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65화 (265/333)

265. 수습(5)

#265

“그래. 우리는 총공세에 들어갈 거란다.”

“총공세요?”

목소리가 진중했다. 뜬금없는 주장에 로난과 아지다하카가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방금 네 말을 듣는 중에 확신이 섰다. 그 두아루라는 거인은 우리가 드리무어에서 막아내는 괴물들처럼 하늘 너머의 하늘에서 온 존재지. 하지만 다른 괴물과는 달리 누군가 부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찾아오지는 못하는 것 같더구나.”

“아마도 그럴 거에요.”

로난이 긍정했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확신하게 되었다. 거인들은 네뷸라 클라지에 쪽에서 신호를 보내지 않는 이상 오지 못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완전히 뿌리를 뽑고자 한단다. 저런 거인들이 여럿 내려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아드렌을 떠나는 즉시 내 이름으로 회의를 소집할 거란다.”

“그거 멋진데요.”

로난이 휘파람을 불었다. 헛짓거리를 더 하기 전에 문 만드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전략이었다.

사실 로난이 지금까지 해온 것과 비슷한 일이었지만, 나바르도제가 토벌전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되어 아지다하카가 죽거나 완전히 타락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다만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지. 내 부재는 드리무어를 방어하는 데 있어서 치명적일 테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참,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딱! 별안간 로난이 손가락을 튕겼다. 하마터면 잊어버리고 넘어갈 뻔했다. 그가 아셀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셀. 지금 쓸 수 있냐? 별의 가호.”

“지, 지금은 조금 힘들어. 힘을 전해줄 별이 보이면 시도라도 해 보겠는데···.”

아셀이 면목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침 해가 떠오른 하늘에서는 더 이상 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능은 한가 보구나. 이 시발새끼.”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진짜 마법진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더러운 천재 같으니라고.

아마도 천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반짝거리는 마나를 운용하는 조건인 듯했다. 그렇다면 맑은 날 밤에만 쓸 수 있는 건가. 잠시 턱을 매만지던 로난의 머릿속에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아, 내 힘이라도 한 번 써 볼래?”

“응?”

그리 말한 로난이 코어를 전환했다. 맥박치는 간격이 변화하며 심장이 반짝거리는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 이건···!”

“어때, 될 것 같냐?”

로난이 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괜찮은 발상이었다. 그를 위아래로 흩어보던 아셀이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응. 충분할 것 같아. 그러니까···.”

갑자기 아셀이 로난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스아아아···로난의 심장에서 배어 나온 반짝거리는 마나가 그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몸에서 뭔가 쭉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 거대 모기한테 피를 빨리는 것 같았다. 주저 없는 손동작을 본 로난이 피식 웃었다.

“나중에 마르야한테도 한번 해보는 거 어때. 나쁜 마나를 뽑아내 주겠다는 핑계로.”

“그,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까 가만히 있어 줘···!”

아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마침내 필요한 만큼 마나를 흡수한 그가 손을 뗐다. 로난은 체내를 흐르던 마나의 2할 정도가 빠져나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흐읍!”

그때 주문을 웅얼거리던 아셀이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파아앗! 나바르도제와 두 사람의 사이에 벽처럼 평평하고 높은 역장이 하나 솟아 올랐다. 반투명한 막은 특유의 기괴한 색채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평온하던 나바르도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이 깃들었다. 네뷸라 클라지에가 사용하던, 그들을 위협적인 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눈앞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로난이 말했다.

“한번 공격해 보세요. 가벼운 걸로.”

“공격? 여기다 말이니?”

“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로난이 웃으면서 끄덕거렸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아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벙쪄 있던 나바르도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지.”

“자, 잠깐···!”

아셀이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나바르도제의 검지에 붉은 빛이 맺히더니 그대로 쏘아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가느다란 광선은 농가 수십 채는 너끈히 불살라 버릴 화염의 격랑이 되어 방어막에 직격했다.

“히야아아악!!”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아셀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방어막과 충돌한 불의 파도는 그의 양 옆으로 갈라지며 거칠게 급류했다. 머지않아 불이 사그라들자, 생채기 하나 없이 건재한 별의 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그 방어막이군. 대단하구나, 마법사.”

“흐에에···흐윽···!”

나바르도제가 감탄했다. 아셀은 막 태어난 영양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낸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흐으윽···가, 감사합니다아···.”

“여기부터가 중요해요. 잘 봐요.”

별안간 로난이 슐리펜에게 다가갔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슐리펜이 묵묵히 검을 뽑아들었다. 로난은 그의 검신에 팔뚝을 얹은 채 가볍게 잡아당겼다. 스각···자상에서 스며 나온 피 몇 방울이 칼날에 스며들었다.

“한 번 보여줘.”

“그러지.”

나바르도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뭘 보여주려고 자해까지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별의 가호 앞까지 다가간 슐리펜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장막 위로 하얀 선 하나가 그어졌다. 그가 납도함과 동시에 별의 가호는 살얼음이 깨지듯 부서져 내렸다.

“이럴 수가!”

나바르도제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로난은 검지와 중지를 들어 브이 표시를 해 보였다.

“역대 최고의 발견이죠.”

“이건···이건 굉장하구나. 안 그래도 저 방어막을 파훼할 전략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놀란 모양이었다. 혼잣말을 웅얼거리던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예뻐 죽겠다는 눈빛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나바르도제가 그들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대견하다. 정말로 대견해. 틀림없이 이 발견은 세상을 구할 거란다.”

“우웁.”

“화, 화룡이시여···!”

얼굴이 완전히 파묻혀 버린 아셀이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무자비한 양감 앞에서는 언제나 냉철하던 슐리펜조차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최고군.’

오직 로난만이 눈을 감은 채 그녀의 포옹을 음미했다. 인간보다 훨씬 높은 레드 드래곤의 체온은 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몸을 덥혀 주었다. 지난밤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 번만 봐 줘요 아데샨.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는 필레온에서 애간장을 태우고 있을 연인에게 사과를 표했다. 어쨌든 이 발견으로 많은 것이 바뀔 것이 분명했다. 불현듯 가만히 옆에서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지다하카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슬슬 준비를 하러 떠나겠소-】

【자비에 감사하오. 태초의 불이여.】

“그래. 역겨운 존재들의 피를 뒤집어쓰다 보면 허튼 생각 따위는 나지도 않을 거란다. 무운을 비마.”

나바르도제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두 개의 머리를 조아린 아지다하카가 발걸음을 돌렸다. 막 떠나려던 찰나, 갑자기 멈춰선 그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를-】

【살려준 것이오?】

“어지간히도 미련이 남나 보구나. 너와 부하들의 힘이 필요해서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반복된 질문을 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내가 아는 당신은 자애로서 악행을 덮는 자가 아니오-】

【진짜 이유를, 알고 싶소.】

아지다하카가 말했다. 두 개의 목소리에서는 생에 대한 번민이 느껴졌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잿더미가 되지 않은 이유를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세 사람을 끌어안은 채 고개만 슬쩍 돌린 나바르도제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별 거 없단다. 네가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의무?】

“그래. 누가 뭐래건 아지다하카 너는 아드렌의 왕이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왕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지.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무를.”

【그건···당연한 일이었소.】

“그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 또한 네 목숨을 구한 데 일조했지. 상식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보존되기 힘든 가치거든. 어때, 궁금증이 조금 해결되었느냐?”

질문을 들은 아지다하카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예를 표했다.

【···그렇소. 답변에 감사하오.】

“드리무어에서의 일을 끝마쳐도 너는 계속 아드렌의 왕으로 남게 될 것이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떠나거라. 내가 어린날의 너에게 해 주었던 예언을 부디 이루어 다오.”

【허···그걸 기억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지다하카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필히 알리브리헤와 함께 들었던, 위대한 왕이나 사악한 마룡 중 하나가 되리라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체면을-】

【욕보이지 않겠소.】

그리 답한 아지다하카가 이번에는 로난 일행을 돌아보았다. 로난과 시선을 맞춘 왼쪽 머리가 말을 이었다.

【짐의 말은 기억하고 있겠지. 원하는 만큼 챙겨 가거라-】

【아드렌의 구원자들이여.】

“금붙이 한 쪽까지 긁어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쇼.”

로난이 낄낄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지다하카는 두 개의 미소를 남겨둔 채 등을 돌렸다.

나란소니아를 비롯한 측근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영 처량해 보였다. 아셀이 걱정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괜찮을까···?”

“당연하지. 그냥 왕도 아니고 용들의 왕인데.”

로난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워낙에 헛짓거리를 많이 해서 그렇지 아지다하카는 정말로 괜찮은 군주였다. 콧대 높은 드래곤들을 하나로 모아서 구심점 역할을 해먹었다는 자체가 그의 유능함을 증명했다.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을 작자야.”

기절한 오르세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나바르도제가 했던 말을 미루어 보면 네뷸라 클라지에 토벌대의 선봉에 서게 될 확률이 커 보였다.

로난은 그것이 썩 괜찮은 배치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강자들을 병장기로 비유한다면 틀림없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뾰족한 창일 테니까. 기나긴 포옹을 마친 나바르도제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나는 자식들과 뒤처리를 조금 해야겠구나. 안 바래다줘도 되겠니?”

“네. 이타르간드한테 빌린 배가 있어서요. 그거 타고 돌아가죠 뭐.”

“아아, 이르 그 아이가 너희를 도와줬구나. 그렇게 하렴.”

나바르도제가 웃었다. 사근사근한 미소에서, 하늘을 불사르던 드래곤의 면모는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진 로난 일행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짧지만 길었던 여정의 여운과, 앞으로 펼쳐질 전운 감도는 나날이 그들을 상념에 빠지게 하고 있었다.

‘판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투명한 서광이 아름다웠다. 생각을 정리하던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모든 것이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 믿기가 힘들었다.

아드렌에서의 하룻밤은 지난 삼 년에 필적하는 성과를 냈다. 원래 목적은 교주 아벨의 피를 구하는 것이었지만, 그 정도는 잠시 뒤로 밀어내도 될 수준이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음모를 저지했다. 최고 전력 중 하나인 대주교와 날개 달린 대머리를 처음으로 죽였다.

흉계를 꾸미던 용왕은 새사람이 되었다. 아셀은 진정한 살인 기계로 각성했으며, 불의 어머니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완전한 말살을 위해 날개를 펼치리라 선언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큰 수익은, 피를 이용하여 별의 가호를 파훼할 수 있다는 정보였다.

만약 누군가 묻는다면 로난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파괴된 도시와 두아루에게 살해당한 이들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당신들의 희생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었다고.

로난이 말했다.

“긴 밤이었어. 그치.”

“으응···.”

아셀이 옅게 주억거렸다.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던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폐허가 된 도시와 완파당한 하늘탑. 한 곳에 모인 전사자들의 시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두아루의 폭격을 당한 자리에는 별이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먼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재와 먼지의 냄새가 났다.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수다.”

용의 도시에서의 하루가 끝났다. 머지않아 상념을 털어낸 그들은 주위에 널브러진 아지다하카의 재화를 챙겼다. 미리 선언했던 것처럼 금붙이 하나까지 박박 긁어모으지는 않았다. 아드렌을 복구하는 데도 많은 돈이 필요할 테니까.

다행히도 이타르간드의 슬루프는 아드렌의 배수구 안쪽에 얌전히 정박되어 있었다. 적당히 채비와 작별인사를 마친 일행은 곧바로 제도로 복귀했다.

결국 걱정을 이기지 못한 나바르도제가 중간에 도우러 왔기 때문에, 로난 일행은 결과적으로 고작 이틀 만에 필레온의 교정을 밟을 수 있었다.

****

【음?】

하늘이 맑았다. 아지다하카와 그 신하들이 막 드리무어를 향해 날아오르려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이 영 불편해 보이는군 그래.”

【그대는···!】

고개를 돌린 아지다하카의 눈이 커졌다. 어디서 많이 본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아지다하카와 나란소니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의족 하나 안 필요하신가? 날개도 만들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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