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송곳니 술잔
#200
예상했던 대로 카라벨 상단은 다음 날 정오 무렵에 룬달리안에 도착했다. 딱 눈이 녹을 정도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여전히 입에서 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지만, 바람에 묻어나는 흙 냄새는 그래도 지금이 여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룬달리안은 드높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지간한 대도시의 것보다 장대한 규모에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거 더럽게 높구만.”
“힘 좋은 수인들이 지은 도시니까.”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수인이 주 구성원을 이루는 도시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투박하지만 강인한 성벽은 외부의 적을 막는다는 기능에만 극도로 치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외관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 크고 무거운 돌을 일단 쌓아 올리고 본 것이었다.
“거기 정지.”
성문 또한 거대했다. 수인 보초 일곱 명이 상단을 가로막았다. 조장으로 보이는 웨어타이거가 한 명. 웨어베어와 웨어울프가 각각 세 명씩 있었다. 덩치가 덩치인지라 수가 적음에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발론에서 온 거요?”
“아아, 네. 그렇습니다.”
“흐음···이렇게 규모가 큰 상단이 온 적은 처음인데. 짐을 살필 테니 모두 마차에서 내리시오.”
웨어타이거가 말했다. 짐승에 가깝던 어젯밤의 도적떼와는 달리 태도와 행동이 이성적이었다. 인간을 경계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우르르 몰려온 수인 병사들은 코를 벌름거리며 짐마차를 수색했다. 로난의 은근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마차에 수상한 물건은 실려 있지 않았다. 빠르게 검문을 마친 호랑이 조장이 두온에게 말했다.
“들어가도 좋지만 소란은 피우지 마시오. 이곳의 주민들은 아직 인간에게 그닥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저희 상단에서 준비해 온 위문품인데, 동료분들끼리 나눠 드시지요.”
“위문품?”
조장이 귀를 쫑긋거렸다. 두온이 지시하자 상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짐을 내렸다. 큼직한 상자 십여 개가 성문 앞에 쌓였다. 상자 하나를 열어 본 웨어베어 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꿀입니다 조장님. 이쪽 상자는 염장을 한 돼지고기고요.”
“돼지고기라고?”
호랑이 조장의 눈도 덩달아서 커졌다. 꽃이 필요한 꿀과 키우는 데 물이 많이 필요한 돼지고기는 둘 다 황량한 북부에서 구하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던 조장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당신 뭘 좀 아는군.”
“허허허, 마음에 드시면 좋겠군요.”
두온과 그가 악수를 나누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린 병사들이 상자를 날랐다. 기분이 좋아진 조장은 그들이 성문을 통과할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맨 앞에서 걷던 마르야가 두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때, 준비하기 잘했지?”
“그래. 과연 내 딸이구나.”
두온이 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무래도 그가 아니라 마르야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 같았다. 로난이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치켜세웠다.
“수완 좋은데.”
“흐흥. 투자할 가치가 있었어. 뇌물의 기능도 있지만 카라벨 상단에 대한 홍보이기도 하니까. 이런 작은 도시의 군인들은 주민들과의 유착관계가 끈끈해서 소문도 잘 내 주겠지.”
과연 미래의 아르말렌 백작이었다. 상단이 확장하는 규모를 보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은 로난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딱! 얼굴을 들어올린 마르야가 그의 손가락을 깨물려고 들었다.
“야, 언제까지 그렇게 애 취급 할거야?”
“대견해서.”
“아하하. 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칭찬을 들은 마르야가 키득거렸다. 티 없는 웃음이 아름다웠다. 뒤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데샨이 입술을 비틀었다.
‘···역시 어젯밤에는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쾌하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그때 고개를 힐긋 돌린 마르야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일 초 정도 서로를 응시하던 마르야가 눈웃음쳤다.
“후후.”
“...어?”
아데샨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교태로운 눈웃음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가 배까지 내려앉은 심장을 간신히 제 자리로 돌려 놓았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이 저 앞으로 사라진 뒤였다.
로난은 그때까지도 개를 쓰다듬듯이 마르야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그를 슬쩍 올려본 마르야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네.”
“엉?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다소 씁쓸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성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작은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들은 성벽과 마찬가지로 큼직하고 투박한 석재로 지어져 있었다.
거리에는 대다수가 수인으로 구성된 주민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직 제법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가벼운 나들이 차림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털가죽이 겨울에는 좋단 말이지.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의 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저거 봐. 인간이다.”
“쉿, 가까이 가면 안 돼.”
주민들의 이목은 모두 상단을 향해 쏠려 있었다. 경비조장의 말마따나 별로 곱게 보는 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일단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잠시 멈춰선 두온이 로난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여기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올 수 있었어요.”
“뭘요. 저희도 편하게 와서 좋았어요.”
“이번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딸아이가 말했던 대로 헤이란의 대장간에서 지불하게 될 비용은 모두 저희가 지불하지요. 꼭 증서를 남겨 오시길 바랍니다.”
“거, 참. 안 그러셔도 되는데.”
물론 진심으로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로난이 허허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까짓 칼 한 자루 벼리는데 돈이 들어 봐야 얼마나 들겠냐만은 비용 절약 자체는 좋은 일이었다. 헤이란에서는 그랑시아 가문의 어음패를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두온은 한동안 여기서 머물다가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대의 이익을 남기며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룬달리안이라는 도시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옆에서 잠자코 듣던 마르야가 입맛을 다셨다.
“부럽다. 헤이란이라니,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뭐야, 안 가게?”
“응.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나는 전사이기 전에 상인이잖아. 이쪽이 우선일 거 같아서.”
그녀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갑자기 달라진 이야기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분명 필레온에서 출발하는 날까지는 반드시 같이 가겠다며 꺅꺅댔었는데.
“미안해. 갑자기 말 바꿔서.”
“뭐 네가 안 가겠다면 별 상관은 없는데···.”
“히히, 그럼 의뢰는 좀 넣어 주라. 무기는 이 대검으로 됐으니까 갑옷이 한 벌 있으면 좋겠어.”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웠으나 이유가 납득이 가는 것이었기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와 가볍게 악수를 나눈 마르야가 풀이 죽어 있는 아데샨에게 다가갔다.
“언니. 일단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같이 여행해서 너무 좋았어요.”
“으응···나도 좋았어.”
“후···필레온에 가기 전까지는 또 땀내나는 남자들이랑만 지내야 하네. 이리 와요.”
“수, 숨 막혀.”
키 차이가 나서 무릎을 살짝 굽혀야 했다. 가슴을 압박당한 아데샨이 켁켁거렸다. 포옹의 감촉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던 마르야가 불현듯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듣지 못할 크기로 속삭였다.
“언니도 고생 좀 하겠네요. 눈치가 어지간히 없는 애라서.”
“마르야, 너···!”
“헤헤. 모를 줄 알았어요?”
아데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르야의 시선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로난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조금은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방금 전에 보초한테 들었는데, 송곳니 술잔이라는 여관이 괜찮다네요. 애초에 인간용 방이 마련된 여관이 거기뿐이라는 거 같기도 하고···오늘은 거기서 하루 묵고 가시는게 어때요?”
“고, 고마워. 그런데 마르야. 언제부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쟤가 이상한 거지. 아···눈이 왜 이렇게 간지럽담.”
마르야는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고는 몸을 떼어냈다. 우연히 로난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갑자기 뭐야? 로난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아데샨과 마주본 마르야가 히죽 웃었다.
“뭐, 누구랑은 달리 짝사랑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네요.”
“으응? 그건 무슨···.”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르야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한 번의 도약으로 짐마차의 지붕까지 도약했다. 탄성이 나올 만한 몸놀림이었지만 수인의 도시라 그런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 필레온에서 보자.”
“그래. 잘 가라.”
지붕에 걸터앉은 마르야가 손을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로난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회답하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카라벨 상단의 행렬은 도시 깊은 곳으로 천천히 멀어져 갔다. 한철이 나는 광산을 먼저 찾아가볼 예정인 듯했다. 상단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던 로난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왜 갑자기 저런대.”
“나, 나는 잘 모르겠어.”
“뭐, 이제부터는 망령의 바다까지 둘이서 가야 하네요. 잘 해 보자구요.”
둘이라는 말에 아데샨이 흠칫거렸다. 거진 스무 날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상황이었다. 표정을 애써 감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오늘은 여기서 묵고 재정비를 하죠. 후, 간만에 침대에서 자겠네.”
헤이란까지는 쉬지 않고 걸어도 나흘이 걸렸다. 작은 마을조차 있을까 의문스러운 객지라 여기서 모든 물자를 보충해서 가야 했다.
로난은 행인들을 붙잡아서 도시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대부분은 인간인 그를 꺼려하며 경계했지만 간단한 설득으로 대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칼자루에 왼손을 얹은 채 수인의 가죽과 짐승의 모피가 재질 면에서 큰 차이가 있을까 물어보는 것이 특히나 효과가 좋았다. 얼추 정보를 추려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으음. 다 좋은데 하필이면 시장이 내일 열린다네요. 피곤한데 일단 증류주 한 잔 하면서 쉴래요?”
“좋아. 저기, 송곳니 술잔이라는 여관이 좋대.”
“그런 건 또 어떻게 아셨대. 그럼 거기로 가죠.”
두 사람은 송곳니 술잔으로 향했다. 조금 구석진 곳에 자리해 있었지만 어렵잖게 찾아갈 수 있었다. 돌로 된 문을 열자 내부에 머무르고 있던 온기가 확 쏟아져 나왔다. 웨어야크가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머리카락과 수염이 북슬북슬한 중년인이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20년 전통을 자랑하는 송곳니 술잔에 어서 오세요. 못 보던 분들이시군요.”
“인간? 맞죠..?”
“하하, 처음 오시는 분들이 한 번씩 하는 질문이죠. 수인 손님분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이렇게 꾸며 봤답니다.”
중년인이 껄걸 웃었다. 인간 차별이 존재하는 룬달리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전략이었다.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스러웠지만 어쨌든 수완이 좋았으니 이십 년이 넘도록 여관 일을 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송곳니 술잔의 1층은 술집으로, 2층은 여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내에는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 몇 개, 주방과 연결된 바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저 구석에서 낄낄거리는 웨어울프 두 마리를 제외하고는 손님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적당한 자리를 고른 두 사람이 막 앉으려는 차였다.
“젠장, 어디서 역겨운 냄새가 나나 했더니 인간들이 왔군.”
“뭐야, 정말이네? 재수가 없으려니까.”
듣기를 바라며 지껄인 크기였다. 로난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렸다. 구석에 앉아 있던 웨어울프들이 로난과 아데샨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 다 한 인상 하는 것이 도시에서 건달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았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웨어울프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뭘 꼬나봐? 한 입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허허.”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웃음을 흘렸다. 저들의 동족을 마흔 마리쯤 썰어죽인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저 멍멍이들을 어떻게 주물러 줄까 고민하던 차였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주인장이 굽신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손님. 자제해 주십시오. 저분들도 같은 손님입니다.”
“주인장은 끼어들지 말고 주방에나 처박혀 있어. 내가 누누히 말했지? 댁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이 도시에서 술을 가장 잘 만들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 그런···.”
주인장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아무래도 인간이 살기에는 썩 좋지 않은 도시 같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서 쳐다보던 다른 웨어울프가 입을 열었다.
“저 둘, 그때 바르사에서 내가 죽인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어. 인간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런가.”
“크헤헤.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그때가 좋았었지. 거기 너희들, 우리가 인간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알아? 이 자식과 나는 무려 송곳니의 밤의 참전 용사라고.”
로난의 얼굴이 굳었다. 바르사라면 다름아닌 아데샨의 고향이었다. 수인들의 반란 사태인 송곳니의 밤에 휘말린 비운의 도시. 변경백령 바르사.
‘시발.’
한순간 불길한 예감이 로난의 목덜미를 스쳤다. 저 이야기가 지금 나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경직된 채 서 있던 아데샨의 입술 사이로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라고?”
“선배, 잠깐···”
말릴 새도 없었다. 아데샨을 중심으로 번져 나온 시커먼 기운이 여관을 뒤덮었다. 정신을 장악하는 그림자의 마나였다. 오감을 자극하는 이질적이고 불길한 기운에, 주인장이 손에 쥐고 있던 국자를 떨어뜨렸다.
“커억···!”
“이···게, 무슨···.”
웨어울프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림자의 마나에 잠식당한 그들은 밀랍 인형처럼 굳어 버렸다. 아무래도 정신 장악이 완전히 통하지 않아서 몸에만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옷 밖으로 드러난 사지의 근육이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젠장. 언제 이렇게 성장한 거야.”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과거 전쟁터에서 느낀 것과 흡사한 수준이었다. 그림자의 마나는 점점 더 그 기운을 더해가고 있었다. 심호흡한 로난이 아데샨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선배. 그만해요.”
로난은 아데샨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로난.”
“손 더럽히지 마요. 그럴 가치도 없는 버러지들이에요.”
두 웨어울프는 호흡 곤란에 빠진 채 컥컥거리고 있었다. 방치했다가는 그냥 저대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나중에 큰 일을 할 사람인데 여기서 흠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
한참이나 그와 눈을 맞추던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그늘이 걷히자 여관에 팽배해 있던 살기가 가라앉았다. 정신 장악에서 풀려난 웨어울프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 망할 인간들이···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죽여 주마!”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대충 눈치챈 모양이었다. 두 늑대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팔을 쳐들며 달려들었다. 손가락 말단으로 삐져 나온 갈고리 모양의 발톱이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이.”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두 웨어울프가 간격 내로 들어오는 찰나 인지하지 못할 속도의 참격이 공중에서 유려한 춤을 췄다.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을 느낀 웨어울프들이 한순간 정지했다. 촤르륵! 뿌리까지 도려내진 손톱 스무 개가 바닥에 쏟아졌다.
“크허어어엉!”
“소, 손가락이!”
스무 가닥의 핏줄기가 솟구쳤다. 뒤늦게 당한 것을 눈치챈 웨어울프들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들은 인간과 다름없이 변한 손을 바라보며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수인의 손톱은 인간의 것과 달리 신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한 번 뽑히면 거의 평생 다시 자라지 않았다. 철컥. 칼을 집어넣은 로난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꺼져.”
“크악! 크아아악!”
웨어울프들은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 생긴지 알 리가 없는 주인장이 벌벌 떨고 있었다.
“개자식들, 도시만 아니었으면 목을 쳐 버리는 건데.”
“···고마워.”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아데샨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숨을 가쁘게 내쉴 때마다 어깨가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겠지. 로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요. 내가 빡돌아서 한 건데요 뭐.”
“···역시 너는 참 착하구나.”
아데샨이 픽 웃었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의자에 앉아 증류주 두 잔을 주문했다. 뽑혀 나온 손톱 스무 개가 발밑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다가온 주인장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 손님들...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아까 나서 줘서 고마워요.”
“그, 그건...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여기 주문하신, 룬달리안 증류주 두 잔입니다.”
주인장이 테이블에 증류주를 내려 놓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돌을 깎아 만든 잔에 담긴 증류주는 과연 웨어울프 건달의 말마따나 제법 때깔이 고와 보였다.
“오, 괜찮은데?”
“저기···나 술은 처음인데.”
“한 입 마셔보고 맛없으면 치워 버려요. 자, 건배!”
“거, 건배···!”
잔이 부딪히며 투명한 술방울이 튀었다. 로난이 막 한 모금을 마시려는 차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많이 변했구나. 몰라볼 정도야.”
“뭐야?”
로난과 아데샨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웬 자리몽땅한 웨어폭스 한 마리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털이 보송보송한 걸로 봐서 아직 어린 놈 같았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이며 물었다.
“너는 뭐냐, 꼬마.”
“이거 서운하구나. 나를 못 알아 보는 게냐?”
웨어폭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로난의 미간이 얕게 찌그러졌다. 저 솜털은 뭔데 아는 척을 하는 거지? 그가 자신도 모르는 연고가 있나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웨어폭스의 작은 어깨 위로 희끄무레한 마나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
문득 강렬한 기시감을 느낀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어디선가 느껴본 마나였다. 기억을 더듬던 로난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세크리트···?”
“오랜만이구나. 로난.”
“이런 니미, 진짜.”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로난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어억!"
화들짝 놀란 주인장이 주방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2년 만에 만난 저주학 교수 세크리트는 씨발 털이 북슬북슬한 수인이 되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