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68화 (268/333)

268. 대회의(2)

#268

【그럼 바로 회의를 시작하지. 의제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척결이다.】

나바르도제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로난과 그 일행을 대할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참가자들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닷새 전에 아드렌에서 벌어진 비극은 그대들 모두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찬란함을 자랑하던 용의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지. 목숨을 바쳐 맞서 싸운 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거인은 대륙 본토로 창을 돌렸을 거다.】

나바르도제는 간단하게 당시의 일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참가자들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회의 전에 미리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당혹을 감출 수 없었다.

두아루의 강림은 대륙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과거 검의 제전에서 다르만이라는 네뷸라 클라지에의 일원이 유사 거인으로 변신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는 차원이 달랐다.

용왕 아지다하카는 다리를 잃었고, 거주하는 드래곤들이 삼 할 이상 전사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이자 국가는 부유하는 폐허로 전락해 버렸다.

【책임을 통감한다. 아무리 다른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좌시했어. 나는 이번 기회에 그 광신도 무리를 대륙에서 완전히 뿌리뽑고자 그대들을 불렀다.】

“하오나, 그런 기묘한 힘을 다루는 적을 어찌 척결하겠습니까?”

그때 익숙한 노인 한 명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로난도 익히 아는 파르잔의 장로 알로긴이었다.

파르잔의 정상에서 치명상을 입고 껄떡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다행이도 이제는 완전히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저와 원로들은 검의 제전 이후 온 대륙에 광신도들을 주의하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실제로 제국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와 집단이 저희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대적인 소탕에 나섰지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그 방어막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알로긴이 긍정했다. 몇몇 이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거의 모든 토벌대는 난관을 겪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또한 바보들만 모여서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며칠 간은 효과를 어느 정도 거두었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상대 병력에 대응하는 체계를 본격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일반 신도 중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별의 가호를 다루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소위 ‘껍데기’라 불리우는 그 특수 병력은 지부의 규모를 불문하고 최소 두세 명 정도씩 배치되어 있었다. 토벌대는 가호가 소진될 때까지 병력을 갈아 넣어야 했고, 그것은 너무나도 큰 손실로 이어졌다. 자이파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없군. 그냥 잠시 방어막이 사라졌을 때 때 베어 버리면 되는 것을.”

“입 다물어라. 고양이.”

의자 뒤로 손을 뻗은 나비로제가 그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물론 독자적으로 파훼법을 체득한 자이파나 나비로제같은 괴물이 있다면 쓸데없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허나 그런 기술과 노련함을 갖춘 이들은 대륙 전체에서 손에 꼽았고,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별의 가호와 직면한 대부분은 패주하거나 끝내 방어막을 뚫지 못한 채 전멸했다.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들 일부는 우리의 공격을 무조건적으로 방어하는 마법을 사용한다. 한 번에 많은 병력을 기용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지. 거기에 둘러싸인 뒤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하면 그대로 끝일 테니까.】

“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용맹했던 이들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지. 하지만 오늘은 조금 기뻐해도 좋다. 내가 그대들을 소집한 것은, 바로 그 술수를 파훼할 방법을 공유하고 개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예? 그게 무슨···.”

알로긴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나바르도제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로난과 아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들아. 내게 보여준 것을 한 번만 더 보여줄 수 있겠니?】

“어려울 것도 없죠.”

로난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딸꾹질을 참고 있는 아셀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난의 얼굴을 본 몇몇 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필레온의 교복 아닌가? 거인을 잡은 것이 저들이라고?”

“···그렇군. 저 아이가.”

“듣자하니 파르잔의 성지에서 나타났던 괴물도 저 청년이 물리쳤다 하던데, 설마 저렇게 어릴 줄이야.”

대부분은 감탄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불현듯 아데샨이 로난의 옷자락을 쿡쿡 잡아당겼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왜 그래요?”

[수상한 사람들이 있어.]

아데샨은 육성 대신 전음으로 뜻을 전달했다. 참가자들을 훑어보는 그녀의 어깨 위로 그림자의 마나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아.”

뒤늦게 이유를 깨달은 로난이 탄식했다. 이 중에 네뷸라 클라지에의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데샨의 능력이라면 어렵잖게 스파이를 잡아낼 수 있을 터였다. 유능한 애인을 둔 것에 만족한 그가 나바르도제에게 색출 작업을 제안하려는 차였다. 사근사근하게 눈웃음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잠깐.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단다. 이스란?】

“확인했소.”

나바르도제는 시선을 돌려 그림자 대공을 바라보았다. 줄곧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벌어진 대공의 입술 사이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음으로 말씀하신대로 여기 모인 인원을 주시하고 있었소. 과연 방어막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이들이 있더군. 거칠어진 심장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 있소.”

【역시 그렇구나. 누구지?】

“머리에 붉은 원이 떠오른 자들이오.”

별안간 그림자 대공이 검지를 위로 쳐들었다. 손가락 위로 피로 이루어진 구체 하나가 몽글거리며 떠오르더니 회의실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 이게 왜 여기로 오는 거야?”

“무슨···.”

우우웅···나뉘어진 핏덩이는 정확히 열세 명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군인이 셋에 마법사가 하나. 왕관 쓴 이가 둘, 직책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높아 보이는 나리가 일곱 명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피던 아데샨이 놀란 투로 중얼거렸다.

“···전부 맞아. 저 사람들이야.”

“오우, 좆될 뻔 했네.”

로난이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설마 배신자가 저렇게 많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데샨의 교차 검증까지 거쳤으니 분명 정확할 터였다. 색출 제안을 할 필요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들을 한 명씩 살피던 나바르도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실망스럽구나. 남길 말이 있다면 지금 하거라.】

정색한 표정에서 기존의 자애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지명자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되는 모함이오! 불의 어머니여, 저런 모기의 말을 믿는 거요?!”

“젠장,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군. 크라티르! 우리를 당장 돌려보내시오!”

“터무니없는 오해입니다.  부, 부디 제게 변호할 기회를···!”

제각기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다른 참가자들은 그들을 경멸과 한심함, 충격이 적당히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 대공이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좋을 대로 하거라. 어차피 변절할 이들이니까.】

“아하. 그렇다면야.”

그림자 대공이 미소지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휘어지며 흡혈귀 특유의 적색광이 번득였다. 지명당한 이들이 목청을 높이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던 와중이었다.

불현듯, 회의장 전역에 어둠이 내리깔렸다.

“뭐, 뭐지?!”

“이봐, 누가 불좀 켜 보게!”

곳곳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한 치 앞도 볼수 없는 암흑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로난은 지명자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오 초 정도 지났을까. 혼란스럽던 회의장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히야아아아아악!!”

거의 동시에 아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는 옆에 있는 로난을 와락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쭉 평정을 유지하던 슐리펜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무슨···!”

열세 명의 변절자는 모두 뼈와 가죽만 남은 미라가 되어 탁자 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새하얀 가죽 아래로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푹 꺼진 눈구멍들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간만에 포식했군. 배려에 감사하오, 태초의 불이여.”

그림자 대공이 웃음지었다. 그는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서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말했다.

【나야말로 고맙지. 너는 언제나 일처리가 빨라서 좋구나.】

탁! 나바르도제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미라들은 모조리 종이가 타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긴장감이 회의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로난은 할 말을 잊어버린 채 두 불멸자를 쳐다보았다. 아지다하카가 그녀에게 자신을 살려준 이유를 되물은 것도 이해가 가려 하고 있었다.

‘적이 아니라 다행이군.’

자비에 대해 의문을 표하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하긴 전생에서도 괜히 거인 하나를 혼자 태워 죽인 게 아닐 터였다. 더는 변절자가 없는 것을 재확인한 나바르도제가 다시금 로난을 돌아보았다.

【아이야. 이제 해도 될 것 같구나.】

“···그래 보이네요.”

【계속 혹사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한 번만 힘을 더 내서 여기 모인 이들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다오.】

로난이 주억거렸다. 썩 듣기 좋은 말이었다. 베일 것처럼 날카롭던 그녀의 눈초리는 어느새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때처럼 상냥하게 풀어져 있었다.

“너무 그러지는 마세요. 이게 뭐 힘든 거라고. 아셀, 시작하자.”

“히윽..흐으윽···미, 미라가···.”

“그만 짜 인마. 여기서 니가 제일 무섭거든?”

아셀은 이제 대놓고 흐느끼고 있었다. 가까스로 아셀을 달랜 로난은 이전에 아드렌에서 했던 것처럼, 자신의 피를 활용하여 별의 가호를 파훼하는 방법을 시연해 보였다.

슐리펜과 아데샨이 조교가 되었다. 아데샨의 채찍에 피를 발라준 로난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이제 그냥 휘두르면 돼요.”

“이, 이렇게?”

아데샨이 팔을 휘두름과 동시에 날아간 채찍이 별의 가호를 강타했다. 콰장창! 기괴하게 일렁이던 장막이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져 내렸다. 아셀이 머리를 쥐어 싸매며 비명을 터트렸다.

“끄아아아악!”

“와아아···!”

아데샨의 눈이 커졌다. 어떤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던 방어막이 마치 유리라도 된 것처럼 바스라지고 있었다. 그녀와 슐리펜은 로난의 피를 묻힌 검과 채찍으로 별의 가호를 파괴해 보였다.

“마, 맙소사! 정말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셀이 별의 가호를 일으키거나 두 사람이 그것을 파괴할 때마다 회의장 곳곳에서는 경악 어린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 대공이나 자이파, 발자크와 같은 자존심 높은 강자들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만족스레 미소짓던 나바르도제가 회의장의 한구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때. 이제 좀 희망이 보이나?】

도론을 필두로 한 대장장이와 기술자들이 모여 있었다. 로난의 검을 극광으로 벼려준, 오로라 스칼에서 온 카탄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을 벙찐 채 감상하고 있었다. 하도 몰두하는 탓에 나바르도제의 질문에 답변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었다. 도론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디디칸.”

“말해 뭐하겠어.”

옆에 있던 웨어울프 디디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대장장이였으나 한편으로는 뛰어난 연구자이기도 했다.

“쟤네들이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워. 정말로.”

저 피를 다수가 사용케 할 발상이 그의 복실복실한 머릿속에서 샘솟고 있었다. 나바르도제가 말을 이었다.

【너희는 밤의 아이들과 머리를 맞대 보거라. 피를 다루는 그들과 함께라면 분명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니.】

“명심하지요.”

【좋아. 그럼 회의를 재개하겠다. 좋은 생각이 있는 이들은 부담 갖지 말고 의견을 제시해 보거라.】

나바르도제가 웃엇다. 말이 맺어지기 무섭게 십수 명의 참가자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종족을 초월한 대회의는 머지않아 종료되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임무를 배정받은 뒤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

달이 밝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드문드문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천체의 빛무리를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 동남 교구의 사령부가 자리한 오르큘러스 요새는 그런 심야의 어스름함 속에 솟아나 있었다.

“또 연락이 끊어졌단 말이냐? 이번에는 만타 지부라고?”

“그, 그렇습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사흘 만에 지부 열 개와 연락이 끊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보고하러 온 부하가 와들와들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라미린스가 혀를 찼다. 동남 교구의 주교인 그녀는 최근 들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근처에 배치된 지부들과의 연락이 두절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형 지부들만 연락이 끊어져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끼용 지부가 토벌당하는 것은 꽤나 흔한 경우였고, 상대의 병력 손실을 위해 의도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어제부터는 인원이 못해도 오백 명이 넘어가는 중형 지부들과의 연락도 끊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교주로부터 권능을 직접 하사받은 지부장이 적어도 두 명씩은 배치되어 있던 터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본격적으로 별의 힘을 다루는 정예들을 감히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간혹 자이파 같은 괴물이 지부장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는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거니와 요행에 가까웠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라미린스가 부하에게 지시했다.

“경계를 강화해라. 아드렌에서의 일 때문에 교주님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니, 이변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부하는 엉덩이를 걷어차인 개처럼 허둥지둥 물러났다. 침대에서는 좀 쓸만하더니 평상시의 배짱은 영 형편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쓰러지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도대체가···.”

최근 들어 조직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드렌에서의 강림이 저지된 이후부터였다. 기대했던 결과를 내지 못한 교주는 격노하며 당시의 책임자를 대거 숙청했다.

“···좀 생긴 신입들이 들어 왔었지.”

아무래도 기분전환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남자 신도 몇 명을 방으로 부르려던 차였다. 갑자기 문 밖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아악!!”

“무슨 일이냐!”

방금 나간 부하의 목소리였다. 라미린스가 황급히 뛰쳐나갔다. 모퉁이를 돈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이 무슨···!”

아찔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복도가 온통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하얀 로브를 입은 주검 수백 구가 토막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울칸토 지부장···.”

어느 시체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벙찐 채 읊조렸다. 별의 힘을 능숙하게 다루는 데다 밤에도 여러모로 유능하던 울칸토 지부장은 상반신만 남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이곳의 우두머리인가.”

“너는.”

라미린스가 헛숨을 들이켰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여인이 서 있었다. 대태도에 묻은 피를 털어낸 그녀가 툭 내뱉었다.

“그런가 보군.”

“나비로제?”

전대 검성 나비로제였다. 라미린스가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불현듯 살기를 감지한 그녀가 황급히 허리를 뒤로 젖혔다. 쉬이익! 초승달 형상의 검기가 라미린스의 가슴 위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크윽···!”

“머리를 내밀어라.”

검기를 뿌린 나비로제는 곧바로 지면을 박차며 간격을 좁혔다. 라미린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자세를 바로잡았을 때, 나비로제는 이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멍청한 것, 내가 다른 떨거지들과 같은 줄 아느냐?!”

하지만 라미린스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파훼함과 동시에 반격할 수단을 갖고 있었다.

라미린스가 팔을 쳐들었다. 동시에 마나의 파동과 함께 나타난 역장이 눈앞에 솟아났다. 스무 살 무렵부터 받았던, 그녀를 무패의 투사로 만들어준 별의 가호였다.

방어에서 신경을 끈 라미린스가 반격을 준비하던 차였다. 스각! 그대로 역장을 찢고 들어온 칼날이 그녀의 목울대를 가르며 지나갔다.

“어?”

무슨 일인지 파악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비로제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했다. 라미린스의 머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퍼억-! 천장에 맞아 튕겨 나온 머리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그것이 끝이었다. 나비로제가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녀의 대태도는 평소같은 암녹색이 아닌 어스름한 진홍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억세군.’

적을 베어낸 나비로제가 손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다. 두부 가르듯이 가호를 베어내는 로난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희석되었으니 어쩔 수 없나···.”

그리 중얼거린 나비로제는 라미린스가 있던 주교의 방으로 들어갔다. 각종 천박한 기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대형 침대 뒤편에는 거대한 창문 하나가 나 있었다.

나비로제가 창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장창! 유리창이 박살 나며 달빛이 쏟아졌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사, 살려줘! 제발!”

요새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부서진 성문 안쪽으로 제국군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조직적인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이 기세라면 금방 끝나겠군.”

그 풍경을 지켜보던 나비로제가 중얼거렸다. 오늘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시작되었다.

아드렌의 비극이 벌어진 지 정확히 두 달이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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