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제이거(5)
#205
“저 너머에···자이파가 있어.”
“네?”
로난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뷸라 클라지에를 사냥하기 위해 남부로 떠난 자이파가 여기에 왜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자이파가 어떻게 여기 있어요?”
“나도 알아. 하지만···이 기운은 분명···.”
아데샨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정신 장악이 풀린 웨어울프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로난이 거듭 되뇌었다.
“그럴 리가요. 황제 아저씨랑 계약한 것도 있을 텐데.”
애당초 자이파는 이곳에 있는 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그가 황제와 맺은 맹약의 내용에는 북부의 땅을 밟지 않는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수인 동포를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를 어기게 될 경우 자이파는 심장이 터져 죽는다. 일반적인 맹약이 아닌 피의 맹약이었으니까. 따라서 아데샨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다른 마나를 잘못 감지한 것일 터였다. 원숭이도 가끔씩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니까. 헛웃음친 로난이 눈을 감았다.
“기다려 봐요. 내가 볼 테니까.”
“으응. 하지만 로난, 정말로···”
아데샨이 뭐라 말했지만 집중 상태에 들어간 로난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서서히 확장되던 감각이 문 너머로 더듬이를 뻗었다. 머지않아 익숙한 기척을 감지한 로난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었다. 문 안쪽에서는 정말로 자이파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는 전율적인 기세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가 없었다.
‘시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시선을 교환한 로난과 아데샨이 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과 가까워질수록 자이파의 기운은 더 강하게 전해져 왔다. 아데샨이 재차 읊조렸다.
“틀림없어···이건 자이파야.”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이 뭐든 간에 직접 확인해야 했다. 대문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이 각 문고리를 쥐었다.
“열게요.”
“응.”
간단한 신호를 주고받은 그들이 함께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거대한 이중문은 그 덩치만큼이나 무겁고 뻑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풍경에 로난과 아데샨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아?”
생각한 것보다 수십 배는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탁 트여 있었고, 천장은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올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본성의 절반 정도는 이 방을 마련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랑시아 저택에나 있을 법한 화려한 가구와 장식들도 눈에 띄었다. 공간 곳곳을 채우는 사치스러운 물건들은 한순간 그들이 수백 년 묵은 고성채에 왔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벽면의 한쪽에는 황제의 옷을 입은 제이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도 더럽게 큰 사이즈로.
하지만 로난과 아데샨을 경악시킨 건 그런 시시콜콜한 요소들이 아니었다. 완전무장한 수인의 무리가 횡으로 늘어선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을 가로지르고 있는 맹수의 장벽에 로난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니미···.”
족히 쉰 마리는 되어 보였다. 지금껏 상대해 온 잡배들과는 달랐다. 사자나 호랑이, 코뿔소나 순록 등 하나같이 덩치 좋고 싸움깨나 하게 생긴 수인들은 한 명 한 명이 강자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자이파에게만 너무 집중한 탓에 이들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적막이 팽배하던 와중이었다. 어디선가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히햐하하! 당신 말이 맞군, 정말로 놈들이 나를 찾아왔어!”
천박한 것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웃음소리였다. 로난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인들의 장벽 너머, 방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안대를 낀 웨어타이거 한 마리가 어깨까지 들썩여 가며 웃어제끼고 있었다.
흑백의 대비가 선명한 가죽, 저렇게 웃어도 나름의 기품이 느껴지는 잘 생긴 외모. 단번에 그를 알아본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제이거.”
틀림없는 제이거였다. 번지르르한 겉모습은 여전했다. 운명이 바뀌면서 무슨 일이 생기기는 한 모양인지 전생에 비해 월등히 강해진 기척도 눈에 띠었다. 웃음을 멈춘 제이거가 뒷짐을 진 채 입을 열었다.
“크후하하,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알다마다. 네놈이 나를 죽여 신 수인 연합을 해체시키려는 것도, 그러기 위해 본성에 침투한 것도 알고 있었지.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줄 알았나, 응?”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어쩐지 중간부터 인원이 확 줄어든다 싶었는데 역시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제이거가 말을 이었다.
“크흐흐, 너는 운이 참 나쁜 놈이야. 내 친구만 아니었어도 이 제이거 님에게 기습 공격 정도는 감행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포로로 위장해서 침투하는 작전 자체는 좋았거든.”
“친구?”
제이거는 대답하는 대신 천박한 웃음만 껄껄 흘려댔다. 아무래도 중간에 계획을 눈치채고 귀띔해 준 놈이 있는 듯했다. 문득 제이거의 옆에 서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제이거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있는 거한은 얼굴까지 완전히 뒤덮는 암적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인 보초들이 언급했던 ‘조언자’가 저 작자인 것 같았다. 한순간 로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이파?”
가까이서 보니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문 너머에서 감지한 자이파의 기운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로브로 가려진 신체의 윤곽은 자이파의 것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로난이 입을 열었다.
“정말 당신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사실 얼굴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정체가 이미 밝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라 하더라도 이 특유의 흉흉한 기운은 오러처럼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의문과 배신감, 분노가 하나둘씩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나비로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던 자이파에 대한 경고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내 말을 기억해라 로난. 자이파는 위험해.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이 개자식아.”
로난이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도 조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로난과 아데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제이거를 돌아보며 말했다.
“반드시 여기서 죽여야 하오. 내 말을 잊지 마시오.”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낮고 깊은 목소리 또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이었다. 제이거가 꼬리를 이리 저리 휘적여 대며 웃어제꼈다.
“크하하, 걱정 마시오. 나와 내 친위대는 무적이니까. 뭣하면 여기 당신이 준 보물을 쓰면 되지 않겠소.”
“그럼, 가겠소.”
그리 말한 조언자가 등을 돌렸다. 동시에 그의 어깨 위로 세찬 마나의 기류가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뭐?!”
조언자가 발산하는 마나는 맑은 날 올려다본 밤하늘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찰나 로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틀림없이 네뷸라 클라지에의 상징인 점멸하는 마나였다.
‘왜 자이파에게서 네뷸라 클라지에의 마나가···.’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십 개의 절망적인 시나리오가 로난의 뇌리에 번득이고 있었다. 불현듯 조언자가 스크롤 하나를 꺼내들어 펼쳤다. 그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균열처럼 생긴 차원문이 나타났다. 아데샨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로, 로난!”
“젠장, 서라!”
너무나도 충격적인 상황에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일단 잡아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했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주홍색으로 물든 검신이 뽑혀 나옴과 동시에 상대를 끌어당기는 빛무리가 쏘아졌다. 파아아아···! 조언자와 중간에 있던 웨어디어 한 마리가 로난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무슨···!”
“뭐, 뭐야?!”
영문 모를 상황을 맞이한 두 사람이 당혹성을 흘렸다. 로난이 칼자루를 움켜쥐자 검신이 피처럼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조언자가 정말 자이파라면 손속을 둬서는 안 됐다. 로난은 횡으로 한 바퀴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참격이 지나감과 동시에 두 사람의 복부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예리한 파공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퍼억! 웨어디어의 몸뚱이가 위아래로 갈라졌다.
“뮈이이이익?!”
웨어디어의 눈이 커졌다. 허리를 기준으로 분리된 몸뚱이가 바닥에 엎어졌다. 조언자의 로브 위로 선혈이 솟구쳤다.
“크윽···!”
“빌어먹을.”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뼈와 내장을 베어내지 못한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원체 가죽이 단단하기도 했거니와 웨어디어와는 달리 검을 맞는 즉시 몸을 뒤로 뺀 덕이었다. 그가 두 번째 검격을 날리려는 차였다. 콰직! 벼락처럼 날아든 조언자의 발차기가 로난의 가슴팍 깊숙이 파고들었다.
“커어억!”
오우거에게 맞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로난의 몸이 앞으로 굽어졌다. 쾅! 대문까지 날아가서 처박힌 그가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간신히 호흡을 바로잡은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뒈질 뻔 했다.’
배가 관통했다 해도 믿어질 충격이었다. 즉시 칼을 눕혀서 막지 않았다면 죽거나 불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핏덩이를 뱉어낸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조언자가 배의 상처를 부여잡은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로난이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그쪽도 상당히···아팠던 모양이군.”
“감히···!”
아무래도 상처는 저쪽이 더 깊은 것 같았다. 조언자의 발아래로 검붉은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한층 강렬해진 반짝이는 마나가 그의 어깨 위로 일렁이며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발을 묶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썩 좋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방을 채운 수인 전사들이 소란스레 떠들어 대고 있었다.
“맙소사. 디오모가 당했어!”
“바, 방금 저 자식 뭘 한거야!?”
“조심해, 이상한 능력을 쓰는 놈이다!”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하로 양단된 웨어디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피 웅덩이 속에서 번들거리는 동료의 창자는 투우사의 깃발처럼 수인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수인 전사 오십 명이라. 이건 정말 쉽지 않았다. 벙찐 채 상황을 지켜보던 제이거가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한순간 침입자의 칼이 번쩍이더니 조언자와 부하 한 명이 끌려가서 참변을 당했다. 무슨 요술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침입자는 자신의 생각처럼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 빠르게 판단을 내린 제이거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외쳤다.
“저, 저런 흉악무도한 놈을 봤나! 동포들이여, 놈을 갈기갈기 찢어 버려라!”
“크아아아아!!”
제이거의 검지가 로난을 가리켰다. 으르렁거리던 수인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성채가 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데샨이 준 포션을 들이킨 로난이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래서 짐승이 싫다니까.”
다른 게 아니라 귀가 떨어질 것 같았다. 포션을 마시니까 그래도 속이 좀 괜찮아졌다. 송곳니와 이빨로 이루어진 파도가 두 사람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언자나 제이거와 면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파도를 헤치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죄다 죽이면서 가는 건데.
가볍게 신세를 한탄한 로난이 앞으로 뛰쳐 나갔다. 촤아아악!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웨어라이온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뜨거운 피보라가 뺨을 적심과 동시에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