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69화 (269/333)

269. 척결(1)

#269

우중충한 하늘 위로는 해가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치솟는 연기 기둥이 먹구름에 섞이며 그 혼탁함을 더하고 있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비명, 함성이 천장 틀어막힌 평원 위에서 요란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여기만 돌파하면 동부도 끝이다! 밀어붙여!”

그 사이로 장교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네뷸라 클라지에 타도라는 깃발 아래 모인 연합군이 평원을 뒤덮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과거 동부의 뿔이라 불리우던 판시아 요새가 굳건하게 솟아나 있었다. 머나먼 북부에서 동시 공략중인 펠그란드 산맥과 더불어 네뷸라 클라지에 측에서 손꼽히게 큰 지부였다.

소탕 작전이 개시된 지 두 달.

수세에 몰린 네뷸라 클라지에는 중, 소형 지부를 버리고 대형 지부로 힘을 결집하여 결사적인 항전에 돌입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꿨다. 명령에도 병사들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장교가 재차 소리쳤다.

“진형을 갖춰라! 귀관들은 놈들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고 싶지 않은가!”

“무, 무리입니다. 저걸 어떻게···!”

하지만 병사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완벽히 승기를 잡은 상황임에도 그들에게서는 자신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능한 지휘관도, 요새를 향해 끊임없이 바윗덩이를 쏘아 대는 투석기도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지는 못했다. 성문 앞을 지키는 수비군이 너무 강한 탓이었다.

별의 가호의 유무와 관계없이 강한 이는 존재했다. 최근 들어 권능에만 의존하는 풍조가 두드러지기는 했지만, 네뷸라 클라지에는 엄연히 유구의 역사를 자랑하는 집단이었으니. 하얀 중갑을 입은 수인들이 도발하듯 외쳤다.

“와라, 겁쟁이들아!”

“고작 이 정도로 교단을 꺾으려고 한 거냐!”

대주교의 친위대였다. 고작 스무 명에 불과했지만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선봉대로서 무수히 많은 적을 꺾어 온 정예병들은 수성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압박을 이기지 못해 돌입한 병력은 방어선을 넘기 무섭게 살해당했다. 그중 제일 두려운 것은 역시 대주교 판타시온이었다. 수비군의 선봉에 서 있던 거대한 웨어디어가 연합군을 향해 포효했다.

“무지몽매한 자들아, 결국 달라지는 것 없다는 걸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교단에서 유별나게 강한 열두 명이 있었고, 그들을 대주교라 칭했다.

우렁찬 목소리는 호수에 일어난 파문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접근하던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의 주변에는 큼직하게 토막 난 시체 수백 구가 산더미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괴, 괴물이다.”

“저런 걸 어떻게 잡아···!”

온몸을 뒤덮은 근육이 갑옷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거대한 육체 위에 놓인 수사슴의 머리는 어딘가의 종교에서 숭배할 법한 신의 두상 같았다.

판타시온의 손에는 거대한 양날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지름이 2m에 달하는 거대한 날은 기사단 두 개 분량의 피를 마셨음에도 게걸스레 예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별의 가호는 개전 초의 포격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판타시온을 둘러싼 연합군 중 자신이 ‘포위’를 하고 있다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주교···!”

총지휘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든 자리에서 피가 흘렀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전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다. 머릿수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이 병력만 소모되고 있는 탓이었다.

이대로라면 사기가 꺾인 병사들이 도망칠 가능성도 있었다. 저런 괴물이 앞으로 아홉이나 더 있는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수백 번째로 회중시계를 확인한 그가 입술을 비틀었다.

“아직도 멀은 건가...!”

“권능이 없다고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느냐?!”

판타시온이 재차 소리쳤다. 도끼를 한 손으로 붕붕 휘두르는 그에게서 웨어디어 특유의 온화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연합군은 물러서기만 할 뿐 더 접근하지 않았다. 사기가 완전히 꺾여 전의를 상실한 몰골이 참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들을 살피던 판타시온이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슬슬 해도 될 것 같다. 지휘관을 죽이면 놈들도 와해되겠지.”

“그 말씀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친위대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침내 때가 왔다. 그들은 지정해 놓은 방어선만 지킬 뿐, 더 나아가지는 않고 있었다.

역습을 위한 판타시온의 작전이었다. 놈들이 방심했을 때 확 몰아쳐서 병력을 와해시킬 심산이었다. 지휘부를 모조리 죽여 버리면 제깟 놈들이 아무리 대군이라도 별수 없을 터였다.

“내가 신호하면 출발한다.”

판타시온이 작게 읊조렸다. 무기를 쳐든 부하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번득한 사슴의 눈동자가 저 멀리 있는 지휘부를 겨냥했다. 그가 땅을 박차며 달려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별안간 판타시온의 뒤에 있던 성문이 폭발했다.

“커억! 무, 무슨 일이냐?”

“아아아아악!!”

암석으로 이루어진 파편이 사납게 날아들었다. 몇몇 수인들이 뒤통수나 등을 맞고 쓰러졌다. 황급히 몸을 돌린 판타시온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흙먼지 안쪽에서 시커멓고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너는···!”

“하아아···긴장했잖소. 검성.”

총 지휘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너무 늦기 전에 일이 마무리되었다. 가라앉은 흙먼지 너머로 거대한 웨어타이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대 최강의 검성이라 알려진 자이파 터르겅이었다.

“그래도 피로 씻으니 좀 낫군. 하수도는 도저히 걸어 다닐 곳이 못 돼.”

자이파가 혼잣말했다. 열댓 명의 수인 정예병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자이파가 이끄는 특공대의 임무는 요새의 배수구로 침투하여 서문을 안쪽에서부터 박살 내 버리는 것이었다.

“피···?”

불길한 예감에 판타시온의 털이 곤두섰다. 그의 시선이 문득 성문 안쪽으로 향했다. 피난 준비가 한창이어야 할 내성은 피비린내 자욱한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생산이나 잡무를 담당하는, 소위 말해서 주민 역할을 맡는 신도들이 모두 처참하게 살해당해 있었다. 벌어진 판타시온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도대체 무슨 짓을···!”

“잡초를 좀 뽑았지.”

자이파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마주치는 신도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썰어 버렸다. 판타시온이 항변하듯 외쳤다.

“전투 능력이 없는 이들을 저렇게 만들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검성인가!”

“받아라.”

자이파는 대꾸하는 대신 무언가를 던졌다. 툭. 허공을 돌며 날아온 덩어리가 판타시온의 앞에 떨어졌다. 그의 목울대 위로 나무뿌리같은 핏줄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오···! 오오오!”

“너를 꽤 닮았더군.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자이파가 언월도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판타시온이 덩어리를 안아 들었다. 사슴의 머리 위로는 아직 덜 자란 뿔이 자라 있었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판타시온의 외동아들이었다. 자이파가 말을 이었다.

“너희 쓰레기들에게는 어떤 자비도 베풀 생각이 없다. 살아서 지옥을 맛봤으니, 이제 정말로 지옥에 처넣어 주마.”

“자이파아아-!!”

판타시온이 포효했다. 자이파는 말없이 언월도를 움켜쥐었다. 양측의 거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자이파와 판타시온이 정확히 중간 지점에서 격돌했다. 카아아앙-! 하늘에 금이 가는 듯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전부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

휘둘러지는 무기가 보이지 않았다. 언월도와 도끼가 충돌할 때마다 금속성 비명이 작렬했다. 자이파와 판타시온은 공성 병기에 가까운 두 거병을 단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다루고 있었다.

“마, 맙소사.”

“저게 검성인가···!”

연합군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대주교 판타시온과 자이파의 전투는 도저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 같지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압도당한 채 훗날 전설로 기록될 싸움을 지켜보는 것 밖에 없었다. 스무 합 정도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흠!”

쾅! 별안간 자이파가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도끼가 허공을 수평으로 가로질렀다. 판타시온은 즉시 무기를 거둬들였지만, 자이파에게 있어서 그 찰나는 승부를 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끼가 무거워졌구나, 사슴!”

자이파는 앞으로 제비를 돌며 언월도를 휘둘렀다. 도끼에 가로막히기만 하던 칼날이 처음으로 살을 갈랐다. 서걱! 그가 착지함과 동시에 판타시온의 오른팔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큭···!”

판타시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촤아아악! 거칠게 뿜어져 나온 선혈이 자이파의 얼굴을 적셨다. 전투를 지켜보던 연합군과 신도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비등한 실력자 간의 대결에서 사지의 상실은 사실상 승부의 결착이나 다름없었다.

“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식 내의 이야기였다. 판타시온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뿔을 앞세워 돌진했다. 정통으로 얻어맞은 자이파가 공성추에 맞은 것처럼 튕겨 나갔다. 콰아아앙!!일직선으로 날아간 그의 몸뚱어리는 백 걸음도 더 떨어진 성벽과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네놈···!”

“죽어라!”

곧바로 판타시온의 양날도끼가 동일한 궤도로 날아들었다. 벽에 처박혀 있던 자이파가 간신히 몸을 뒤틀었다. 콰아아앙!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시선을 슬쩍 돌리자 수염 일부를 자르고 벽에 처박혀 있는 도끼날이 눈에 들어왔다. 자이파가 즐겁다는 듯이 실소했다.

“근성은 쓸만하군.”

“네놈의 간을 씹어 삼켜 주마!”

철컥! 판타시온이 손바닥을 펼치자 도끼는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자이파가 몸을 일으켰다.

뱉어낸 침에서는 진득한 핏물과 새하얀 이빨 몇 개가 섞여 있었다. 확실히 연합군이 고전한 이유가 있었다. 판타시온을 응시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해봤자 소용없다. 네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해 주마!”

“판타시온이라고 했던가. 너와는 조금 더 진득하게 싸워보고 싶었다.”

자이파의 목소리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판타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뭐?”

“허락하지. 이건 승부가 아닌 전쟁이니까.”

자이파는 다시 한 번 영문 모를 소리를 주절거렸다.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판단을 내린 판타시온이 돌진하려던 찰나였다. 별안간 그의 측면에서 휘파람을 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판타시온이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웬 인간 청년 한 명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다. 암청색 제복을 입은 청년의 손은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덩치는 작았지만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판타시온이 머리에 이어 몸을 회전시키려던 차였다. 촤아아악!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감촉과 함께 자신의 옆구리 위로 피가 튀어올랐다.

“그랑시아!”

판타시온의 눈이 커졌다. 닿지 않았음에도 바람에 베여 버렸다. 그 일격에 맞는 순간 상대를 유추할 수 있었다. 슐리펜을 마주본 그가 격분하며 외쳤다.

“애-송-이-가-!”

판타시온이 도끼를 쳐들었다. 한쪽 팔을 잃었다 해도 이런 풋내기에게 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막 슐리펜의 머리를 내리찍으려던 차였다. 콰삭! 조금 전에 베인 옆구리의 상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부상을 살핀 판타시온이 움찔거렸다. 참격에 베인 자리가 파랗게 변해 있었다. 자가수복되며 피를 멈춰야 할 체조직이 얼어붙은 채 붕괴하고 있었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슐리펜이 다시금 참격을 날렸다. 촤자작! 판타시온의 사지 곳곳에 푸른 선이 그어지며 상처가 얼어붙었다.

그제야 슐리펜의 손에 쥐어진 검이 눈에 들어왔다. 빙하처럼 푸르스름한 색을 띠는 롱소드의 검신에는 고대부터 사용하던 마법의 문자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판타시온이 탄식하듯 읊조렸다.

“페일 로드···!”

“아무리 봐도 애송이가 들기에는 아까운 검이란 말이지.”

자이파가 픽 웃었다. 칼밥을 먹는 이들 중 그 검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론의 일곱 걸작 중 하나이자 혹한을 머금은 검 페일 로드는 그랑시아 가의 보검이었다.

슐리펜은 페일 로드를 이번 소탕 작전에 참여하면서 물려받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판타시온이 치켜든 도끼를 다시 내리찍었다.

쾅!! 도낏날이 지면에 금이 갈 정도로 깊숙이 처박혔다. 허나 슐리펜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참격을 피했다. 그는 다소 뻔한 동작으로 검을 올려 찔렸지만, 동작이 느려진 판타시온은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푹! 페일 로드가 판타시온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므어억!”

입 천장을 뚫고 나온 검 끝이 싸늘한 청색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판타시온이 슐리펜을 무릎으로 걷어차려던 찰나였다. 퍼석-! 슐리펜이 칼날을 비틈과 동시에 얼어붙은 그의 주둥이가 산산이 부서졌다.

“대주교님!!”

친위대가 경악했다. 판타시온의 이빨은 잇몸과 붙어서 떨어져 토막토막 떨어져 나왔다. 수십 개로 조각난 혓바닥이 공중을 날았다. 단면을 타고 침투한 냉기가 판타시온의 뇌를 침식했다.

“우으억···.”

판타시온의 동작이 아주 잠깐 멈췄다. 슐리펜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힘을 끌어모은 그가 허리를 비틀며 검을 올려 벴다. 카가각! 땅을 긁으며 솟구친 칼바람이 판타시온을 덮쳤다. 칼날이 체내를 휘젓는 감촉과 함께 그의 눈이 커졌다.

“···너.”

판타시온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선을 떨궈 바라본 슐리펜의 얼굴은 미동도 없이 표표했다.

전장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판타시온의 손에서 도끼가 떨어졌다. 촤아아악! 그의 심장부터 왼쪽 승모까지 그어진 선이 벌어지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쿵···! 천천히 기울던 웨어디어의 거구가 바닥에 쓰러졌다.

“자, 잡았다!”

“제국의 샛별이 저 괴물을···!”

“검성 자이파 만세!! 그랑시아 만세!!”

판타시온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친위대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연합군의 함성이 하늘이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슐리펜이 대주교를 처치한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조금 기뻐하거나 우쭐해 할만도 했지만, 그는 말없이 칼날에 묻은 피만 문질러 닦았다. 그가 자이파를 돌아보며 물었다.

“더 처리할 적이 있습니까?”

“이제야 눈빛이 조금 쓸만해 졌군.”

자이파가 웃었다. 검푸른 눈동자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폭풍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성장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본격적인 소탕 작전을 시작한 이후, 슐리펜은 누구보다 빠르게 검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연합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없다. 저놈들도 할 일이 있어야지.”

“알겠습니다.”

“고생했다. 그리고 하루빨리 준비해서 검성의 자리에 정식으로 도전해라. 기다리고 있겠다.”

슐리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친위대를 처리한 연합군이 성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간격 없이 울려 퍼지는 발소리와 비명이 긴 싸움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

“니미럴. 오늘은 또 얼마나 짜내야 하나.”

로난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피를 많이 뽑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의 옆에는 디디칸이 고안한 기계장치가 요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로난의 오른팔에는 작은 대롱이 꽂혀 있었다. 기계가 가동할 때마다 붉은 피가 대롱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드러누운 채 어두침침한 막사의 천장을 올려보던 와중이었다.

“뺘아···.”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별안간 천막이 젖혀지며 거대하고 시커먼 머리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로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타.”

“뺘우웅···.”

“그래. 그래. 괜찮아. 걱정하지 마.”

시타는 걱정스레 로난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로난이 시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손바닥을 쫙 펼쳐도 머리를 완전히 쥘 수 없었다. 근 두 달 만에 시타는 작은 용이라 해도 믿을 크기까지 성장해 있었다.

여러 곳에서 피를 하도 많이 마신 탓이었다. 그가 시타를 한창 달래 주던 와중이었다.

“로난. 안에 있나?”

“예. 들어와요.”

갑자기 막사의 입구가 활짝 열리며 창백한 사내들이 걸어들어왔다. 그림자 대공과 그 부하들이었다. 누운 채 머리만 슬쩍 든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무슨 일이에요?”

“한창 바쁜데 미안하군. 네가 한 번 나서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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