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제이거(6)
#206
“크학!”
앞으로 뛰쳐나간 로난이 사선으로 검을 올려 벴다.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웨어라이온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온천수처럼 뜨거운 피가 얼굴을 적셨다.
“이거 옛날로 돌아간 것 같네.”
피가 묻은 자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생을 떠올린 로난이 피식 웃었다. 설원에서 웨어울프들과 싸웠을 때 그들의 피를 뒤집어쓰게 되면 잠시나마 추위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머리 없는 웨어라이온의 몸뚱이가 넘어지기도 전이었다.
“죽어라! 인간!”
푸확! 어른의 허벅지만 한 뿔이 웨어라이온의 가슴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바로 뒤편에서 달려오던 코뿔소 수인이었다. 무식하기는. 그리 중얼거린 로난이 곧바로 자세를 낮추며 찌르기를 쏘았다. 푹푹푹! 라만차는 코뿔소 수인의 목에 바람구멍을 네다섯 개를 만들고는 빠져나왔다. 다시금 뜨거운 피가 왈칵거리며 쏟아졌다. 태산도 부숴 버릴 기세로 달려오던 코뿔소가 목을 움켜쥐며 넘어졌다.
“억···!”
“이 멍청아, 갑자기 넘어지면!”
달려오던 수인들이 당혹성을 내뱉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방파제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얼빠지게 넘어지는 놈은 없었으나 로난은 그들이 보이는 찰나의 빈틈조차 놓치지 않았다. 선홍빛으로 물든 검이 반원을 그렸다. 퍼벅! 부채꼴로 뿌려진 검기의 물보라가 수인들의 머리에 적중했다.
“커어억!”
“크악!”
뇌를 관통한 예기가 뒤통수를 부수며 빠져 나왔다. 즉사가 세 명, 부상이 두 명이었다. 정확히 미간을 조준하고 쐈음에도 피한 걸 보면 역시 호락호락하게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전생에 상대했던 원주민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적이었다.
“근성을 보여 봐라, 이 털보들아!”
물론 죄다 썰어 죽이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숨을 고른 로난이 기합을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투지를 다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데샨이 아닌 자신에게 주의가 쏠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까지 포로를 조종하느라 심력을 소모한 그녀는 전투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으니.
‘무서운 여자야.’
아데샨은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철편을 이어붙인 채찍은 강철로 된 뱀처럼 움직이며 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벽을 등지고 전투에 임하는 부분에서 그녀가 지난 2년 동안 얼마나 성장한 지 알 수 있었다.
‘빨리 끝내야겠어.’
그래도 머지않아 한계가 닥쳐올 터였다. 잠입해야 하는 탓에 석궁을 챙겨오지 못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본격적인 난전에 돌입한 로난이 칼부림을 하던 와중이었다.
“크읍?!”
불현듯 아찔한 통증이 로난의 하반신을 덮쳤다. 황급히 고개를 내리자 자신의 허벅지를 물고 있는 웨어폭스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달리 체구가 작은 데다 기척을 감추고 접근해서 차마 알아차리지 못했다. 웨어폭스가 이빨을 박아 넣은 채 외쳤다.
“물었다!”
“좋아, 그대로 잡고 있어!”
기회를 노리던 수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곧바로 칼을 고쳐 잡은 로난이 웨어폭스의 머리를 베어냈다. 서걱! 몸이 사라졌음에도 여우의 머리는 로난의 허벅지를 물고 있었다. 수인족 특유의 집요한 근성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귀찮기는···!”
반사적으로 다리의 근육을 강화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따갑고 걸리적거렸지만 떨쳐낼 시간은 없었다. 사람만 한 전투도끼와 철퇴가 정수리와 몸통을 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이번 상대는 육중한 웨어베어 두 마리였다.
“이 나쁜 자식!”
“카노치의 원수!”
둘 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힘이 장사였다. 카노치가 방금 죽은 여우인지, 먼젓번에 죽었던 털보 중 하나인지는 몰라도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난처한 상황에 로난이 대처법을 고민하던 차였다. 한순간 거병을 휘두르던 두 수인의 동작이 정지했다.
“그륵.”
“거헉.”
“뭐야?”
로난의 눈이 커졌다. 역동적으로 달려들던 두 웨어베어는 조각상으로라도 변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로난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서걱. 부드럽게 타원을 그린 검격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두 곰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뒤쪽에서 아데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난···후우, 괜찮아?!”
“아하.”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의문이 해소되었다. 바닥을 뒹굴고 있는 웨어베어들의 눈동자는 아직 흐리멍텅한 잿빛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데샨의 정신 장악이었다.
“고마워요.”
“수가 너무 많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저는 이런 게 익숙해서··· 선배야말로 괜찮아요? 털보들이랑은 별로 사이가 안 좋잖아요.”
“···응. 괜찮아.”
아데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수인들의 송곳니와 발톱이 들이닥칠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싶었다. 어머니와 오빠들을 죽인 이들과 같은 족속들.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거짓말일 터였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고 과거의 그림자에 짓눌려 있다가는 대장군은커녕 그 하급 장교의 자리조차 도달할 수 없었다. 로난이 알려준, 원래대로라면 죽는 날까지 깨닫지 못했을 재능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후우···.”
결의를 다진 그녀가 채찍을 움켜쥐었다. 대부분은 로난이 처리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사소하게나마 도움이 되어야 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수인의 포위망이 다시 좁혀지기 시작했다. 로난이 말했다.
“안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쳐요. 저 혼자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응. 알겠어.”
아데샨이 웃었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치고 나갔다. 다시 벽을 등지고 선 그녀가 채찍을 휘둘렀다. 콰자작! 횡으로 뿌려진 강철의 뱀이 달려들던 수인들을 휩쓸며 지나갔다. 과거 네뷸라 클라지에의 간부에게 노획해온 채찍은 단단한 수인들의 피부도 숙성시킨 고기처럼 찢어발겼다.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를 입은 수인들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갸아아악!”
“빌어먹을, 아프잖아!”
하지만 원체 튼튼한 상대인지라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살상력이 모자랐다. 아데샨이 정신 장악과 채찍을 섞어 사용하며 다섯 명 정도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을 무렵이었다.
“언제까지 네년 뜻대로 될 것 같나!”
갑자기 덩치 좋은 웨어타이거 한 마리가 날아오던 아데샨의 채찍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전완을 휘감은 채찍이 살을 파고들고 있음에도 그는 손을 풀지 않았다. 콱! 웨어타이거가 거칠게 팔을 휘두름과 동시에 아데샨의 몸이 확 끌려갔다.
“이리 와라, 인간 계집!”
“윽···!”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미처 채찍을 놓을 틈도 없었다. 웨어타이거는 자신 쪽으로 날아오는 아데샨을 향해 무릎차기를 날렸다. 후우웅! 한 발 먼저 들이닥친 풍압이 그녀의 앞머리를 젖혔다.
‘늦었다.’
죽음을 직감한 아데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공성추처럼 날아온 무릎이 그녀의 두개골을 박살내려는 차였다. 시야 바깥에서 난입해온 로난이 아데샨을 밀쳐냈다.
“로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웨어타이거의 무릎은 이제 로난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채찍을 쥐고 있는 아데샨의 손을 포개 잡으며 말했다.
“당길게요.”
“뭐?”
로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데샨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렸다. 촤아아악! 채찍에 감겨 있던 웨어타이거의 손이 팔에서 뜯겨 나왔다. 온천수처럼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커허어어엉!!”
간헐천을 연상케 하는 피가 지저분한 절단면에서 뿜어져 나왔다. 외팔이가 된 웨어타이거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로난을 올려본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금빛 잔상이 그의 양팔을 갑옷처럼 뒤덮고 있었다.
흐리멍텅했던 예전과는 달리 형태가 명확한 잔상은 고양잇과 맹수의 앞발을 연상케 했다. 언젠가 바렌에게서 베낀 신체 강화의 오러였다. 방 한구석에 그녀를 내려놓은 로난이 채찍을 돌려주며 말했다.
“빚을 이렇게 빨리 갚을 줄은 몰랐는데.”
“고, 고마워.”
“뭘요. 진작에 이렇게 싸울걸. 역시 힘에는 힘이라니까.”
팔을 붕붕 휘둘러본 로난이 히죽 웃었다. 나바르도제에게 해주를 받은 뒤 일어난 변화였다. 자신의 기술 뿐만 아니라 오러를 베끼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능력 또한 월등히 향상된 것이 느껴졌다.
그가 지나온 곳에는 거칠게 토막난 수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산산조각난 무기의 파편들은 바렌의 오러를 두른 로난이 얼마나 막무가내로 싸웠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중갑을 입은 웨어디어가 숨을 몰아쉬며 질문했다.
“허어억···너···정말로···헉, 인간인가?”
“아마 그럴걸.”
“안타깝군···후우, 동포였다면 자이파 님에게 버금가는 전사가 되었을 텐데···!”
근육으로 뒤덮인 웨어디어의 몸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해 있었다. 숨을 한 번 가다듬은 웨어디어가 뿔을 앞세우며 쇄도해 왔다. 고목의 뿌리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멋들어진 뿔에는 무수히 많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전사로군.”
압도적인 박력에 로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대로 뿔을 자른 칼날은 그대로 웨어디어의 머리와 몸통을 가르며 다리 사이로 빠져 나왔다. 촤아악! 양단된 몸뚱어리가 로난의 양 옆을 스쳐 지나갔다.
“라즈무쉬마저···!”
“가, 강하다.”
철퍽! 좌우로 양단된 수사슴의 주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한결같은 수인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포가 서서히 그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저렇게 잘 싸워?”
맨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제이거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촛불은 수인의 파도를 불사르며 더욱 크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십 명의 수인 정예병은 벌써 절반이 넘게 줄어 있었다.
“이봐, 어쩌지?”
제이거가 로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절대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슬슬 대책을 세워 둬야 할 것 같았다. 조언자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이어지는 침묵에, 제이거가 고개를 돌렸다.
“당신, 내가 지금 묻고 있···허어억?!”
제이거의 눈이 튀어나올듯 커졌다. 분명 방금까지 옆을 지키던 조언자가 사라져 있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는 차원문이 열렸던 잔흔만이 남아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도, 도망을 쳐?!”
제이거의 얼굴이 굳어졌다. 동시에 그쪽을 돌아본 로난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조언자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이파의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빌어먹을, 아무리 난전 중이었어도 눈을 떼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한순간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탓이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제이거를 붙잡아서 심문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때 허둥거리던 제이거가 자신의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의 손에 쥐어져 나온 스크롤의 모습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잠깐, 저거 설마···!”
눈치를 보던 제이거가 스크롤을 펼쳤다. 그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차원문이 나타났다. 최악의 상상이 실현되는 것을 본 로난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도망치는 거냐, 이 겁쟁아!!”
“흥, 전략적 후퇴라는 거다! 친위대, 모두 놈을 막아라!”
제이거의 명령을 들은 수인들이 후퇴를 멈췄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투지를 다진 그들이 다시금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병적이라 해도 좋은 충성심에 로난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 저 개자식을 잡아야 했지만 아직 적이스무 마리 정도 남아 있었다.
“거기 서라!”
쾅! 상황을 살피던 로난이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공중에서 검기를 쏘거나 오러를 발동하려고 했지만, 그와 함께 도약한 열댓 마리의 수인이 사방을 둘러쌌다.
“썅, 저리 안 꺼져?!”
“제이거 님에게는 보낼 수 없다!”
“비키란 말이다!”
악에 받힌 로난이 검을 휘둘렀다. 붉은 선 수십 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인들의 몸 위로 그어졌다. 그가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웨어울프 두 마리 분량의 고깃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허나 질릴 만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제이거의 명령을 받은 수인들은 자석에 들러붙는 철가루처럼 로난에게 달려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놓치는데.!’
인간과는 달리 육중하고 끈질겼다. 송곳니와 이빨의 파도가 발악하듯 몰아치고 있었다. 제이거가 가기 전에 이 덩치들을 제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절망이라는 감정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차였다. 섬뜩한 파장 같은 것이 몸을 훑으며 지나감과 동시에 모든 수인의 몸이 일제히 멈춰 섰다.
“···아?”
한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로난은 황급히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거리를 벌린 그녀가 눈을 부릅뜬 채 수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양쪽 눈 주위로는 핏줄이 울룩불룩 솟아 있었다. 아데샨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새카만 마나의 기류가 방 안에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수인들의 눈동자가 그녀와 같은 잿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설마 하던 대규모 정신 장악이었다. 갑작스런 마비 상태에 빠진 수인들이 당혹성을 흘렸다.
“모, 몸이 안 움직인다···!”
“인간놈들, 무슨 짓을 한 거냐!”
다만 육체의 동작을 멈추는 것이 고작인 듯했다. 수인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쥐어짜 내듯 속삭였다.
“···오래 못 버텨.”
“선배.”
아데샨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오똑한 코 아래로 핏줄기 한 가닥이 흘러내렸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였다. 마나로 강화된 로난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5초만 버텨요!”
콰앙! 그리 외친 로난이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뿜어져 나온 빛무리가 제이거를 감쌌다.
“크윽?!”
빛은 석양을 연상케 하는 주홍색을 띠었다. 예상치 못한 강렬한 섬광에 제이거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분명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차원문이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이런, 제기랄···!”
제이거는 자신이 조언자가 당했던 능력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이미 검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 로난이 눈에 들어왔다. 피하기에도, 받아치기도 늦은 상황이었으나 그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제이거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멍청하긴, 어떤 공격도 틀어막는 방어막이다!”
별안간 제이거가 자신이 차고 있던 목걸이를 잡아뜯었다. 동시에 반짝거리는 마나가 목걸이를 중심으로 폭발하듯 번져 나왔다. 반구형의 장막이 제이거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별의 가호···?”
“으햐히하! 날아가라!”
제이거가 웃었다. 그는 과거 조언자가 이 기술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어떤 흉악한 마법이나 날붙이도 튕겨 내는 방어막은 그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줄 최후의 비기였다.
이제 이 미친 인간이 방어막에 튕겨 멀리 날아가 있는 동안 다시 탈출 스크롤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불현듯 로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있는 게, 나라서 다행이다.”
“뭐?”
영문 모를 소리에 제이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장되던 별의 가호와 로난의 몸이 충돌하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차분하게 쥐고 있던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촤악! 칼날에 닿은 방어막이 좌우로 찢어지며 소멸했다.
“···어라?”
“그게 다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막는 방어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로난이 다시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위기를 직감한 제이거가 허둥거리며 외쳤다.
“기, 기다려라! 잠깐. 그래, 대화로 해결하자!”
임기응변만으로 여기까지 온 그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일단 굴복하는 척을 하고 빈틈을 노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제이거의 반응을 본 로난이 픽 웃었다.
“한결 같아서 좋네, 제이거.”
강해졌을지언정 비굴한 걸 보니 정말로 그가 알던 제이거가 맞았다.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다리는 남겨줄 걸 그랬나. 입속말로 중얼거린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어쩌냐. 이미 늦었는데.”
“···늦어?”
제이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그의 왼팔과 오른쪽 허벅지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납도하는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솟구치는 피분수와 함께 제이거의 팔다리가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