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엘시아(2)
#219
“쌍둥이 동생인 아벨의 피를 수혈하는 거에요.”
“···뭐가 어째요?”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개똥을 주워 먹어야 한다 말했어도 이보다는 덜 당혹스러웠을 터였다. 벙쪄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죠?”
“지금 구원자님의 상처가 낫지 않는 것은 피가 부족해서 에요. 그리고 어떤 종족의 혈액도 저분과는 맞지 않죠. 구원자님이 직접 말씀하신 거니까 틀림없어요.”
엘시아는 아벨이 구원자를 찌를 당시에 자신의 피로 만든 독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힘을 약화시키고 상처를 썩게 하는 독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형제를 쓰러뜨리기 위한 나름의 작전이었다.
그리고 작전은 성공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가던 구원자는 시한부로 전락했고, 위대한 정령사인 엘시아는 병시중이나 드는 간호인이 되었다.
그녀는 구원자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말했다. 닥치는 대로 약재를 구해서 치료제를 만들고, 적성도 맞지 않는 치유 마법을 파고들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개발된 치료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이렇다 할 효과는 내지 못했다. 그녀가 다소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계획을 짜고 있었어요. 아벨의 피를 구할 계획을.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방법이 안 나오더라고요.”
엘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상대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에다 구원자에 비견되는 수준의 검사였다.
그의 피를 취하는 것은 엘시아가 아무리 강력한 정령사라고 하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은거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정체를 드러내서도 안 됐고.
‘어렵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난감한 것과 별개로 엄청난 지극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친부모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헌신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엘시아. 이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네?”
“구원자에게 엄청나게 지극정성이잖아요. 수천 년 동안 옆에서 보필한 걸로 모자라서 지금은 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예 삶의 목적이 된 것 같고. 뭔가 사연이 있을 거 같아서요.”
문득 엘시아라는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니 구원자와 배신자에 대해서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 이 사람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엘시아가 입을 열었다.
“으음···구원자님은 말 그대로 제 인생을 구원해 주셨거든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네요.”
“구원이라.”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임으로서 대답을 회피했다. 아무래도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기에 로난은 굳이 더 캐물어 보지 않았다.
애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들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관심사는 다시 구원자의 치료제 쪽으로 돌아갔다.
피. 피가 필요하다라.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인 제 피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아아. 그 말도 당연히 해 보기는 했는데 구원자님이 별로 내켜 하시지 않았어요. 설령 된다고 하더라도 피가 옅어져서 효과도 덜할 거라는 말도 덧붙이셨고요.”
“그럼 아직 안 해봤다는 소리네요.”
별안간 로난이 자신의 왼팔 소매를 걷어붙였다. 근육으로 다져진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당황하는 엘시아를 보며 말했다.
“뽑아요.”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애초에 구원자님도 자식의 피를 쓰고 싶지 않다고 하셨는걸요.”
“내키지 않다고 한 거지 죽어도 쓰지 말라 한 건 아니잖아요.”
“그건···.”
“엘시아. 나는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해요. 물어볼 게 산더미기도 하고, 아벨의 피를 구할 단서를 알아낼 수도 있잖아요.”
로난의 목소리에는 조바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무리 네뷸라 클라지에를 상대로 승기를 잡았다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리고 이래뵈도 저, 꽤 유능하거든요?”
로난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결해 온 일을 하나씩 간략하게 설명했다. 유세를 부리는 것 같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옹고집을 꼬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브리기아와 테라닐, 바르카 등···로난이 해치운 간부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명의 권한 중 몇 가지를 들은 엘시아가 눈썹을 치켜떴다.
“제국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요? 군인이었어요?”
“뭐, 비슷한 거죠.”
“확실히 그 정도의 위치라면···.”
엘시아가 뭐라 혼잣말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벨의 피를 얻어낼 희망을 찾아낸 것 같았다. 고민하던 그녀가 천천히 주억거렸다.
“좋아요. 한번 해 보죠.”
엘시아가 방을 나섰다. 채혈과 수혈에 필요한 도구를 가지러 가기 위함이었다. 상황을 지켜만 보던 아데샨이 걱정스레 물었다.
“로난. 괜찮겠어?”
“별일이야 있겠어요. 이거 마치는 대로 돌아가요.”
“응? 나는 조금 더 있어도 괜찮은데···그렇게 찾아 헤매던 아버지잖아.”
“아버지가 아니라 구원자를 찾아다닌 거죠.”
로난이 구원자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구원자니,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시자니 거창하게 떠들어 댔지만, 사실 로난에게 있어서 이 사내는 그냥 어머니와 자식들을 버리는 걸로 모자라 저주까지 걸어 놓고 간 개자식이었다.
‘누나가 많이 힘들어했지.’
코흘리개 시절을 떠올린 로난이 혀를 찼다. 물론 심상세계에서의 로난은 구원자의 죽음에 분노하며 아벨과 싸웠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벨이 워낙 십새끼라 그런 거였거니와 이 사람이 아버지인 것을 몰랐을 때였다.
로난이 피를 내어 주는 것은 오직 전생의 대장군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세상을 구해 보겠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엘시아가 돌아왔다.
“준비 끝났어요. 잠깐 와보시겠어요?”
그녀의 손에는 주사기와 대롱을 비롯한, 수혈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끝났다.
천 년이 넘도록 의사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엘시아는 순식간에 로난에게서 뽑은 피를 구원자에게 수혈했다. 바늘자국을 문지르던 로난이 픽 웃었다.
“빠르네요.”
“매번 하던 일이니까요. 기대는 하지 않지만···진척이 있으면 좋겠네요.”
구원자의 오른팔과 이어진 대롱을 따라 피가 들어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매번 다쳐서 흘리기만 했지, 이렇게 정석적인 헌혈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심 기대를 하는 로난이나 아데샨과는 달리 엘시아의 얼굴은 무미건조하리만치 담담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대와 실망을 반복해온 부작용인 듯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죽이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키며 외쳤다.
“저, 저기! 깨어났어요!”
“뭐라고요?!”
로난과 엘시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구원자를 올려다본 그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닫혀 있던 그의 눈꺼풀이 살짝 열려 있었다.
“세, 세상에···! 정신이 드세요?”
불현듯 엘시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격한 반응에서 지금까지 그녀가 해 온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구원자.”
구원자의 눈동자는 예상대로 주홍색이었다. 노을의 색으로 아롱이는 눈동자는 자신과 이릴의 눈을 꼭 닮아 있었다.
로난은 그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로난은 이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배신자의 눈 또한 같은 노을색이었지만 전해져 오는 인상 자체가 달랐다.
어색하리만치 따스하다고나 할까. 소위 말하는 애정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던 엘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구원자 님?”
허나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구원자는 눈만 깜빡거릴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뽑았던 피가 모조리 들어 가도 마찬가지였다. 견디다 못한 로난이 손바닥으로 유리관을 짚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게 내 피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인 것 같았다. 눈물을 닦아낸 엘시아가 씁쓸함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네요. 아무래도 피가 옅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젠장. 어떻게 더 뽑아서 넣어 보면 안 될까요?”
“···죄송해요.”
엘시아의 사과를 들은 로난이 입술을 짓씹었다. 구원자의 말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인간 어머니와 뒤섞인 자신의 피는 이 괴물을 고치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염병···.”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구원자는 여전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만 겨우 뜨고 있지만 의식은 그래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마주보고 있었다. 마음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결론을 내려야 했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엘시아. 우리는 일단 돌아가 볼게요.”
“어라? 이렇게 빨리요?”
“네. 추적의 위험도 있고···아직 북부에 할 일도 남아 있어서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아하,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하이란이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거에요.”
너무 빨리 떠나는 것 같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벨의 피를 구하는데 전념해야 했다.
더군다나 바르카가 죽은 것을 눈치챈 교단이 수색대를 보내기라도 한다면 그만한 낭패도 없을 터였다. 그 망할 호랑이는 일단 주교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으니까.
얼른 할 일을 마치고 자리를 뜬 뒤 몰래몰래 찾아오는 식으로 일을 진행해야 했다. 로난과 아데샨은 즉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엘시아가 말했다.
“참, 말씀드릴 게 있어요.”
“엉? 뭔데요?”
“기억을 읽으셨다면 알리브리헤 님을 아시겠죠. 그분이 용의 도시 아드렌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처럼 교단을 등진 건지는 모르겠지만···어쨌든 그래요.”
“···알리브리헤?”
로난의 눈이 커졌다. 분명히 기억나는 이름이었다. 괴상하게도 의수 만드는 것이 취미인 드래곤은 엘시아와 마찬가지로 네뷸라 클라지에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아벨에게 왼손을 절단당하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다만 그가 아군이 되어 줄지는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당장 아데샨이 들고 있는 채찍도 알리브리헤가 만든 걸로 봐서는 아직도 교단에 몸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이건 굉장히 귀한 정보였다.
“고마워요. 참고할게요.”
“뭘요. 그럼 같이 나갈까요? 하이란을 불러야 하니까.”
세 사람은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로난은 방을 나서기 직전 고개를 돌렸다. 구원자는 여전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괜스레 찝찝해진 로난이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보지 말 걸 그랬다. 노을색 눈빛에서는 여전히 온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작게 궁시렁거리던 그가 툭 내뱉었다.
“조금만 기다리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 떠나는 거였으니까. 작별인사를 마친 로난이 문 밖으로 나섰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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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춥고 어두웠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아래로 녹색 극광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집채만한 독수리를 올려다 보던 아데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걸···아니, 제가 정말로 이 분의 등 위에 올라타도 되는 건가요?”
“그럼요. 하이란은 제 친구인걸요. 이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본인이 말했어요.”
“그, 그럼 감사히 타겠습니다아···.”
아데샨은 로난의 손을 잡고 하이란의 등 위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 것을 본 그녀가 다시 한번 기겁했다.
엘시아가 안장까지 만들어 줬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소를 머금은 엘시아가 손을 흔들었다.
“또 오세요. 아, 제가 드린 건 가지고 계시죠?”
“확실히요.”
로난은 안주머니에 꽂힌 스크롤들을 드러내 보였다. 돌돌 말린 종이뭉치에는 망령의 바다로 직행할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엘시아는 무언가 일이 생기거나 진척상황이 있으면 이걸 사용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네뷸라 클라지에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정리한 서류를 다발째로 넘겨 주었는데, 바르카에게서 캐낸 정보와 취합하면 이번에는 정말로 큰 걸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시아가 하이란과 이마를 맞댄 채 중얼거렸다.
“부탁해.”
-퓌요!
하이란이 날개를 파닥이며 회답했다. 화들짝 놀란 아데샨이 로난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이륙하기 직전, 무언가 생각난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참, 엘시아.”
“네? 왜 그러세요?”
“정작 구원자의 이름을 못 들었는데요.”
하마터면 안 듣고 넘어갈 뻔했다. 엘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그래요? 별로 어려운 이름은 아니에요.”
“뭔데요?”
“카인.”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들렸다. 카인이라. 과연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고 평범한 이름이었다.
“고마워요. 또 올게요.”
“가, 감사했습니···히아아악!”
엘시아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하이란이 날아올랐다. 콰아아아! 폭풍의 황태자는 두세 번의 날갯짓만으로 구름 근처까지 치솟았다. 귓가에서 포효하는 바람이 매서웠다.
“죽이는데···!”
“캬아아악! 히아악!”
이타르간드와 버금가는 승차감이었다. 아데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하이란과 그녀 중에 누가 조류인지 분간이 힘든 수준이었다.
아득히 먼 곳에 아롱이는 불빛이 보였다. 제이거의 부하들이 사라진 대장을 찾는 중인지, 룬달리안의 시가지에서 나온 빛이 여기까지 닿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천천히 퍼덕이는 날개 아래에서는 얼음이 떠다니는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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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맑았다. 극광과 먹구름이 사라진 자리에는 투명한 파란색만이 남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다 너머에서 떠오르는 아침해가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아으으···드디어 도착했네.”
“고, 고맙습니다아.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두 사람은 동이 틀 무렵에 헤이란에 도착했다. 망령의 바다에서 아라단 터르겅의 시체를 수습하느라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었다.
-퓌요오오!
로난과 아데샨을 내려 준 폭풍의 황태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시아에게 돌아갔다. 빠르게 멀어지던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참 시원시원한 새네요. 주인을 닮아서 그런가.”
“그럴지도···.”
아데샨이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씨앗 저장소와 발광 다이오드, 유리관에 들어 있는 로난의 아버지까지. 하나같이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비현실적인 이야기 뿐이었다. 문득 아라단에게 시선이 닿은 그녀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부패되기 전에 묻을 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그러니까요. 아직도 연락이 안 갔나?”
웨어타이거 소년의 시체는 로난의 등에 업힌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여기는 추워서 상관 없었지만 조금만 기온이 올라가면 금새 시체가 썩기 시작할 터였다. 연락이라는 말을 들은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락이라니?”
“그 왜, 제가 여기 오면서 편지 한 통 썼잖···”
로난이 뭐라 말하려는 차였다. 익숙한 기척을 느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설원 저 멀리서 두 사람의 윤곽이 다가오고 있었다. 체격의 차이가 심하게 많이 나기는 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비등비등하게 강렬했다. 로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아하. 황제 아저씨, 자비로우시기도 하지.”
윤곽은 머지않아 뚜렷해졌다. 안 그래도 큰 아데샨의 눈이 더욱 커졌다. 두 윤곽 중 작은 쪽, 그러니까 나비로제가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무슨 꼴이냐, 고양이.”
“드디어 도착했나.”
자이파가 태연하게 기지개를 폈다. 북부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그가 어떻게 여기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심호흡한 로난이 두 사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검성의 아들의 시체를 짊어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