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33화 (233/333)

233. 검은 남자(1)

#233

“맙소사.”

심사관 바나르티에가 탄식했다. 격납고 안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터져 나간 열한 구의 시체가 피바다 속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그가 격납고로 들어온 것은 로난 일행이 심사대를 통과한지 세 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일을 시킨 보초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혹시나 하고 들러 봤는데 이 사단이 나 있었다.

그는 핏자국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각인까지 활성화한 보초들이 일격에 살해당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체 대부분은 로난 일행이 타고온 슬루프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다.

‘대리자의 배 안에 뭔가 숨어 있던 건가?’

잠시 깔끔해졌던 붉은 선풍 호는 다시 피와 내장으로 칠갑된 유령선 꼴이 되어 있었다. 심사관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배의 선실로 들어섰다.

침실, 식당, 선장실을 차례대로 살펴 봤지만 딱히 이렇다 할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랫층의 창고를 살피던 와중이었다.

“이건···!”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창고 한구석에는 검은 얼룩 같은 마나의 잔흔이 남아 있었다. 주의를 깊게 기울이지 않으면 단순히 곰팡이가 핀 것으로 보일 만큼 사소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눈을 쓰는 일을 해왔던 심사관은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어떤 존재가 몸을 감추었던 자취였다.

극히 미미하게 묻어나는 흉악하고 음험한 기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더라도.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 돌아온 건가.”

콰당탕! 심사관은 서둘러 선실 밖으로 빠져 나갔다. 벽에 부딪히거나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격납고를 뛰쳐나온 그가 대기하고 있던 보초들을 향해 소리쳤다.

“비상 사태다! 즉시 폐하께 보고를 올리고 병력을 소집해라!”

****

해가 저물었다. 죽어 가는 땅거미가 건물 사이로 어스름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둑한 밤하늘 아래에서도 아드렌의 광채는 쇠하지 않았다.

바닥 전체가 수정으로 뒤덮인 아드렌의 대광장은 밤하늘 아래에서도 아름다운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거리에 하나둘씩 밝아 오는 조명은 곧 펼쳐질 불야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광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이 인간이었지만 엘프나 수인도 가끔 보였다.

대륙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들만 추려서 마을을 만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나, 솔직히 여기에 살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더럽게 맛있네.”

그의 손에는 거대한 칠면조의 다리가 들려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것이 아주 일품이었다. 양념도 끝내주는 것이 가뭄이 들었던 위장에 내리는 단비가 따로 없었다.

“그, 그러니까···어떻게 이런 맛이···.”

옆에 있던 아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머리 만한 와플을 조금씩 베어 먹고 있었다. 입가에 칠칠맞지 못하게 묻은 크림이 훌륭한 맛을 보증해 주고 있었다.

“호사스러운 도시군. 이런 건 본 적도 없다.”

슐리펜도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자리를 이동하기 전에 고기 스튜 세 그릇을 해치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로난이 말했다.

“그래. 너희도 딱히 수상한 건 못 느꼈다 이거지? 정보도 없고.”

“으응. 아무것도···.”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냐.”

슐리펜의 말을 들은 로난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역시 별다른 정보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도시를 거니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네뷸라 클라지에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얼마 안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도시가 넓군.’

아드렌에 들어선 지도 벌써 수 시간이 지났다. 오늘 내내 한 끼도 먹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아챈 일행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드렌은 말 그대로 탐욕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시민 대부분을 구성하는 종복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그들의 주인인 드래곤이 모은 부의 찌꺼기였다.

드래곤들은 자신의 욕심을 충족 시키고 남은 돈만 아드렌의 복지에 투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드렌은 지상의 어떤 국가도 넘볼 수 없는 풍요를 누렸다.

그 증거로 아드렌에서는 음식이나 옷가지를 비롯한 물건 일체에 돈을 받지 않았다. 상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상 호객을 위한 풍선 인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음식을 먹고 싶거나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신원을 밝히고 물건을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제도처럼 다양한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모자라지도 않았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잘 된 일이지. 시간도 제법 걸릴 것 같은데.”

“으응. 맞아.”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친절하고···상상했던 것과 달라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예상외로 시민들의 인간성도 훌륭했다. 아드렌에 거주한다는 이상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착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필레온에서도 불량 학생이 나오듯이 용의 도시에도 꼴통은 존재하겠지만 아직은 마주치지 못했다.

나바르도제와 관련되었다는 정보를 밝히면 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지만서도. 마지막 살점을 뜯은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번에는 흩어져서 찾아 보자. 자정에 여기서 다시 모이는 걸로.”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서둘러서 일을 해야 했다. 이 와중에도 교단의 흉계는 이어지고 있을 테고, 구원자는 죽어가고 있을 테니까.

“아셀 너는 도서관 쪽을 뒤져 봐. 거기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까.”

“으, 응. 알겠어.”

“슐리펜 너는 용왕이 사는 탑 부근을.”

“그렇게 하지.”

아셀과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으니 별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약속 장소를 지정한 그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대광장을 떠난 로난은 아직 조명이 들어오지 않은 어둑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도시 곳곳에 산재한 여관이나 주점이 그의 담당 구역이었다.

‘최대한 드래곤이 없을 만한 곳으로.’

나름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보초와 심사관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종복이 아닌 드래곤만이 태초의 불씨를 알아볼 수 있는 듯했다.

괜히 들켰다가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 충분히 정보를 수집하기 전까지는 몸을 사려야 했다. 귀하신 드래곤 나리들이 추레한 주점까지 오지는 않겠지.

물론 질문을 자연스럽게 건네기 위해서는 술 한두 잔은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두 시간 가량 거리를 쏘다니던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뭔 놈의 주점이 이렇게 많아?”

먹고 살만 하니 밤에는 술만 퍼마시는 모양이었다. 하긴 술도 안주도 공짜일 테니 이만한 여흥도 없을 터였다. 어쩌다 보니 도시의 서쪽 외곽까지 다다른 로난이 발걸음을 멈췄다.

“···유적지인가?”

그가 자신의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보며 중얼거렸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은 화려한 아드렌의 야경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박물관에 기증해도 될 것 같은 간판에는 ‘술’ 이라는 한 글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일렁이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서는 그래도 장사는 하는 모양이었다.

‘꼼꼼하게 해야겠지.’

의외로 이런 곳에서 알짜배기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로난이 문을 여는 순간 외관만큼이나 중후한 실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술집 특유의 왁자지껄함이 쏟아져 나왔다.

“하하, 그래서 말인데. 어제 내가···.”

“탑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들었는데, 조만간 용왕께서 중대 발표가 있을 거라는군.”

“크···역시 여기 만한 곳이 없다니까.”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의외로 넓고 손님이 제법 있었다. 자리는 바 테이블 앞자리를 포함해서 스무 개였다. 달큰한 술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네. 이 주변에서는 못 보던 얼굴이군. 이리 와서 앉게.”

주인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나긋하게 인사했다. 그는 바 테이블 뒤에서 한창 잔을 닦고 있었다. 테이블 앞자리에 앉은 로난이 술을 주문했다.

“외지에서 왔거든요. 가장 잘 나가는 걸로 하나 주세요.”

“역시 외지인이었군. 그렇다면 우리 가게의 브랜디를 꼭 마셔 봐야지. 용의 도시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산품이니까.”

“거 기대되네요.”

로난이 픽 웃었다. 주인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이 편안한 분위기가 썩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한 잔을 비우면서 자연스럽게 교단과 알리브리헤에 대해 물어보면 될 터였다.

“···음?”

로난이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던 와중이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주인장의 왼팔에 닿았다. 셔츠로 덮여 있는 팔의 움직임은 오른쪽에 비해 아주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영감님, 혹시 왼팔이?”

“으음? 아아, 눈썰미가 좋군.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의수가 맞다네.”

“의수.”

태연하게 대답한 주인장이 유리잔 하나를 로난의 앞에 내려 놓았다. 안쪽에서는 호박색 브랜디가 찰랑이고 있었다. 로난은 의수라는 단어를 되뇌어 말했다.

그가 찾고 있는 간부 알리브리헤는 의수와 의족 제작의 달인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작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이 물었다.

“혹시 누가 그 의수를 만들었는지 아세요? 역시 좀 이상한 질문인가.”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러나. 헌데 하도 예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 으음, 잘릴 때의 아픔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말이지.”

“이크,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정말이지 끔찍했어. 괜찮다면 이야기해줄 수도 있다네. 그러니까···”

주인장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끼이익···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입구 쪽을 돌아본 주인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시게. 행색이 특이한 걸 보니 그쪽도 외지인인가 보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별 싸가지 없는 놈도 있군. 로난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거 죽이는데···!”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만 했다. 이렇게 풍부한 맛이 날 줄이야. 달큰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져 나가는 것이 확실히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그때 다가오던 발소리가 로난의 옆에서 멈췄다. 침묵을 유지하던 손님이 입을 열었다.

“가장 독한 걸로···끅, 얼음은 섞지 마시오.”

“그러지.”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모금을 마시려던 로난의 손이 그대로 허공에 정지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것도 상당히. 그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손님이 옆 자리에 앉았다.

“하, 이게 누구야···찾아갈 수고를 덜었군.”

“너는.”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코트를 걸친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던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이미 어디선가 한 잔 걸치고 온 듯했다.

오로라 스칼의 그 남자였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위압감은 여전했다. 로난이 천천히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긴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긴 남자가 바 테이블에 턱을 괴며 말했다.

“그래···끄윽, 나바르도제는 어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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