 질문에 저렇게 주저 없이 대답하는 것도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물론 나 같은 것보다 훨씬 예쁘기는 하지만. 별안간 고개를 돌린 마르야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참, 이번에 같이 가기로 한 선배님이야. 이리 와서 인사 나눠요 언니.”

“오오, 이거 죄송합니다. 간만에 로난 님을 만난 게 너무 반가워서 그만···두온 카라벨입니다.”

두온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아데샨의 키에 놀란 눈치였다. 그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데샨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허허, 그렇게 검술 지도가 훌륭하다면서 딸아이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이렇게 멋진 분이었군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멋진···.”

멋지다는 말을 들은 아데샨이 멈칫거렸다. 늘상 듣던 칭찬이었는데 어쩐지 오늘따라 의식이 되었다. 가만히 뒤편에 서 있던 로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배는 멋지죠.”

이 또한 사실이었다. 아데샨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멋지다는 말은 이성보다는 동경의 대상에게 하는 칭찬 아닌가?

‘아냐, 로난은 예쁜 것보다 멋진 걸 더 좋아할 수도 있잖아.’

파고들면 끝이 없었다. 빠르게 정신승리를 한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따님이 이룬 성취는 오롯이 본인의 재능과 노력 덕인걸요.”

“오오, 역시···!”

아데샨이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카라벨 부녀의 얼굴에 감격이 차올랐다. 마르야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언니는 어쩜 그렇게 말을 예쁘게 해요? 히히, 나중에 같이 목욕해요.”

“얘···!”

에리와는 달리 몸이 단단했다. 힘도 좋아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두 여자를 지켜보던 로난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같이 가자고 하기 잘 했군.’

확실히 여자들은 저렇게 들러붙으면서 친해지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아셀이나 슐리펜이 저딴 짓을 해다가는 그 자리에서 앞니를 부러뜨려 줬을 텐데. 세 사람을 불러 모은 두온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일정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이번 목적지는 알다시피 룬달리안으로···”

호위는 로난 일행을 제외하고도 스무 명이 더 있었다. 하나같이 인상 더럽고 실력 좋은 놈들만 뽑은 것을 보니 상당히 중요한 여정인 듯했다.

두온의 설명을 들은 일행이 짐마차에 올라탔다. 다른 칸은 나머지 용병들로 채워져 있는 터라 그들은 모두 같은 마차를 타야 했다.

절반 정도가 교역품으로 채워져 있는 실내는 빈말로라도 넓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마르야가 미안함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조금 비좁아도 이해해 줘. 어차피 비가 오는 게 아니면 잠은 바깥에서 자니까.”

“이 정도면 사치스럽지.”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징벌병 시절의 막사에 비하면 황궁이나 다름 없었다. 비좁기는 무슨. 적당히 구겨 넣으면 일곱 명도 잘 수 있는 넓이였다.

“언니도 괜찮아요? 역시 남녀를 나눠서 타야 하나···.”

“아니. 나는 지금도 좋아. 룬달리안까지 잘 부탁할게.”

정확히는 지금’이’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이 좁은 공간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로난과 한 걸음 간격을 두고 마주 앉은 아데샨이 눈웃음을 쳤다.

“뭐야, 왜 웃어요?”

“아하하. 그냥.”

문득 자신은 끓는점이 참 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만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왔다.

고백을 유도해라. 잘 때 덮쳐라. 물론 에리의 조언처럼 과감하게 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런 소소한 부분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신이 싫지는 않았다.

어쩌면 제법 괜찮은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 말발굽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라벨 상단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난은 짐마차의 지붕 위에 올라가서 벌렁 드러누웠다.

“북부는 오랜만이네.”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은 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는 떠나야 했다. 헤이란의 대장간과 망령의 바다. 이번에는 출생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아득해진 여름 하늘이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더웠지만 바람은 선선했기에 그런대로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눈과 얼음의 땅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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