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천재칼잡이-285화 (285/333)

285. 진군(3)

#285

“어서들 오시게나. 대충 상황은 전달받았겠지?”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분의 혈액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로르혼의 질문을 들은 병사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이 빠져나온 차원문 뒤편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북부 지부들을 공략하던 연합군 2군단이었다. 허허 웃은 로르혼이 어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래. 추우니까 얼른 들어와서 몸 좀 녹이게. 크라티르, 남부에서도 얼추 모였느냐?”

“네. 스승님.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크라티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앞에 펼쳐진 차원문 세 개는 모두 후덥지근한 밀림과 이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남부 지부를 담당하던 연합군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빠져나오고 있었다. 남부 군단을 담당하는 사령관이 경례를 보냈다.

“명을 받고 복귀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집에 응해 줘서 감사하군요.”

크라티르가 묵례했다. 오래간만에 마나를 잔뜩 소진한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핼쑥해져 있었다.

대륙에 단 두 명 뿐인 공간 마법사인 로르혼과 크라티르는 쉴 새 없이 공간을 비틀고 찢어 가며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결집시키고 있었다. 연다는 말은 이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저기는 여전하군···음?”

오래간만에 고향 대지의 풍경을 감상하던 나비로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행렬의 뒤편에서 익숙한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자로딘?”

“간만이군.”

사내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푹 파인 볼, 웨어 자벌레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말라빠진 몸. 최고 수준의 대지 마법사이자 그녀의 악우인 자로딘이었다. 저벅저벅 다가온 그가 나비로제의 앞에 멈춰 섰다.

“괜찮아 보이는군. 그 무식한 칼도 여전하고 말이지.”

“···수냐는 어디 두고 너만 온 거냐.”

나비로제가 미간을 좁혔다. 언제나 함께 있던 그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부활했다고는 해도 아직은 도움이 필요한 수준으로 알고 있는데.

“만월 마탑에 보호를 요청했다. 일이 끝나면 다시 탑 메이지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그런 돌대가리들과는 다시는 일하고 싶지 않다더니 과감한 판단을 내렸군.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보지?”

“조금 더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어차피 여기서 지면 다 끝이니까. 기왕 싸워야 할 바에는 아내가 살아갈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자로딘이 말했다. 나비로제는 대답하는 대신 피식 웃었다. 그의 얼굴은 과거 자신과 대밀림에서 사투를 벌일 때 못지 않게 비장해져 있었다.

“그럴싸한 소리도 뱉을 줄 알게 됐군.”

“너무 늦게 철이 들었지. 그럼 나는 발자크를 보러 가겠다.”

“음?”

“신경도 안 쓰고 살았는데, 막상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더군. 너는 죽지 마라.”

말을 맺은 자로딘이 갑자기 등을 돌렸다. 문득 전사한 발자크와 그의 관계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직 결판을 내지 못한 라이벌이라 했던가. 생각보다 충격이 더 큰 듯 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 또한 비슷한 관계에 얽혀 있는 인물이 있었다. 이쪽은 이미 결판이 나 있기는 했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 나비로제가 자로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거 의외로군. 너는 틀림없이 검과 결혼했다 자칭하는 부류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저런 비실비실한 애인을 숨겨 두고 있었나.”

“계속 헛소리를 지껄여 봐라. 그대로 가죽을 벗겨서 털옷으로 써 줄 테니까.”

나비로제가 으르렁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자이파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시커먼 손에 쥐어진 언월도에는 아직도 거인의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최종 결전을 앞둔 그의 얼굴은 독기로 벼려져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나비로제가 물었다.

“여유롭구나. 증오를 잊기라도 한 건가.”

“당연한 것에 분노하지 않기로 한 것 뿐이다. 그 편이 더 벌레들을 잘 죽일 수 있더군. 바퀴벌레나 모기를 죽일 때 화를 내지는 않잖나.”

자이파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네뷸라 클라지에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로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그렇군.”

“아까는 잘 봤다. 실력이 더 늘었던데, 이제 정말로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겠어.”

자이파가 클클거렸다. 거인 바사기아와의 전투에서 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비로제의 칼솜씨는 2차 검성 결정전을 치르던 당시와 비교해서 비약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이번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즐기는 게 좋을 거다.”

“세 번째 도전은 또 처음이군···늘 그랬듯 오는 도전은 거절하지 않겠다. 허나 서둘러야 할 걸.”

“왜지?”

“선약이 잡혀 있는데, 잘못하면 거기서 질 것 같거든.”

별안간 자이파가 손가락을 뻗어 전장 한복판을 가리켰다. 나비로제가 시선을 옮겼다. 슐리펜이 덩그러니 솟아난 바위에 앉아 명상하고 있었다.

“······”

이릴의 구출을 앞두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의 옆에는 그랑시아의 보검인 페일 로드가 잠을 자듯 놓여 있었다. 나비로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선약이라는 건···.”

“그래. 저 애송이다.”

자이파가 픽 웃었다. 슐리펜은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소름 끼치도록 강대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분노란 저런 걸까. 슐리펜의 몸을 중심으로 북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이파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 몇 달간 옆에서 지켜봤는데 완전히 괴물이더군. 장담컨데 향후 천 년은 저런 재능이 나오지 않을 거다.”

“로난과 비교하면 어떻지?”

“아···그 애송이도 있었지. 이거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걸.”

손가락을 튕긴 자이파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나비로제가 하늘을 올려 보았다. 분노에 삼켜질까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했다.

“···언제 저렇게 성장한 건지.”

녹아내린 해가 황무지 위로 석양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름답지 않게 선선한 저녁이었다.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조심해!”

“이제는 여명이 돌아와도 추가로 만들 시간이 없어!”

기존에 남아 있던 병사들은 로난의 혈액으로 만든 희석액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다. 사실상 마지막 결전이 될 터이니 여분은 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총본산 공략전에서도 사용하게 될 운반차들은 흑철이나 미스릴로 된 장갑을 덧붙여 가며 전차나 다름없는 존재로 개조되고 있었다.

깡! 깡! 깡! 쇠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창 망치질을 하던 대장장이 도론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

“디디칸. 거기 철판 좀 다오.”

“여깄수. 내 살다 살다 영감이 이런 일을 하는 꼴도 보는구만.”

“너도 열심히 하거라.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망치질이 될 수도 있으니까.”

“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쇼. 영감을 뛰어넘기 전까지는 못 죽지.”

디디칸이 낄낄거리며 철판을 내밀었다. 다만 언제나처럼 유쾌하지만은 않은 웃음소리였다. 도론은 그 안에 내포된 두려움을 애써 모른 척 하며 철판을 받았다.

“그래.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분명 이번에도 잘 해결될 거요···어라? 저 친구들은 오랜만에 보는군.”

“음?”

“왜, 로난의 친구들 말야. 다들 늠름해졌는걸.”

디디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의 시선은 막 재회하고 있는 마르야와 아셀에게 머물러 있었다. 차원문을 빠져나온 마르야가 팔을 흔들며 외쳤다.

“아셀!”

“마, 마르야?!”

화들짝 놀란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사자 같은 금발을 펄럭거리면서 달려오는 것은 틀림없는 마르야였다. 그러고 보니 북부 전선에 보급책으로 지원했다 했었지.

네뷸라 클라지에를 본격적으로 소탕하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그녀가 아셀을 와락 끌어안았다.

“우웁. 수, 숨이···.”

숨을 쉬지 못하게 된 아셀이 팔다리를 바동거렸다. 북부에서 돌아온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하얀 눈싸라기가 묻어 있었다. 마르야가 아셀의 볼을 양쪽 집게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웃었다.

“활약상은 잘 들었어. 너무 대단해! 물론 지금 기뻐할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단해!”

“아, 아파아···!”

“너도 이번에 투입되는 거지?”

바사기아 전투에서의 활약상을 어찌어찌 또 들은 모양이었다. 웃으면서 우는 소리를 내던 아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 으응.”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도 네 마법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 줄게!”

마르야가 아셀의 코에 코를 비비면서 말했다. 한순간 아셀의 얼굴이 굳었다.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불안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을 거야. 이제 다 왔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

“마르야···.”

하긴 거인들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아셀 역시 방금까지는 겁에 질린 채 떨고 있었으니까.

헌데 이상하게도 그런 마르야의 얼굴을 보니 떨림이 가라앉았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두 손을 포개어 쥔 아셀이 싱긋 웃었다.

“고마워. 나도 너를 지켜줄게.”

“뭣···.”

아셀이 말했다. 평소와는 달리 떨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충격을 받은 듯 벙쪄 있던 마르야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갑자기.”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온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상당히 부끄러운 말을 했음을 깨달은 아셀이 황급히 손을 놓았다. 문득 어디선가 호탕한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하하! 보기 좋군. 원래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사랑이 싹트는 법이지!”

“브라움?”

아셀과 마르야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콧수염 난 대머리 하나가 껄껄거리며 서 있었다. 판금 갑옷과 대방패로 무장한 브라움은 이제 제법 기사 티가 났다.

“뭐야, 너도 같이 싸우는 거야?”

“같은 연합군 소속이면서 너무하군. 세상을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운다니. 기사에게 이만한 명예가 또 어디 있겠나!”

브라움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 검보랏빛 머리의 소녀 한 명이 공중에서 사뿐히 착지했다. 아칼루시아 가의 영애 에르제베트였다. 세 사람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에르제베트?”

“다들 오랜만이네요. 여러분. 건강해 보여서 기뻐요.”

그녀가 기품 있는 인사를 보냈다. 뛰어난 마법사인 그녀는 마르야나 브라움과 마찬가지로 여명 마탑에 파견을 가서, 그곳의 마법사들과 함께 연합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셀이 질문했다.

“여, 여명 마탑은 어쩌고? 네가 없어도 괜찮은 거야?”

“당연히 안 괜찮죠. 공세가 시작되는 대로 바로 돌아갈 거에요. 스크롤도 준비해 왔고요.”

“왜, 왜 그런 짓을···?”

“아 정말.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보는 거에요?!”

“히이익!”

갑자기 에르제베트가 신경질을 냈다. 하악질 하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본 아셀이 기겁했다. 에르제베트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냥 다들 걱정돼서 한 번 보러 왔어요!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설마 저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든가 이런 건가요?”

“아, 아니···! 친구에요. 네!”

“흐흥. 그래야죠.”

에르제베트가 만족스레 눈웃음쳤다. 그녀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처음 봤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솔직해지는 병이라도 돌고 있는 걸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도둑···아니, 로난 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고···아데샨 언니는요?”

“저, 저기서 나바르도제 님이랑 회의 중이야. 조금 길어지네.”

아셀은 손가락을 뻗어 전장 구석의 막사를 가리켰다. 어찌어찌 임시로 만든 천막 안에서는 주요 지휘관들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연합군은 마지막 공세를 펼칠 준비를 얼추 마쳐 가고 있었다. 대륙 곳곳과 이어진 차원문도 전부 닫혀 있었다.

다만 크라티르만은 전장 한복판에서 눈을 감은 채 어떤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식은땀까지 흘려 가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셀이 뭐라 말을 더 하려던 차였다.

“흐으읍!”

크라티르가 눈을 떴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 그가 팔을 넓게 펼쳐 박수를 쳤다. 짝-! 경쾌한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마나의 거대한 움직임을 느낀 에르제베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 저건···?!”

공간이 뒤틀리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의 풍경이 위아래로 찢어지며 어느 숲과 호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상황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서, 설마 연다고 했던 게···!”

발 들일 틈 없이 빼곡한 수해는 틀림없는 낙원숲의 전경이었다. 위에서 바라본 거대한 호수는 구름으로 뒤덮인 새하얀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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