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나요
#266
“으윽···빌어먹을···.”
로난이 눈을 떴다. 뇌를 물에 불린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옆으로 뉘어져 있던 몸을 똑바로 돌리자 낯익은 나무천장과 하트 모양으로 박힌 단검 스무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어떤 멍청이가···우웁!”
몸을 일으키려던 로난이 입을 감싸며 구역질했다. 다행히도 내용물은 나오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술 냄새가 났다. 휘청거리던 그가 벽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난은 필사적으로 띄엄띄엄한 지난밤을 떠올렸다. 아드렌에서 돌아오자마자 격무에 시달린 그는 이틀째 저녁이 되고 나서야 아데샨과 특급 모험 동아리의 부원들을 재회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사다난했던 여정에서 돌아온 로난과 아셀, 슐리펜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파티를 열었다. 마르야가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배를 빌려준 이타르간드가 건사를 했다.
인원수가 적지 않았지만 워낙에 건물이 커서 다 같이 놀기에 무리가 없었다. 잔이 부딫힐 때마다 솟구치는 맥주 거품은 노을 지는 날 파도의 포말을 연상케 했다.
···정확하게 거기까지 기억이 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로난이 혀를 내둘렀다.
“징하게도 마셨구만.”
동아리 건물의 내부는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다. 곳곳에 토사물과 술로 이루어진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먹다 남은 안주들은 동사한 주검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람도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술통이 너다섯 개씩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모조리 텅텅 비어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술잔들은 대부분 박살나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만취한 마르야가 악력을 조절하지 못하고 계속 부숴먹던 기억이 났다. 그때 로난의 발치에서 오우거나 낼 법한 신음이 들려왔다.
“우우···우어어···.”
“아 시발, 깜짝이야.”
시선을 내린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브라움이 자신의 대방패를 뒤집은 뒤 그 안에 누워 있었다. 체구에 딱 맞는 것이 그대로 관짝 삼아 묻어도 될 것 같았다. 수염 덮수룩한 얼굴은 여전히 기사보다는 벌목꾼에 어울렸다.
“어떻게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른 부원들도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고결한 그랑시아의 소공작인 슐리펜은 지도와 게시물을 붙이는 코르크 보드에 머리를 처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선 채로 골아떨어진 그의 손에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분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제국이 그려진 지도 위로는 이릴의 초상화가 섬세한 화풍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와중에 잘 그렸네.”
로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징벌병 생활을 거치면서 온갖 진상은 다 봤지만 이런 주사는 또 처음이었다.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향하던 그가 히죽 웃었다.
“해냈구나. 아셀.”
“우웁···우우우···.”
아셀과 마르야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셀은 마르야의 품에 폭 안긴 채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공격적인 그녀의 흉부는 아셀이 정상적인 호흡을 하는 것을 철저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으으음···졸려···.”
“읍···! 으읍···!”
마르야가 뒤척거릴 때마다 아셀의 몸도 같이 움직였다. 연인끼리의 포옹이라기보다는 좋아하는 인형이나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행복해 보였다.
“히히···언니···너무 과감해요···.”
“얘는 또 왜 이래.”
아칼루시아의 영애인 에르제베트는 양갈래 머리(왜 했는지는 모른다)를 한 채 계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아데샨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이 상당히 기분 나빴다.
뱀파이어 오필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유는 기억이 났다. 로난은 아드렌에서 돌아온 첫날 그녀에게 자신의 피와 관련된 비밀을 이야기했다. 세상에서 가장 피를 잘 다루는 종족이기도 하거니와, 원래 연구자 기질이 강한 여자였으니까.
‘거의 집착에 가까운 반응이었지.’
오필리아는 책임 지고 피를 활용할 방법을 알아내겠다며 그녀의 성으로 떠나갔다. 샘플로 쓴다며 피를 잔뜩 뽑아갔는데, 어쩌면 그것 때문에 평소보다 더 취한 것 같기도 했다.
【크커어어억! 커어억!】
“뺘우우···뺘웅···.”
이타르간드는 건물 바깥에 있는 훈련장에서 본모습으로 변한 채 골아떨어져 있었다. 번들거리는 그의 비늘에는 부원들이 한 것으로 추정되는 낙서가 엉망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의 널찍한 등 위에는 시타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잘 놀았다.”
별안간 그들을 둘러보던 로난이 실소를 머금었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평소에 일과 학업에만 열중하던 놈들이라 그런지 이번에 제대로 고삐가 풀린 듯했다.
‘가끔은 이럴 때도 있어야지.’
실컷 놀았으니 이제 다시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엊그제 밤을 새서 정리한 자료를 각지에 보냈으니 오늘쯤이면 뭔가 반응이 올 터였다.
그가 세수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던 와중이었다.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로난이 제자리에 멈춰섰다.
‘아데샨은?’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잊고 있었다. 아데샨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잔뜩 취해서 교태를 부리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먼저 돌아간 건가?’
학생회장이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이 막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주방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이건···.”
속이 뒤집히는 와중에도 입맛이 돋아났다. 홍합을 비롯한 해산물로 탕을 끓이면 나는 냄새였다.
로난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주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물 끓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을 열자 앞치마를 두른 채 솥단지 앞에 서 있는 아데샨이 보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부스스하게 떠 있었다.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데샨.”
“아, 로난. 일어났어?”
그를 돌아본 아데샨이 싱긋 웃었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사근사근한 미소였다.
“아침부터 뭐 해요? 피곤할 텐데.”
“으응. 그냥 다들 힘들어하는 것 같길래. 속을 좀 풀면 좋을 것 같아서.”
“허.”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분명히 술은 같이 마셨을 텐데 이 아가씨는 숙취도 없는 모양이었다. 국자를 내려놓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더 자. 아직 완성되려면 조금 남았으니까.”
“됐어요. 슬슬 일어나야지. 뭐 도와줄 거 없어요?”
“응. 정말로. 그런데 안 졸리면 나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별안간 아데샨이 말꼬리를 끌었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것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뭔데요?”
“그···어젯밤, 기억해?”
“왜 그래요, 뭐 실수라도 했어요?”
“시, 실수라면 실수일까···? 그···너도 알지만 내가 술이 들어가면 좀 내키는 대로 군다 해야 하나? 제멋대로가 되잖아. 그래서어···.”
아데샨은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뒤 부모의 반응을 살피는 아이처럼. 로난이 기억을 회상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알아듣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솔직히 네 잘못도 있어. 일단 너무 오랜만에 만났고···가, 갑자기 덥다고 웃옷을 벗는 건 반칙이잖아···아니, 아니야. 역시 내 잘못이지. 연장자가 되서는 정말, 아아···!”
“으음···어젯밤이라.”
로난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각 같은 단면만이 듬성듬성 남아 있을 뿐,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냥 술 마시고 뻗은 것 같은데. 마침내 결론을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안 나는 것 같아요.”
“···정말로?”
“네. 정말로.”
“하아아아···! 그럼 됐어. 다행이다, 응.”
아데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졌다. 이해 못할 행동에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아데샨의 턱을 붙잡고 잡아당기며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
아데샨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머지않아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얼굴이 재차 가까워지던 차였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오자마자 신났구나. 누가 보면 신혼부부인 줄 알겠어.”
“끼아악!”
아데샨이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와 부딫힌 접시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손을 뻗은 로난이 바닥에 충돌하려는 접시를 아슬아슬하게 붙잡았다.
“젠장, 놀랐잖아요.”
“훼방 놓을 생각은 없다만 때와 장소는 가리는 편이 좋을 거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학생 회장이 일반 학생과 문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너무 재밌어질 테니까.”
“알았어요, 알았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니까요.”
주억거리던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제복 차림의 나비로제가 동아리 건물의 문간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교관님.”
“요리 솜씨가 나쁘지 않구나. 스승만 쏙 빼놓고 잔치를 벌이다니, 야속하기도 하지.”
“유치하게 왜 그래요 진짜. 어제까지 출장이었잖아요.”
그녀는 어젯밤에 안주로 먹다 남은 닭다리를 집어 먹고 있었다. 나비로제와 마주친 아데샨이 벌레를 쫓는 듯한 손동작을 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무, 문란한 관계라뇨! 저희는 그런 게···”
“안다. 네가 그럴 리가 없지. 그래서 목에는 모기라도 물린 건가, 아데샨?”
“핫···!”
아데샨이 헛숨을 들이켰다. 원래 붉어져 있던 얼굴이 한결 더 달아올랐다.
아데샨은 빠르게 손바닥으로 목을 덮었지만 로난은 이미 봐 버리고 말았다. 나비로제의 말마따나 하얗고 기다란 목덜미에는 빨간 자국이 한두 개 남아 있었다.
“이, 이건···그러니까 이건요···!”
“참 큰 모기군. 아직 날이 추운데 튼튼하기도 하지.”
나비로제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실실 웃으며 아데샨을 놀려댔다. 로난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시발, 저거 설마 내가 한 건가?
“···죄송합니다.”
결국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아데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밤의 일을 물어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로난이 속삭이듯 물었다.
“제가 뭐 했어요? 설마 이렇고 저런 것까지···.”
“쉿, 조용히···!”
아데샨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주의를 주었다. 아무래도 술김에 단단히 실수를 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다섯 번째 닭다리를 해치운 나비로제가 말을 이었다.
“뭐, 잡설은 여기까지 하지. 준비가 되는 대로 필레온 대광장으로 오도록.”
“그러죠. 저희 둘만요?”
“여기 있는 모두. 교장님이 전교생을 대상으로 할 말이 있으신가 보더군.”
“엥? 전교생을?”
로난과 아데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졸업식이나 축제 같은 대형 행사를 제외하고 전교생을 모두 소집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나도 잘 모르겠군.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어쨌든 정오까지 모이시라 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나비로제는 애초에 그 정보를 전달해 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다소 천박한 농담으로 아데샨의 얼굴을 다시 한번 달아오르게 한 뒤 등을 돌렸다. 벙쪄 있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
아데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생회장인 그녀조차 따로 전달받은 게 없는 듯했다. 아무튼 까라면 까야 했기에, 로난은 부원들을 모조리 깨운 뒤 세면대로 향했다.
“잘도 이런 놈의 키스를 받아줬군.”
거울 속의 자신을 본 로난이 픽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 웬 원시인 하나가 서 있었다. 내가 아데샨이었다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것 같은데.
그는 머리를 감기 위해 상의를 벗었다. 문득 대야에 물을 받던 로난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쇄골부터 목덜미 쪽에 모기가 물고 간 것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이건 또 뭐야?”
어쩐지 아데샨의 목에 남아 있던 것과 상당히 비슷해 보였다. 오 분도 안 되어 씻는 것을 마친 로난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필레온 아카데미의 대광장에는 이미 전교생이 다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