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용과 함께(4)
#247
“푸흐, 푸흐흐···이릴 양에게, 전해다오.”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슐리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얀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로난은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슐리펜의 허벅지에 감고 있었다. 지혈하는 내내 그는 슐리펜의 흉내를 내며 낄낄거렸다.
“크흐흐, 피가 묻었으니 한 번 닦아서···이러고 자빠졌네. 니 엉덩이나 잘 닦아 인마.”
“네놈!”
참다 못한 슐리펜이 칼자루를 쥐었다. 잽싸게 반응한 로난이 강제로 그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원래도 완력은 로난 쪽이 더 세기도 했거니와, 다치기까지 해서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크으으으으···!”
“고정하세요 제국의 샛별 님. 지금 일어나면 상처가 도진다고요.”
슐리펜이 침음을 흘렸다. 설마 비장하게 남긴 유언이 놀림거리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차라리 전사하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머지않아 지혈을 마친 로난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가득하던 장난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가 슐리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는 멋졌다. 진짜로.”
“···흥.”
슐리펜이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로난이 히죽 웃었다. 워낙에 상황이 웃겨서 놀려 먹었지만, 그는 슐리펜의 행보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로난은 희생의 숭고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제국의 샛별이니 뭐니 하면서 치켜세워 줘도, 슐리펜은 아직 새파란 애새끼에 불과했다.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았고, 하고 싶은 일도 잔뜩 있을 텐데 동료를 위해 자신을 던지다니, 경의를 표해 마땅한 일이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로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리는 좀 어때.”
“한결 낫군.”
“싸울 수 있냐? 무리 안 해도 돼.”
“싸워야만 하는 걸 알고 있다.”
슐리펜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것처럼.
하긴 레어에 굴러다니는 회복 포션도 주워서 발랐고, 상처가 별로 깊지 않아서 너무 심하게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가볼까.”
“음.”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픽 웃었다. 그들이 아직 교전 중일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콰앙! 남아 있던 대문 한 쪽이 부서지며 익숙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운 얼굴을 본 로난이 손을 흔들었다.
“아, 오르세.”
【여기 있었군. 애송이.】
오르세가 으르렁거렸다. 온몸이 피로 칠갑된 그의 모습은 드래곤이라기보다는 지옥에서 막 기어올라온 악귀 같았다. 흠뻑 젖어 눌어붙은 머리카락은 깊은 바다에서 자라는 해초를 연상케 했다.
머리에 돋아난 한 쌍의 뿔이 안 그래도 흉악한 오르세의 인상을 더욱 사나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아셀이 그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흐아악! 노, 놓아 주세요!”
아셀의 호소에도 오르세는 묵묵부답이었다. 어쩌다가 저런 진풍경이 연출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다리가 풀린 아셀을 오르세가 들고 온 것 같기는 한데.
오르세의 반대쪽 손에는 거대한 뿔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로난은 저것이 아래층에서 만났던 드래곤 여인의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으 시발, 부러뜨린 게 아니라 통째로 뽑아 버렸군. 오르세가 말했다.
【다시 말해 봐라. 치우고 오라고?】
불현듯 그의 왼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퍼석! 쥐고 있던 뿔 위로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져 버렸다.
“아이고, 아까워라.”
로난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드래곤의 뿔이면 모든 장인이 꿈꾸는 소재일 텐데. 오른손에 붙잡혀 있던 아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흐야아아악! 사, 살려줘!”
아셀의 바동거림이 한층 격렬해졌다. 오르세는 말없이 그를 쥐고 있는 손을 놓았다.
“아윽!”
쿵! 아셀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의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온 그가 두 사람의 뒤로 숨어들었다. 로난이 물었다.
“잘 끝내고 왔냐?”
“지, 지옥이야···거기는 지옥이라구. 저, 전부 갈기갈기 찢겨서···!”
아셀은 얼음물에 담갔다가 뺀 사람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마 오르세가 어지간히 도 일처리를 화려하게 한 모양이었다.
자세한 정황을 들었다가는 입맛이 뚝 떨어질 것 같았기에 추가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로난의 시선이 다시 오르세를 향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그는 당장에라도 불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진정해. 상황이 급박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잖아.”
【네 벗의 재주가 너를 살렸다. 두 번의 자비는 없다.】
오르세가 낮게 읊조렸다. 벗이라 함은 아마도 아셀을 칭하는 것일 터였다. 마룡의 눈에 들다니, 저 새끼는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비에 감사하지.”
【···후우우우.】
굳이 속을 긁어서 전설의 마룡과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오르세가 눈을 감은 채 심호흡했다.
로난의 순순한 태도가 그나마 화를 누그러뜨린 듯했다. 저렇게까지 하면서 분노를 삭이는 걸 보니 아직 자신을 살려둬야 할 용건도 남아 있는 것 같았고.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눈을 뜬 오르세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 하얀 놈들이 뭐였는지 설명해라. 왜 내 공격이 통하지 않았는지도.】
“그래. 놈들은 네뷸라 클라지에라는 씹새끼들인데···”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로난은 네뷸라 클라지에와 관련된 정보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놈들의 정신 나간 목적과 용왕과의 동맹, 소위 ‘권능’ 이라 불리우는, 별의 가호를 비롯한 순리를 무시하는 능력들. 오르세가 얼척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네놈 말고는 그 방어막을 뚫을 수 없다는 건가.】
“일단은. 기다리면 사라지기는 하는데, 보통 그 전에 놈들이 너를 죽이려 하겠지.”
【역겹군.】
오르세가 짜증 섞인 동작으로 벽을 쳤다. 콰직! 살짝 때린 것 같은데 음푹 패여 버리는 것이 역시 가공할 힘이었다. 로난이 말했다.
“그러니까 좋든 싫든 우리는 정상까지 같이 가는 수밖에 없어. 나도 네 힘이 필요하거든.”
【빌어먹을.】
오르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존심이 굉장히 상했는지 맥없는 욕지거리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문득 홀린 듯이 그를 보고 있는 슐리펜이 눈에 들어왔다.
“아, 두 사람은 처음 보는 거네. 저쪽은 마룡 오르세야.”
“대화에서 알아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군.”
슐리펜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해 보면 머리 둘 달린 용왕과 그의 비밀 의식을 목격한 시점에서 뭐가 튀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거인을 마주친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슐리펜이 말했다.
“헌데, 정상의 마법진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아무래도 박차를 가해야 할 것 같다.”
“엉? 뭔 소리야?”
“너희와 떨어지고 얼핏 들었다. 정상 쪽에 추가 병력을 배치하더군.”
슐리펜은 교전하던 와중 네뷸라 클라지에의 간부들이 하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오르세가 아드렌을 휘젓고 다니는 걸 알고 있음에도 하늘탑의, 그것도 정상의 보안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진짜 뭐지?’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외부 경계를 더한 것도 그렇고, 용왕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뭔가 수상쩍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박차를 가하다니 어떻게? 슐리펜이 추가되었다 하더라도 적은 너무 많았다. 무작정 썰면서 올라가면 언젠가 도달하기는 하겠지만 한세월이 걸릴 것이고, 바깥으로 가자니 수십 마리의 드래곤에게 요격당해 버릴 터였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로난이 한참을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불현듯 벼락같은 발상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가 나머지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야, 이거 어때?”
“음?”
로난은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지나칠 정도로 과감한 주장에 나머지 셋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아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너는 실제로 하는 걸 봐놓고서 뭘 그래. 기억 안 나?”
얼핏 듣기에는 허무맹랑 그 자체였다. 허나 오르세의 힘과 아셀의 마법, 바람을 다룰 수 있는 슐리펜의 오러의 효과를 생각했을 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어떤 마법의 방해를 받게 된다면 로난 본인이 썰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슐리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군.”
“슈, 슐리펜까지···.”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계획을 곱씹던 그가 마지못해 주억거렸다.
이제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나머지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사실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인물이었다. 오르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웃기지 마라. 내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하지.】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해 보자. 응?”
【자비를 베푼 것이 조금 전이거늘 학습 능력이 없군. 이번에야말로 죽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나란소니아인가 뭔가 하는 여자도 했었는데, 설마 못 할까봐 쫄은 거야?”
결국 로난이 도박수를 던졌다. 제발 이 자식이 드래곤이라는 종족과 자신의 힘에 대한 긍지를 평균 이상으로 지니고 있기를 바라면서.
오르세는 대답하는 대신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짓씹듯이 말했다.
【방자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한순간 주변의 대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르세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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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으으···.”
나란소니아가 눈을 떴다. 오랫동안 잠을 자다 깨어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다섯 명도 한 번에 수용이 가능할 것 같은 큼직한 침대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눈알만 굴려서 주변을 둘러본 나란소니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레어?”
여기는 분명 하늘탑의 31층에 위치한 자신의 레어였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 안을 떠다니는 공기에는 음식과 약품, 피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막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크윽···!”
불현듯 타는 듯한 통증이 나란소니아를 덮쳤다. 시선을 내리자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상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 쇄골부터 배꼽의 오른쪽 아래까지 불그스름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칼에 베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대 옆에서 대기하던 시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 깨어나셨군요···!”
“···그래.”
“괴, 괴로우시겠지만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워낙에 상처가 깊었거든요.”
시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억을 완전히 떠올려낸 나란소니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나는 졌었지.”
“그, 그게···그러니까···.”
“괜찮으니 늘 하던 대로 하거라. 나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이니.”
그녀는 손짓으로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종복들에게 화풀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뭇거리던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알겠습니다. 음식을 가져다 드릴 테니 다시 누워 계세요.”
“그래.”
시녀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물러났다. 나란소니아는 눕는 대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 앉았다. 베일 당시를 회상하던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젠장.”
날붙이가 몸을 파고들던 촉감이 아직도 선명했다. 다시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다. 신기에 가까운 칼솜씨였다.
‘그건 정말로 인간인가?’
이름은 분명 로난이라고 했었다. 수백 개의 강철 가시를 단번에 베어낸 그는 끝내 자신까지 격침 시키고 말았다.
상처에서 오는 고통보다는, 그 일련의 동작을 감지조차 하지 못한 무력감에서 오는 고통이 더 격심했다. 상념에 잠긴 그녀가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갑자기 주위가 잠잠해졌다. 분주하던 시녀들의 발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음···?”
갑작스러운 침묵을 이상하게 여긴 나란소니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모두가 죽어 있었다. 여섯 명의 시녀는 전부 머리 없는 시체가 된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사방에 튀긴 피는 미치광이 화가가 붓을 들고 한껏 난동을 부린 것 같았다. 문득 발치에서 이물감을 느낀 그녀가 시선을 내렸다. 여섯 개의 머리가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무슨···!”
나란소니아가 헛숨을 들이켰다. 시녀들의 얼굴은 모두 일상을 보낼 때처럼 평안했다. 자신이 베인 줄도 모르고 죽은 것 같았다. 그때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란소니아, 맞아?”
조금은 앳된 목소리였다. 나란소니아는 손에서 강철을 뽑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새하얀 소년 한 명이 거기에 서 있었다.
나란소니아의 눈이 커졌다. 틀림없이 용왕을 찾아온 네뷸라 클라지에 측의 사절단 중 한 명이었다. 피가 흥건하게 묻은 대검 한 자루가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이런 건가?】
“맞나 보네.”
동시에 소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위협을 감지한 그녀가 반사적으로 측면으로 몸을 굴렸다. 콰직! 수평으로 날아든 대검이 정확히 그녀가 등을 기대고 있던 자리에 처박혔다.
“오.”
【크윽!】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그녀가 곧바로 자세를 잡으며 일어섰다. 소년은 여유로운 태도로 벽에 박혀 있는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감탄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과연 잽싸네. 제거 명령이 떨어질 만 해.”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너희는 폐하와 협업하는 관계 아니었나?】
“그랬었지. 하지만 이제 몇 시간 뒤면 모든 게 부질없어지거든. 혹시 모를 위험 인자를 제거하는 게 내 임무라.”
소년이 히죽거렸다. 영문 모를 소리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찰나의 빈틈을 포착한 나란소니아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슈아악! 천장에서 자라난 강철 가시가 소년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시전 속도나 의표를 찌른 타이밍이나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가시는 결국 소년에게 닿지 못했다. 콰장창! 허공에서 박살 난 가시가 부서져 내렸다.
【뭐···!】
“와, 위험했네.”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란소니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기괴한 색채로 일렁이는 장막이 그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저것이 가시를 막았다. 나란소니아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콰장창! 세 방향에서 솟아난 가시는 이번에도 소년의 몸에 닿지 못하고 방어막과 충돌하며 부서져 버렸다. 그가 키득거렸다.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마. 이건 단순히 강하다고 뚫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말도 안 돼.】
나란소니아의 얼굴에 뒤늦은 절망이 깃들었다. 대검을 고쳐 잡은 소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한테 죽는 게 차라리 나을 거야. 어차피···세상은 곧 끝나니까.”
그는 먹이를 모는 맹수처럼 다가왔다. 나란소니아가 뒷걸음질쳤다. 뭘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제 죽자.”
소년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는 찰나였다. 콰아아아아앙-!!! 레어의 바닥이 폭발하며 무언가 거대한 것이 튀어나왔다. 장막과 함께 날아간 소년의 몸이 천장을 뚫고 사라졌다.
【뭐, 뭐야?!】
나란소니아가 외쳤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레어를 뒤덮었다.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질 뻔했다. 그의 눈앞에 솟아 있는 것은 시커먼 비늘로 뒤덮인 목이었다. 아름드리나무를 다섯 개는 엮어야 나올 수 있는 굵기의, 거대한 드래곤의 목.
목 위로는 새하얗고 단단해 뵈는 얼음이 갑옷처럼 입혀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때 목이 튀어나온 구멍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얌마,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아이고···머리야.”
“저, 정신 나갈 거 같아···정신 나가 버릴 것 같아아···.”
나란소니아가 얼어붙었다. 틀림없이 자신과 싸웠던 침입자들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천장을 뚫고 사라진 머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에 부딪혔다.】
“뭐? 부딪혀?”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아래쪽의 구멍에서 웬 인간 청년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목을 나무처럼 타고 올라온 청년이 바닥에 착지했다. 나란소니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뭐야, 살아 있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