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57화 (257/333)

257. 격돌(8)

#257

“둘 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꼴사납게시리.”

“로, 로난···!”

아셀이 울먹거렸다. 꼬질꼬질해진 뺨을 타고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빛의 거인들을 썰어 버리며 나타난 로난의 모습은 산등성이 너머에서 터오르는 여명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무사했군.”

그때 또다시 익숙한 윤곽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로난과 함께 떨어졌던 슐리펜은 그 특유의 고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셀은 아예 오르세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슐리펜···! 다, 다행이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온몸에 뒤집어쓴 피나 곳곳에 난 상처에서 그들이 상당한 고생을 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벙쪄 있던 오르세가 입을 열었다.

【···죽은 게 아니었나.】

“그래. 고생은 좆빠지게 했지만.”

로난이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는 슐리펜과 함께 용왕의 부하들에게 뒤쫓기며 몹시 재미없는 시간을 보냈다.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움직이는 드래곤 열한 마리를 따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난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니들도 어지간히 지쳤나 보네. 수가 많을 뿐이지 그렇게 센 놈은 아닌데.”

로난에게 갈가리 찢긴 빛의 거인들은 이제 어스름한 잔광만을 남긴 채 사라져 있었다. 로난이 바닥에 깔린 깃털들을 걷어차며 말했다. 빛 거인들의 뼈대를 이루는 두아루의 깃털이었다.

깃털을 촉매 삼아 피조물을 소환하는 것은 대머리들이 다수를 상대로 싸우거나, 목표 지점의 생명체를 남김없이 쓸어 버리고 싶을 때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아셀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해···마나를 다 써버려서. 오르세 님도···.”

“잘해 줬어. 그래도 나중에는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게 좋을걸. 아하유테 그 새끼가 뿌리는 쫄따구들은 이것들이랑 차원이 다르니까.”

전생의 결전을 떠올린 로난이 입술을 비틀었다. 두아루를 보아하니 거인이라고 능력이 다 똑같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죽인 아하유테는 이것보다 훨씬 더 개좆 같은 소환수들을 뿌려대며 전장을 지옥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창 다루는 솜씨는 직접 겨뤄 봐야 알겠지만. 오르세가 갸웃거렸다.

“아하유테?”

“있어. 쟤 친구.”

로난은 턱 끝으로 두아루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미 밤하늘 저 높이 올라가 버린 그는 별과 다를 것이 없는 새하얀 점으로 보였다.

‘저걸 또 언제 끌어내리냐.’

로난이 혀를 찼다. 저렇게까지 높이 올라가면 상대를 끌어당기는 그의 오러도 닿지 않는다. 그가 뭐라 말을 이으려던 차였다.

“고오오오오!”

“제기랄.”

갑자기 사방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토끼처럼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히, 히이익!”

【지긋지긋하군.】

오르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썰어 버린 것보다 배는 더 많은 거인이 쿵쿵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로난이 슐리펜을 돌아보았다.

“슐리펜.”

“음.”

슐리펜은 말없이 칼을 거꾸로 고쳐 잡았다. 폭풍의 오러가 검신의 표면을 타고 휘감기기 시작했다. 칼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쥔 그가 검을 바닥에 박아 넣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수십 개의 거대한 회오리가 지면을 부수며 솟구쳐 올랐다.

“괴, 굉장해···!”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능력이 강해져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솟구친 회오리들은 주변을 둥글게 감싸며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바람이 멋모르고 달려드는 거인들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고오옥···!”

끝내 회오리를 통과하지 못한 거인들이 입자로 화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일단 지금 몰려온 놈들은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슐리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로난이 다시 아셀과 오르세를 돌아보았다.

“이제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이 진동은 뭐야?”

“으, 응. 그러니까···.”

아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최대한 담백하게 로난의 부재 중에 벌어진 사건을 설명했다. 하늘탑의 붕괴와 용왕의 추락, 그리고 두아루의 사악한 계획까지. 로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아드렌을 추락시킨다고? 이건 또 시발 무슨 소리야.”

“그, 그게···.”

더듬거리던 아셀이 고개를 돌렸다. 자세한 전말을 아는 것은 오르세 뿐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다. 아드렌이 세워져 있는 지반의 중심에는 거대한 부유석이 있지. 지금의 진동은 그것에 손상이 가면서 발생하고 있는 거다.】

“부유석? 그 비공정에 들어가는 마석 말하는 거야?”

【그래. 나바르도제가 구했다고 알려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보물이지. 저 괴물은 그걸 부숨으로서 용의 도시를 통째로 추락시킬 생각이다.】

“니미.”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어쩐지 진동의 형태가 영 이상하다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창을 던져대던 것도 그 때문이었나.

【저 괴물 놈은 부유석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다. 아드렌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만큼 많은 방어 마법이 걸려 있지만, 저런 파괴력이면 뚫리는 건 시간문제지.】

옆에서 듣던 슐리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추락한 아드렌은 산산조각이 나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용의 도시는 멍청한 생선들의 놀이터로 전락해 버릴 터였다.

꽤 웃길 것 같기는 했지만, 진짜로 실현돼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로난이 질문했다.

“막을 방법은 있는 거냐?”

【없다. 부유석에 직접 마나를 주입하면 추락하는 속도가 줄어들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지. 파괴당하는 것 자체를 막아야 한다. 】

그 말을 들은 일행이 두아루를 올려보았다. 그가 저 머나먼 상공에서 창을 던질 때마다 진동이 거세지고 있었다. 콰아아앙! 다시금 저 멀리서 솟구친 빛의 기둥이 밤하늘을 꿰뚫었다.

게다가 두아루는 깃털을 끊임없이 뿌려대고 있었다. 갈수록 세를 불려 가는 빛의 거인들은 빛나는 곰팡이처럼 아드렌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쉽지 않네.”

로난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포위망을 뚫고 접근하는 것이 순탄치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아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들은 머리를 한 곳에 모은 뒤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로난이 먼저 첫 운을 뗐다.

“오르세. 일단 인간으로 변할 수 있냐?”

****

이제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검은색보다는 푸른색에 가까운 하늘은 여명이 머지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아드렌이 해를 볼 수 있는지는 불분명했지만. 뒤를 슬쩍 돌아본 로난이 혀를 찼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구만.”

토막난 거인들의 시체가 빛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못해도 삼백 마리는 썰어넘긴 것 같았다.

“이제 얼마나 온 거지?”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오르세가 대답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그는 다시 장발 남성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르세의 옆구리에는 축 늘어진 아셀이 장바구니처럼 끼워져 있었다. 그가 웅얼거렸다.

“미, 미안해요···늘 이렇게 민폐를 끼쳐서···.”

“상관 없다.”

“좋아. 그럼 계속 가자.”

서로의 얼굴을 한번씩 돌아본 일행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공원으로 조성된 활엽수림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낙엽 사박이는 소리가 나지막이 번지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은 기습이었다. 최대한 두아루와 가까이 접근해서 아셀과 슐리펜이 소란을 일으키고, 곧바로 날아오른 오르세와 로난이 놈을 처리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작전이라는 명칭이 아까울 정도로 단순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쾅!

···콰앙!!

두아루와 가까워질수록 굉음과 섬광이 거세지고 있었다. 부유석이 파손되며 발생하는 진동은 이제 만성적인 두통처럼 지속적으로 아드렌을 흔들고 있었다.

두아루는 아직 일행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혹은 신경 쓰지 않고 있거나. 십 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별안간 숲이 끊어지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가···.”

로난의 눈이 커졌다. 백만 명도 생매장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콰아아앙-!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빛의 창이 구덩이 깊숙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머지않아 빛이 가라앉았다. 구덩이 가장 깊은 곳에서 구슬처럼 맨질한 무언가 빼꼼 정수리를 내밀고 있었다. 아스라이 산란하는 산호색 광채가 제법 아름다웠다.

저 부분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큰데, 전체는 거의 로난이 지내는 기숙사 건물만한 크기일 것 같았다. 오르세가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착했군. 저게 부유석이다.”

“부유석이라고? 저게?”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크다고는 들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였다.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아드렌을 통째로 들어 올리겠지. 부유석을 바라보던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부서지는 게 머지않은 것 같군.”

방어 마법은 파괴된 지 오래였다. 맨질거리는 부유석 위로는 이미 손상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거미집 같은 균열은 두아루의 창이 내리꽂힐 때마다 크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거의 수직선상에 떠 있는 두아루가 보였다.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었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동선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경로였다. 그때 이상한 물체를 포착한 아셀이 눈썹을 치켜떴다.

“저, 저건 뭐지?”

“어엉?”

로난은 아셀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세히 보니 두아루의 주변에서 반딧불이 같은 물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하유테랑 싸웠을 때도 비슷한 걸 봤던 것 같은데? 머지않아 그것들의 정체를 파악한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 씨발.”

반딧불이들의 정체는 날개가 달린 빛의 거인이었다. 깃털에서 태어난 소환수들 중에는 간혹 주인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개체도 있었다.

그들은 파괴에 일조하는 대신 두아루의 주위를 맴돌며 방공망을 만들고 있었다. 아하유테는 저것들도 사람을 죽이는 데 썼었는데, 기분 나쁠 정도로 철두철미한 놈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그때 도시 외곽에서 웬 드래곤 한 마리가 포효하며 날아올랐다. 제법 덩치가 좋은 블루 드래곤이었다. 목소리에 분노와 슬픔이 서려 있는 걸로 보아 소중한 사람을 잃은 듯했다.

“무모해.”

로난이 입술을 짓씹었다. 갖가지 마법으로 자신을 강화한 드래곤은 곧바로 두아루에게 직행하고 있었다. 주변을 맴돌던 빛의 거인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어찌어찌  방어선을 돌파한 드래곤이 튀어나왔다.

【크르륵, 이거 놔라!】

하지만 그의 몸에는 빛의 거인 대여섯 마리가 따개비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아무리 몸을 흔들거나 불을 뿜어 봐도 그들은 굳건하게 버텼다. 비행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그때 몸을 돌린 두아루가 드래곤을 향해 창을 던졌다.

【아···!】

“아, 안 돼!”

아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아아앙! 창이 드래곤의 가슴에 직격함과 동시에 섬광을 동반한 폭발이 일어났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뭉그러진 고깃덩이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빛의 거인들도 함께 사라졌지만, 그 시간에도 두아루는 깃털을 뿌리고 있었으니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낭패로군.”

슐리펜이 읊조렸다.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셀이 당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쩌지? 저렇게 되면···!”

로난은 대답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설마 하늘에도 경계병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렇게 되면 오르세를 타고 돌파하는 난이도가 몇 배는 더 높아져 보였다.

“···뚫고 나가야지 뭘 어쩌겠어.”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뗐다. 인원만 더 있었어도 훨씬 나았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작전 개시를 알리려는 차였다. 별안간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다들 살아 있었나.”

“엉?”

일행이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렸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자리에 웬 거한이 서 있었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당신은···?”

굉장히 기묘한 인상을 주는 작자였다. 다부진 어깨 위에 놓인 얼굴은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풍성한 금발은 우두머리 수사자를 연상케 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한다고 해야 할까, 성별을 도통 분간할 수 없었다. 뭐지, 이 새끼? 문득 그를 위아래로 뜯어보던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런 시발.”

“무슨···!”

옆에 있던 슐리펜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워낙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서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괴한의 어깨 위로는 하늘탑에서 질리도록 경험해 온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스르릉! 뒤로 물러선 로난과 슐리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오르세는 이미 가슴에서 뽑은 창을 꼬나쥐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그의 정체를 알아챈 아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히에에엑! 다, 당신 설마···!”

“폐하. 너무 앞서 가시면 위험합니다!”

그가 막 새된 비명을 터트리려는 차였다. 불현듯 뒤쪽의 수풀이 바스락거리며 익숙한 얼굴이 튀어 나왔다. 반반하게 생긴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강철과도 같은 회백색을 띠었다. 시선을 돌린 아셀이 다시금 기겁했다.

“나, 나란소니아?”

“너희는···?!”

나란소니아가 멈춰 섰다. 그녀의 뒤로는 옷차림이 특이한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전부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검 끝으로 괴한을 겨눈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여기는 무슨 일이냐. 용왕.”

“검을 거둬라. 이제 너희에게는 아무런 적의도 없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