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엘시아(1)
#218
“로난, 당신의 아버지에요.”
엘시아가 말했다. 로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적막이 팽배한 공간에서는 기계장치가 웅얼거리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로난···.”
아데샨은 넋이 나간 로난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달싹였다.
“···내 아버지라고? 구원자가?”
엘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뿌리를 내린 것처럼 굳어 있던 로난의 다리가 드디어 움직였다. 그는 천천히 구원자,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작자가 들어 있는 유리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 수록 더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리관 안에 떠 있는 사내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체격은 평범했지만 몸은 다부진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반신에 뻥 뚫린 구멍이었다. 한 살 배기의 머리만한 구멍은 등에서 가슴을 완전히 관통하고 있었고, 환부 주변은 썩은 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살아 있기는 한 건가?’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중상이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대롱 수십 개가 그의 전신에 줄기처럼 박혀 있었다.
마침내 유리관에 도달한 그가 사내의 앞 방향으로 돌아갔다. 심호흡한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아?”
얼굴을 올려다본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좆같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구원자의 얼굴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이름을 듣거나 보는 것도 불가능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살금살금 뒤따라온 아데샨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로, 로난. 이 얼굴은···!”
“···로브쟁이.”
벙쪄 있던 로난이 혼잣말했다. 구원자의 얼굴은 그를 찔렀던 배신자와 매우 닮아 있었다. 이릴을 연상케 하는 은백색 머리카락은 물속에서 흐늘거렸고, 이목구비는 뚜렷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사실 말이 닮았다는 거지 정말 사소한 부분만 제외하면 그냥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은 눈을 감고 있어 볼 수 없었지만, 로난은 그의 눈꺼풀 아래 있는 눈동자가 자신과 같은 노을색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웠다. 저 귀쟁이 계집이 사실 나를 함정에 빠뜨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눈앞에 있는 것은 배신자였고,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내게 달려드는 거지.
하지만 유리벽 너머로 전해져 오는 기운은 틀림없는 구원자의 것이었다. 고민하던 로난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자이파와 바르카···설마.’
찰나 터르겅 형제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심성은 정반대였지만 그들 또한 생긴 것 하나만은 판으로 찍은 것처럼 닮아 있었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물리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탓에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로난은 구원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입을 열었다.
“···구원자와 배신자는 쌍둥이 형제였군요.”
“배신자? 아하, 아벨을 말하는 거군요.”
“아벨?”
“네. 구원자 님의 형제이자, 등을 찌른 배신자에요. 지금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기도 하고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몇 년간 품던 의문이 단번에 해소되었다. 언제나 배신자나 로브쟁이 같은 별명으로만 불렀지, 실명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라? 그런데 그걸 다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그건···.”
엘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로난이 심상세계에서 과거 구원자의 기억을 체험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로난이 말꼬리를 끌던 와중이었다.
“그리고 잠깐만, 구원자님의 얼굴이 보이시나요?”
“그런데요.”
엘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로난이 구원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점에 대해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그럴 리가···!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엘시아가 로난의 앞에 섰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키가 꽤 작았다. 갑자기 까치발을 든 그녀가 로난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제 눈을 봐요.”
“지, 지금 무슨 짓을···!”
입맞춤이라도 할 것 같은 동작에 아데샨이 기겁했다. 하지만 엘시아는 가만히 로난의 눈동자를 응시할 뿐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일 분 정도 그러고 있던 엘시아가 작게 탄성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왜 그래요?”
“원래 당신은 구원자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야 해요. 이름도 알 수 없어야 하고요.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자께서 당신에게 건 금제니까요. 그런데 이건···.”
엘시아가 로난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조마조마하던 아데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음을 흘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금제가 소멸했어요. 정확히는 불에 탄 것처럼 사라졌어요.”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요?”
“네. 물론 여기까지 올 정도면 저주 한두 개 정도는 해주 하셨을 거라 예상하고는 있었는데 어떻게 이 수준까지···무슨 방법을 쓰신 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바르도제의 얼굴이 머릿속에 번득였다. 그 농염한 드래곤 유부녀는 로난을 눕혀 놓고 자신의 불씨 일부를 뜯어서 저주 하나와 교체해 주었다.
문득 바르카의 함정에 빠져 얼음굴 속에서 싸우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로난은 아운 필라의 마법을 발동했고, 불씨가 심어진 위치에서 강렬한 작열통을 느꼈다.
‘점점 성장할 거라고는 했었는데, 그때 불씨가 커진 건가?’
자세한 건 알아봐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때 사라진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나바르도제의 말마따나 불씨가 성장하며 저주 일부를 태워 버린 것일 터였다.
헌데 이걸 말해도 될지 고민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엘시아에게서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상징인 반짝거리는 마나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누구보다 짙은 농도로.
구원자로부터 힘을 받은 원년 멤버였으니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그래도 의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구원자가 칼에 찔려서 불구덩이에 떨어진 이후의 일을 보지 못하기도 했고.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어···그러게요. 기억이 안 나네.”
“과거의 일을 알게 된 경위를 말해주지 않는 것도 그렇고, 저를 완전히 못 믿는군요. 제가 아직도 네뷸라 클라지에···그러니까 아벨의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는 거죠?”
엘시아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베일 듯 날카로운 추리력에 로난이 주춤거렸다. 엘시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후···이해해요. 먼저 제가 적이 아니라는 것부터 증명하고 넘어가야겠네요. 어떻게 해야 믿어 주시겠어요?”
“으음, 그러니까···.”
로난이 애꿎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마땅한 감별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어색하게 서 있던 아데샨이 입을 열었다.
“그, 로난.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아아. 그러네.”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림자의 마나를 다루는 아데샨은 상대의 거짓말 유무를 감별할 줄 알았다. 이 능력 덕분에 전생의 그녀는 언제나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좋아요. 그럼 여기 엘시아가 거짓말을 하는지 자세히 관찰해줘요. 엘시아, 괜찮아요?”
“네? 그게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엘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데샨의 능력에 대해 설명을 들은 그녀가 감탄을 흘렸다.
“그림자의 마나···그것도 정신 계열이라니. 겉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위험한 힘을 지녔군요.”
“그, 절대로 이상한 짓은 안 할게요. 약속해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디부터 이야기해 줄까요?”
엘시아는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제안을 승낙했다. 로난이 말했다.
“제가 여기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부터요.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맞이했잖아요.”
“당신이 언젠가 여기 올 거라는 사실은 구원자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의식을 잃기 전에 몇 번인가 말씀하셨거든요. 다만 시기는 말씀하시지 않아서, 그때 절벽 위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온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요.”
“그렇다면 갑자기 여기로 끌고 온 것도···.”
“네. 구원자님의 뜻을 그대로 따른 거에요. 로난 님이 찾아오면 먼저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하셨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으셨는데.”
엘시아가 입술을 비틀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아데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로난이 주머니에서 이곳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 지도는 누가 남긴 거죠? 드리무어에 있는 구원자의 방에서 발견한 건데.”
“그건···저도 모르는 물건이네요. 아마도 구원자님이 직접 그려서 숨겨 놨을 거에요. 당신이 찾아올 수 있는 단서를 곳곳에 남겨 놓았다고 하셨는데, 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젠장, 나는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돼요. 본인에 대해 알지 말라고 금제를 걸어놓은 주제에 그런 물건을 만들다니.”
“글쎄요. 사실 구원자 님이 하는 행동 중에는 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제법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름대로의 뜻이 있어서 남긴것 아닐까요?”
로난이 침음을 흘렸다. 이럴 거면 저주는 왜 걸었나 싶었다. 매일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살고 싶어하는 노친네와 비슷한 심리일까. 이번에도 엘시아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좋아요. 하나만 더. 당신은 왜 드리무어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거처를 옮긴 거죠? 불과 오 년 전까지만 해도 일을 했다고 들었는데.”
“구원자 님의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어서에요. 그분은 드리무어를 떠나자마자 이 유적에 자리를 잡았죠. 혼자 조용히 회복하기에도, 아벨의 추격을 피하기에도 그만이었으니까요.”
구원자가 드리무어를 일찍 떠난 이유는 다름 아닌 건강 때문이었다. 과거 아벨에게 찔려서 생긴 상처는 갈수록 그의 몸을 좀먹어갔고, 이제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갔다.
과거에 씨앗을 보관했다 알려진 이 유적은 구원자가 지내기에 더없이 알맞은 은신처였다. 그와 엘시아는 수십 년에 걸쳐서 이곳을 드리무어에 버금가는 요새로 개조하고, 갈수록 약해지는 구원자를 위한 생명유지장치를 만들었다.
“드리무어에 있을 때도 주기적으로 들러서 안부를 살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의 힘으로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악화되셨어요. 그때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죠.”
엘시아는 구원자가 스스로 유리관에 들어간 것이 5년 전, 의식을 잃은 것은 불과 3년 전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그들이 들어와 있는 공간 자체가 생명유지장치라는 사실도 덧붙여서.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가장 찬란하던 시기라는 건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거에요? 발광 뭐시기라는 것도 그렇고, 이런 건 역사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자세한 건 모르지만···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나바르도제 님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고 했어요. 이 세상은 몇 번이고 멸망을 겪었고, 바로 전에 멸망한 세상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별에 닿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죠. 제가 박식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기술 몇 가지를 그분의 어깨 너머로 배운 수준밖에 되지 않아요.”
로난이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나바르도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면 도대체 구원자는 몇 년을 살아왔다는 건가. 엘시아는 추가적인 질문이 없었음에도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확실히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조직에 헌신했었어요. 애착을 두고 교단을 키워나갔죠. 하지만 그것은 구원자께서 조직을 이끄셨을 때에요.”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죠.”
“네. 이전과 같은 조직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죠. 방향성 자체가 달라졌으니까요. 저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저처럼 구원받기를 원해요.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집단에 남아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요.”
엘시아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계획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빡빡이들을 강림시킨다거나 하는 세부적인 사항까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쇠퇴시켜서 뭔가 큰 한방을 먹이려 하다는 점까지는 알고 있었다.
‘아군이군.’
로난은 그제야 안심하고 엘시아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자세한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면 더 의심스러웠을 터였다.
그녀가 겪고 있는 정보의 단절은 죽을 힘을 다해 네뷸라 클라지에를 탈출하고, 중상을 입은 구원자를 찾아서 도망쳤을 때부터 이어져 있었다. 이쯤 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신뢰하기로 마음먹은 로난이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저주를 해주하는 과정 중 하나였죠. 제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구원자의 기억을 봤어요.”
“···구원자 님의 기억을요?”
엘시아가 눈썹을 치켜떴다. 로난은 심상세계에서 보고 겪은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단 과정, 뒤에서 칼을 찔러넣는 아벨, 하이란을 소환하는 엘시아와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격추당한 구원자. 얼어 있던 엘시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세상에. 정말로 보고 왔군요.”
“그 뒤를 하나도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요. 그래서, 저는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으음···그러게요?”
“네?”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그러게요’ 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뭐야, 목적이 있어서 데려온 거 아니었어요?”
“그···말씀드렸듯이 저는 구원자님의 말에 따랐을 뿐이에요. 당신이 오면 데려오라 한 것이 마지막 명령이었으니. 하지만 보다시피 의식을 잃으셔서···.”
엘시아가 침울하게 말꼬리를 끌었다.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어이가 없을 정도의 고지식함이었다.
“그럼 일단 구원자와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는 소리네요. 그런데 저 사람, 살아 있기는 한 거에요?”
로난이 턱 끝을 들어 구원자를 가리켰다. 앞에서 보니 훨씬 더 심각한 부상이었다. 이따끔 코와 입에서 새나오는 거품이 그가 숨을 쉬고는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엘시아가 우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은요. 그런데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얼마나 남았는데요?”
“기껏해야 1년 정도.”
“빌어먹을, 진짜 얼마 안 남았네.”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왜 최후의 전장에서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의식이 있을 때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러서 왔는데도 말 한마디 못 나누는 작금의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병신 같이 느껴졌다.
“···고치는 방법은 없어요?”
“있긴 해요. 딱 하나.”
로난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못 고친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예상 밖의 전개였다.
“그게 뭔데요?”
“쌍둥이 형제인 아벨의 피를 수혈하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