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격돌(7)
#256
쿠르릉···! 하수도가 진동하고 있었다. 두아루의 폭격으로 말미암은 지진이었으나 감각을 상실한 아지다하카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창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알리브리헤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대화가 끊어진 것을 눈치챈 아지다하카가 질문을 건넸다.
【알리브리헤?】
“아아. 미안하네.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알리브리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수염을 몇 번 쓰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왕으로 등극하던 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네. 나바르도제 님이 후계자에 대한 언질을 남기지 않고 왕위에서 물러나신 탓에 한창 혼란스럽던 시기였지. 그것도 벌써 수백 년 전이군.”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원래 시간은 돌이켜 보면 빠르게 흘러가는 법이지.”
기억을 반추하던 아지다하카가 실소했다. 엊그제처럼 느껴지지만, 제대로 날을 헤아려 보면 까마득한 과거였다.
왕좌가 비어 있는 아드렌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도시도 제대로 굴리기가 힘든데, 오만한 드래곤과 그 종복들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관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능한 지도자가 필수불가결한 상황이었다. 드래곤들은 오랜 토의를 거친 끝에 가장 강한 자가 군주가 된다는, 전통적이면서도 단순한 방법으로 군주를 선출하기로 했다. 아지다하카가 말했다.
【전부 나약한 놈들이었다. 애초에 짐을 제외하고는 자격이 없었어.】
“하하하···그랬을지도 모르지.”
힘 좀 쓴다는 드래곤들은 모조리 용 중의 용으로 군림하고자 피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아지다하카 역시 그 중 하나였고, 보란 듯이 승리를 쟁취했다. 알리브리헤가 껄껄 웃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었지. 힘도 힘이었지만 머리가 두 개라 그런지 확실히 일을 잘하더군. 세 개씩이나 필요했나 싶을 정도로.”
【···닥쳐라.】
“그래 그래. 내가 미안하네. 어쨌든 자네는 그 뒤로도···”
해묵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두 고룡은 절망적인 상황도 잊은 채 추억담을 나누었다. 수십 년 정도는 함께 세상을 돌아다녔던 터라 이야깃거리는 잔뜩 있었다. 알리브리헤가 말했다.
“흔히들 머리가 여럿 달린 드래곤의 탄생은 엄청난 길조로 여겨지지. 날개가 여러 장 달린 것보다 훨씬 더 희귀한 경우니까. 지금 와서 말하지만, 애송이 시기의 나는 자네가 나와 어울려 준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스럽게 느껴졌다네.”
【그대는 다른 멍청이들과 달랐으니까.】
아지다하카가 긍정했다. 실제로 알리브리헤는 자신과 수준이 맞는다 생각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애당초 그는 일족에서 제일가는 천재였으니.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한창 방황하던 시기에 둘이서 나바르도제 님을 찾아갔을 때가 기억나나? 지금처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물어보러 갔었지.”
【그런 일이 있던 것 같기도 하군···.】
“그때 그분이 자네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나?”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아지다하카가 입을 다물었다.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분명 머리를 쓰다듬으며 뭐라 말했었는데.
【아니.】
“나는 확실히 기억한다네. 수많은 동포를 구하고 이끌어갈 위대한 왕, 혹은 세상을 전율케 할 사악한 마룡이 된다고 하셨지. 내 생각에 지금 자네의 모습은, 아무래도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군.”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단지 궁금해서 그렇다네. 그토록 고귀했던 자네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겐가?”
알리브리헤가 물었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점차 무거워지는 눈꺼풀이 다가오는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그냥 시원하게 말하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침묵하던 아지다하카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가 싫었다.】
“으흠?”
【짐은 아드렌을 황금의 도시로 만들었다. 질서를 바로잡고, 동포들과 그 종복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지. 맹세코 내게 주어진 통치라는 숙명을, 단 한 번도 소홀히 여긴 적이 없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 용의 도시가 번영을 이룩한 것은 자네의 공이야.”
알리브리헤가 주억거렸다. 실제로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두 번째 용왕인 아지다하카의 업적이었다.
【그럼에도 신하와 백성들은 짐보다 불의 어머니를 더 존경하더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치워 버리려고 했다.】
“···솔직히 이건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군. 나바르도제 님에 대한 존경은 어쩔 수 없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알리브리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사로운 이유였다. 설마 이런 것 때문에 네뷸라 클라지에와 손을 잡았을 줄이야.
“그리고 동포와 백성의 대다수는 자네를 존경했어. 그것도 마음 깊이 말이지. 조금 낯간지럽지만 자네는 썩 괜찮은 왕이었다네.”
【알고 있다. 알고 있었지만···】
아지다하카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흐려지던 시야는 어둠에 뒤덮인 지 오래였다. 이제는 소리마저 사라져 가는 세상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어쩔 수 없는’에, 지고 싶지 않았다···.】
“허어.”
말꼬리를 끌던 아지다하카가 고개를 떨구었다. 알리브리헤가 작게 탄식했다. 그나마 입술을 달싹거리던 가운데 머리까지 축 늘어져 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죽은 듯이 뻗어 있던 아지다하카가, 피를 토하며 눈을 떴다.
【커어어억-!!】
“이런. 묻었잖나.”
알리브리헤가 혀를 찼다. 재빠르게 피했지만 결국 한 바가지 정도 되는 피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아지다하카가 당황 섞인 투로 더듬거렸다.
【크윽, 크으으으! 갑자기 이게 무슨···!】
갑자기 정체되어 있던 감각이 돌아오며 옆구리부터 통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작아졌던 물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가 하수구의 추레한 풍경을 다시 비추고 있었다. 쿵! 쿵! 어디선가 터져 나오는 진동이 대기를 흔들고 있었다.
점진적으로 심해지던 통증은 이윽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격통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너무 세게 악문 이빨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을 이러지리 뒤틀며 날뛰는 아지다하카의 모습은 비 오는 날 흙 위로 기어 올라온 지렁이 같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알리브리헤가 허허 웃었다.
“아무래도 위쪽에서 자네를 치료하고 있는 모양일세.”
【크흐···치료?】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자네는 괜찮은 왕이었어. 나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군.”
아지다하카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몸통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덩굴 같은 것이 자신의 목을 부드럽게 감싼 채 끌어당기고 있었다.
알리브리헤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간만에 만난 벗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지만 너무 아파서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별이군. 그대가 왜 두 개의 머리를 달고 태어났는지 잘 생각해 보게나.”
【알리···브리헤···!】
“나는 적어도 그것이 증오와 질투를 두 배로 품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알리브리헤가 손을 흔들었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아지다하카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콰아앙! 당기는 힘이 강해짐과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변모했다. 강하게 당겨진 그의 목 세 개가 지면 위로 뽑혀 나갔다.
【허어억!】
아지다하카가 헛숨을 들이켰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휩쓸었다. 상반신을 꽁꽁 묶고 있는 거대한 덩굴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하! 맙소사···!”
“정신이 드십니까?!”
아지다하카가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강철의 용 나란소니아였다, 그녀를 비롯하여 측근을 구성하는 드래곤 열댓 마리가 거기에 있었다.
【무슨···!】
그들은 자신의 상체와 이어진 덩굴의 줄기를 하나씩 물거나 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을 하수구에서 빼내고 치료해준 것이 저들인 것 같았다.
사태를 파악한 아지다하카가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옆구리에 끔찍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거인에게 피격당한 자리를 급한 대로 치유한 흔적 같았다. 나란소니아가 말했다.
“폐하.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워낙에 중상이라 완치는 불가능했습니다. 부디 인간이나 작은 생물로 변하셔서 아드렌에서 탈출하십시오.”
【···탈출?】
“네. 일전의 거인이 아무래도 아드렌을 통째로 추락시킬 생각인 듯합니다. 섬 중앙의 부유석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나란소니아의 왼쪽 날개는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자신의 광선에 당한 상처였다. 그나저나 아드렌을 추락시킨다니, 아지다하카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너희는···.】
“저희는 종복들을 지키러 가야 합니다. 미진하게나마 시간을 벌어볼테니 어서 탈출하십시오. 다행히도 놈은 저희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지다하카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떠오른 채, 지면으로 창을 던져 대고 있는 두아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상에는 웬 희멀건 거인들이 돌아다니며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아직 기운이 남아 있는 드래곤들이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은근히 튼튼한 데다 수가 워낙에 많아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짐은···.】
아지다하카의 입이 나지막이 벌어졌다. 하수도에서 알리브리헤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위대한 왕, 혹은 사악한 마룡이 될 것이라 했던가. 애초에 그게 정말 현실이었는지 분간되지가 않았다. 그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문득, 기절해 있던 세 번째 머리가 눈을 떴다.
【···뭐야, 기절했던 건가?】
【네놈.】
가운데 머리가 된 아지다하카가 그를 노려보았다. 세 번째 머리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그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음···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군.】
【안 된다니, 뭐가 말이냐.】
별안간 두 장의 날개가 서서히 펼쳐졌다. 다행히도 날개는 손상을 입지 않았는지 감각이 건재하게 남아 있었다. 뜸을 들이던 세 번째 머리가 입을 열었다.
【승산이 없다. 일단 물러나서 후일을 도모한다.】
【아드렌이 추락하고 있다는 말은 네놈도 분명 들었을 텐데. 그리고 이 상황에서 짐이 도망친다면 남아 있는 이들은 누가 지킨다는 말이냐.】
【그거야 남은 이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저건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가운데 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란소니아를 비롯한 드래곤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머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 나바르도제가 저놈을 처치해줄지. 그 여자의 성격이면 틀림없이 개입하려 들겠지. 저 괴물을 처치하고 약화되었을 때가 습격할 적기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당연하지. 두 번 묻지 마라.】
세 번째 날개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가 나란소니아를 내려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시간을 벌어라. 그래도 너는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예. 폐하.”
나란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자신이 주장한 바와 같아서 이견은 전혀 없었다. 그때 침묵하던 가운데 머리가 그를 불렀다.
【이봐.】
【뭐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 것만 같았다. 세 번째 머리가 짜증 섞인 태도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악! 갑자기 달려든 가운데 머리가 그의 목을 물었다.
【크하아아악! 무, 무슨 짓이냐!】
세 번째 머리가 포효했다. 가운데 머리는 대답하는 대신 턱에 힘을 더했다. 콰직! 날카로운 이빨이 비늘을 파고들며 피가 튀어 올랐다.
【크으으윽···!】
가운데 머리가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 인격은 달랐지만 같은 몸을 공유했기에 통증은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가 턱에서 힘을 풀지 않고 이야기했다.
【짐이 어리석었다. 아무리 나바르도제를 꺾고 싶었어도 너를 들여서는 안 되는 거였어. 여기서 사라져라!】
【크흐으으···오냐,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기는 했지. 수고를 덜었구나···!】
불현듯 몸을 비튼 세 번째 머리가 가운데 머리의 목덜미를 물었다. 이어서 올라온 두 개의 손아귀가 그의 뿔과 얼굴을 동시에 움켜쥐었다. 두개골이 파괴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괴력이었다.
【커어억!】
【멍청하기는. 이 몸은 이제 내 것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세 번째 머리가 광소를 터트렸다. 예상했던 대로 몸의 통제권을 가진 놈이 훨씬 유리했다.
가운데 머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통을 참는 것. 그리고 이빨을 더욱 깊숙이 박아넣음으로써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밖에 없었다.
왕으로서의 체면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부하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자신과 싸우는 주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세 번째 머리 쪽으로 기울어가던 와중이었다. 뭐라 형용하지 못할 감각이 첫 번째 머리의 신경 한구석을 쿡쿡 건드렸다.
‘이건···!’
알에서 깨어날 때부터 함께해온, 사무치도록 익숙한 감각이었다. 가운데 머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멍청한 건, 네놈이다.】
【뭐라?】
세 번째 머리가 미간을 좁혔다. 시간을 벌기 위한 헛수작이라 판단한 그가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신음하던 첫 번째 머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신의 머리 수조차-】
【헤아리지 못하다니.】
불현듯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번째 머리의 비늘이 확 곤두섰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차였다. 콰직! 사각에서 달려든 오른쪽 머리가 희멀건 목덜미를 강하게 물어뜯었다.
【캬아아아악!】
피가 하늘을 날았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세 번째 머리는 자기도 모르게 턱과 손에서 힘을 풀고 말았다. 가운데 머리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유를 되찾은 그가 세 번째 머리의 턱 바로 아랫부분을 물었다.
【짐의 실책은-】
【여기서 바로잡는다.】
【기, 기다려라! 나바르도제를 꺾고 싶지 않느냐?! 우리의 힘이면 가능하다! 저 이상한 놈만 치우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다!】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세 번째 머리가 처절하게 외쳤다. 지금까지의 면모와는 도통 연상이 되지 않는 추레한 모습이었다. 가운데 머리가 냉담하게 운을 뗐다.
【더는 그런 건-】
【필요 없다.】
【잠깐···!】
두 번째 머리가 말을 맺었다. 세 번째 머리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반대편에서 목을 물고 있던 두 머리가 동시에 몸을 뒤로 뺐다. 촤아아악! 희멀건 비늘이 위아래로 찢어졌다. 세 번째 머리가 목에서부터 뜯겨 나왔다.
“폐, 폐하···!”
지켜보던 드래곤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지면을 적셨다. 이제는 왼쪽 머리가 된 가운데 머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쾅! 지저분하게 뜯겨 나온 세 번째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허어어억!】
【으으음···!】
하얗게 변색되었던 몸통은 다시 아름다운 황금빛을 되찾고 있었다. 기절할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파앙! 폭발하듯 날개를 펼친 아지다하카가 하늘 위로 비상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아드렌의 상공에 울려 퍼졌다.
【고한다! 용의 도시에 기거하는 모든 이는 짐의 명을 받들어라!】
【침입자를 처치하고, 아드렌의 추락을 막아라!】
****
“저, 저리 가!”
【물러나라!】
아셀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힘이 빛의 거인들을 튕겨냈다. 하지만 죽일 만큼 강하지는 않았기에 그들은 금새 몸을 일으켰다.
“고오오옷!”
다시금 자세를 다잡는 거인들의 머리 위로 시커멓고 거대한 꼬리가 떨어졌다. 콰아앙! 꼬리가 다시 들어 올려진 자리에는 안개 같은 빛의 잔흔만이 남아 떠다니고 있었다.
“계, 계속 와요! 어쩌지···!”
아셀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들은 두아루가 깃털을 뿌린지 머지않아 수십 마리의 거인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마나와 삐져나온 오르세의 꼬리를 활용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슬슬 한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이번에는 정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거인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분주히 꼬리를 휘두르던 오르세가 체념한 투로 말했다.
【아깝구나, 마법사야. 나를 버리고 갔으면 너만은 목숨을 부지했을 것을.】
“제, 제가 어떻게 그래요···!”
【딱히 못 할 이유라도 있느냐?】
“저, 저희는 같이 싸웠잖아요···동료를 버리고 가는 짓은···절대로 못 해요.”
하! 오르세가 코웃음을 쳤다. 감히 인간이 드래곤과 맞먹으려 들다니. 매우 괘씸하고 시건방진 소리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동료라.】
오르세가 입가를 비틀었다. 이전부터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재밌는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거인들은 이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까 얼핏 보니 주먹질 한 방에 석벽을 무너뜨릴 정도던데, 아무래도 곱게 죽는 것은 글러 먹은 것 같았다. 어차피 조금 뒤면 아드렌이 추락할 테니 끔찍한 죽음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이이익···!”
【크아아아-!!】
죽음을 각오한 용과 인간이 생의 마지막 의지를 외치던 차였다. 촤아아악! 갑자기 거인들의 몸 위로 붉은 선 수십 가닥이 그어졌다.
“···고오?”
“어?”
거인들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아셀과 오르세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거인들이 몸을 돌리려는 차였다. 파아앙! 몸 위로 그어진 선이 일순 확장되며 그들의 몸뚱어리가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
【이건.】
“고오오···!”
거인들의 형체가 빛으로 화하며 사라졌다. 신기루가 사라지듯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머지않아 빛이 가라앉은 자리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로, 로난!”
“여기 있었냐.”
그리운 얼굴이었다. 아셀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피를 뒤집어쓴 로난의 얼굴은 그 여느 때보다 비장해 보였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극광의 색채를 머금은 참격은 물질과 마법의 결합을 깔끔하게 잘라 놓았다. 그와 오르세를 가둔 감옥이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아윽!”
【네놈···!】
쿵! 풀려난 오르세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위에 타 있던 아셀이 혀를 씹었다. 바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탓이었다. 검을 한 바퀴 돌려 잡은 로난이 입을 열었다.
“둘 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꼴사납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