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제이거(1)
#201
행방불명되었던 세크리트는 털이 복슬복슬한 웨어폭스가 되어 있었다. 어이를 상실한 로난과 아데샨이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세크리트가 내려온 것을 본 주인장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오늘치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됐네. 어젯밤에 먹던 게 아직 남아 있어. 방금 전에 소란을 피운 게 혹시 제이거의 끄나풀들이었나?”
“아뇨. 그냥 동네 시정잡배였습니다. 흔하게 있잖습니까. 과거 반란군의 졸개였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친구들.”
“다행이군. 어쨌든 식사는 괜찮다네. 챙겨 줘서 고맙군.”
“별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주인장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대화로 미루어 보건데 세크리트는 이 여관에서 제법 오랫동안 투숙하고 있는 듯했다.
평소라면 제이거가 뭐 하는 작자인지라도 물어봤을 텐데 지금은 그런 호기심조차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빌어먹을, 하얗고 푹신푹신한 꼬리가 세크리트의 등 뒤에서 살랑거리고 있었으니까. 뒷짐을 지며 다가온 그가 능청스레 말을 건넸다.
“제도가 봄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들었지. 큰 일을 해줬어.”
로난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 두 발로 걷는 북극여우가 자신의 교수라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계집애로 변했던 것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이제는 수인이라니. 벙쪄 있는 로난을 바라보던 세크리트가 끌끌거리며 웃었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는군. 그럴 만 하지.”
“···잠깐 기다려 보쇼.”
불현듯 로난은 돌잔에 담긴 증류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과연 북부의 술이라 그런지 제법 도수가 높았다. 증류주가 불을 지르며 지나간 목구멍 안쪽에서 향긋한 바닐라 향기가 어렴풋이 피어났다.
음, 확실히 좋은 술이군. 입가를 닦아낸 로난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족 보행 북극여우는 원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왜소한 어깨 위에서는 여전히 익숙한 마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양 손으로 얼굴을 덮은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그림자의 마나로 인한 정신 착란이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정말로 세크리트였다. 그가 의자를 하나 끌어 와서 테이블에 합류했다.
“아데샨 학생회장도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저, 정말로 세크리트 교수님이신가요···? 이, 일단은 잘 지냈어요.”
“그런 것 같구나. 애인과 이렇게 북부까지 여행도 오고 말이다. 하긴 이 친구가 얼음에 갇혀 있을 때 편지 쓴 것 부터 알아봤지.”
“애, 애인이라뇨, 로난은 그냥···!”
아데샨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뭐라 해명하려 들었으나 옹알이처럼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툭툭 튀어나왔다. ‘아으.” “그러니까.” “우으으.” 같은 것들. 그냥 후배나 친구라고 하면 될 텐데, 왜 저런담.
“그냥···그냐앙···.”
별안간 횡설수설하던 아데샨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목을 껄덕이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려놓은 잔은 텅 비어 있었다.
“푸하···!”
“괜찮아요? 꽤 독할 텐데.”
“으응, 괜찮은 것 같아. 나쁘지 않은데···?”
아데샨이 입을 열 때마다 바닐라 향기가 났다. 무던한 반응을 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음료수에 가까운 포도주 한 모금에 만취하던 에르제베트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째 나보다 잘 마시는 거 같은데. 역시 음주도 재능인 건가.
그들은 아예 술을 병 째로 하나 주문했다. 안주로는 녹인 치즈와 크래커가 나왔다. 아데샨은 증류주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건배도 하지 않고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앞머리를 쓸어넘긴 로난이 다시 세크리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교수님이 왜 여기 있는 거에요? 필레온에는 왜 안 돌아온 거고?”
“사정이 있었지. 그건 차차 설명해줄 테니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하자꾸나. 북부에는 왜 온 게냐?”
“헤이란에 들렀다가 망령의 바다까지 가야 하거든요. 선배는 대장간에 들르는 겸사겸사 저를 도와주러 온 거고요···아 진짜, 그 꼬리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반가워서 그렇단다. 감정에 따라 멋대로 움직여서 제어할 수가 없거든. 나도 수인이 되어 보고서야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지.”
의자 아래로 늘어진 꼬리는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크리트는 귀도 같은 구조로 움직인다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정보를 덧붙여서 알려 주었다. 로난이 다시금 술을 들이키자 세크리트의 눈썹이 꿈틀어거렸다.
“그래도 아직 학생인데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냐? 뭐, 필레온도 아니니 상관은 없다만.”
“안 마시고는 못 버틸 것 같아서요. 어쩌다가 그 꼴이 된 거예요?”
“겨울 마녀의 얼음을 녹일 마법을 찾아서 고대 북부 유적지를 헤매다가 그만 이렇게 되었단다. 유감스러운 사고였지.”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은 있고요?”
“당장이라도 가능하지. 그런데 다시 걸리는 법을 몰라서 당분간은 이대로 지내려고 한단다. 재밌지 않느냐.”
어째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담뱃대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가루 주머니 하나 분량을 통째로 태웠을 테니까. 듣자하니 세크리트의 몸 상태는 2년 전보다 더한 총체적 난국 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인화 저주를 제외한 저주들은 여전히 그의 몸속에 남아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성별 전환과 나이가 변하는 스핑크스의 저주도 여전해서 그는 결과적으로 밤낮이 바뀔 때마다 어려지고 늙어지는 암컷 웨어폭스가 되어 버렸다. 이걸 이제 인간이라 불러도 될지가 의문이었다. 세크리트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단다. 의외로 인간보다 나은 구석이 제법 있어.”
“그러시겠죠. 간지러운 귀를 뒷발로 긁을 수 있다던가 하는 거요?”
“그것도 장점 중 하나지. 괜찮다면 바깥세상의 근황을 좀 들려주려무나. 근 몇 달간은 완전히 소식이 두절된 채 살았거든.”
“···그러죠.”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적인 변화에 질색하기는 했지만 저주를 풀어준 세크리트는 엄연한 은인이었다. 계속 보니까 여자 꼬맹이로 변했을 때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로난은 2년간 헤매던 심상세계 여행기와 깨어난 이후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겨울의 마녀와 로르혼, 얼떨결에 이루어진 황제 알현, 그리고 파르잔의 정상에서 벌어진 다르만과의 결전까지.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세크리트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허, 그 정도로 흉악무도한 조직일 줄은 몰랐군. 헌데 검의 제전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자충수를 둬도 아주 제대로 뒀군 그래.”
“덕분에 각지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알게 됐죠. 지금은 대륙 단위로 지부가 갈려 나가고 있어요.”
“잘 된 일이구나.”
세크리트가 웃었다. 로난은 정보를 전달해준 사실에 흡족해하면서도 이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의 제전에서 열린 그 대사건을 모르다니, 본인의 말마따나 어지간히도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온 듯했다. 넓은 대접에 담긴 술을 핥짝이던 세크리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흐음···그렇다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그 광신도들하고 관련이 있는 걸까. 이거 생각보다 더 일이 심각한 걸지도 모르겠군.”
“음? 룬달리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그래. 정확히는 북부라고 해야겠지. 하필이면 위험한 시기에 북부에 왔구나.”
세크리트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의미심장한 단어를 들은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험한 시기?”
“그래. 괜찮다면 나머지는 내 방에서 하자꾸나. 트인 장소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 말이다.”
별안간 세크리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난은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의아해 하면서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아데샨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선배, 괜찮아요?”
“응···아무렇지도 않아. 맛있다 이거.”
아데샨이 나긋하게 미소지었다. 애교 섞인 콧소리가 말투에 묻어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얌전한 것이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병이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이걸 혼자 다 마신거야?’
거의 스무 잔 가까이 나오는 잔이었는데, 타고난 주당이었다. 전생에는 같이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다. 로난은 은근슬쩍 잔을 입에 가져가는 그녀를 제지했다.
“이제 그만 마셔요. 너무 많이 마셨어요.”
“아앙, 치사해.”
잔을 빼앗긴 아데샨이 볼을 부풀렸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그녀는 장난스러워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요염한 인상을 풍겼다. 그나저나 지금 분명 ‘아앙’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앗, 잠깐.”
그때 아데샨이 갑자기 얼굴을 확 가져다 댔다. 커다란 잿빛 눈동자가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코가 닿을 정도로 좁혀진 거리에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뭐에요?”
“여기 묻었어.”
별안간 손을 뻗은 아데샨이 검지로 로난의 입가를 문질렀다. 손톱만 한 크래커 부스러기가 붙어 나왔다. 아무래도 세크리트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묻은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검지를 입에 넣었다가 뺀 그녀가 교태롭게 눈웃음쳤다.
“아하하, 너도 은근히 덤벙거리는 면이 있다니까.”
실로 도발적인 행동에 로난은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화염 마법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며 까불대던 에르제베트와는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한 술버릇이었다. 세크리트가 꼬리로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아까도 생각했는데, 잘 어울린단다.”
“그런 거 아니에요.”
마른세수를 한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취하는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보는 교수는 수인으로 변했지, 존경해 마지않던 전 상사는 팔자에도 없는 애교를 부리지···물론 후자는 나쁘지 않았다만.
“그럼, 올라가자꾸나.”
어쨌든 로난과 아데샨은 세크리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방은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해 있었다.
방문에는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촘촘해 보이는 마나의 장막이 번들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보안 마법이었다. 문고리를 쥔 세크리트가 특정한 주문을 웅얼거리고 나서야 장막이 사라지며 문이 열렸다.
“지저분하고 누추하지만 들어 오게나.”
“이건···.”
방에 들어선 로난의 눈이 커졌다. 세크리트의 방은 2년 전에 봤던 세파라치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풍겼다. 각종 책과 옷가지, 무언가 휘갈겨 적힌 종이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체모로 추정되는 하얀 털뭉치가 황야의 덤불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인간 전용이라는 문구가 자수된 담요는 저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는데, 안쪽에 작고 사악한 무언가 살고 있을 것 같아서 쉽사리 들출 수가 없었다. 요약하자면 그냥 개판이었다. 방을 전부 둘러본 로난이 입을 열었다.
“···진짜 누추하고 지저분하네요.”
“크흠, 그러게 경고했잖나.”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서 지내면 이 꼴이 나는 거예요?”
아무래도 웨어폭스로 변하면서 생활 습관도 개처럼 변한 것 같았다. 그나마 대소변은 화장실에서 보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취한 아데샨은 이마를 로난의 등에 툭툭 찍어 대며 실없는 웃음만 헤실헤실 흘려대고 있었다. 세크리트가 무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한 달 가량을 여기서 지냈지. 해주 연구와 제이거 일당의 뒤를 추적하느라 바빠서 청소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단다.”
“해주? 제이거?”
제이거라면 방금 전에 주인장하고의 대화에도 등장했던 이름이었다. 세크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근 기승을 부리는 신 수인 연합의 지도자 말이다. 모르는 걸 보니 룬달리안 말고 다른 도시는 안 들른 모양이구나.”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세크리트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벽보를 뜯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큼직한 종이에는 안대를 낀 백호의 면상이 대문짝만 하게 그려져 있었다.
자이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성질 하게 생긴 놈이었다. 초상화 아래쪽에는 [열등 종족의 피로 북부를 씻어내자!]라는 도발적인 표어가 적혀 있었다. 종이를 받아든 로난이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피던 와중이었다.
“거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음?”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수인은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인다는 점을 참작해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전생의 기억을 헤집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이 자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