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 진군(4) >
#286
“크라티르가 문을 열고 있습니다. 마음은 정하셨는지요?”
【으음.】
로르혼의 질문을 들은 나바르도제가 입술을 비틀었다. 임시로 지어진 회의실에는 그녀를 포함해서 열 명이 들어서 있었다. 연합군의 두뇌를 담당하는 참모진이었다.
그들은 나바르도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느 인물의 부재가 그들을 미치게 하고 있었다. 침음을 흘리던 나바르도제가 아데샨을 돌아보았다.
【아이야. 아직도 연락은 닿지 않고 있느냐?】
“네. 첫날에 끊어진 이후 쭉···.”
아데샨이 말꼬리를 끌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음을 보내고 있었지만 로난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나바르도제가 작게 탄식했다.
【곤란하구나. 솔직히 나는 이쯤 되면 돌아올 줄 알았거늘.】
“슬슬 위험하긴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 쪽이라서요.”
팔짱을 끼고 있던 연합군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륙의 연합군을 결집시킨 것은 병력 증강의 목적도 있었지만, 로난을 기다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답을 찾아오겠다며 떠난 로난은 이틀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일제히 고개를 돌린 참모들의 시선이 최종 결정권자인 나바르도제에게 모였다.
【···그래.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법이지.】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군수 물자와 혈액에 여유가 있을 때 몰아쳐야 했다. 흩어져 있던 실력자들이 전부 모인 지금이라면, 어지간한 강적이 아니고서야 처치가 가능할 터였다.
【교주에 대한 방비책도 확실히 준비되어 있겠지?】
“일단은 그렇습니다. 물론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알겠지만요.”
로르혼이 긍정했다. 그들은 교주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발자크의 경고를 흘려 듣지 않았다. 아이의 모습을 한 로르혼이 빙긋 미소지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기를 돋구는 연설이라도 한 번 하고 가시지요.”
【연설이라. 그런 쪽에는 재능이 없는데.】
나바르도제가 픽 웃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천막으로 이루어진 회의실의 벽면과 천장에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륵! 재가 되어 날아간 천막 너머로 바깥의 풍경이 드러났다. 모든 준비를 마친 연합군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다.
【이렇게 보니 제법 수가 되는군.】
나바르도제가 눈썹을 으쓱였다. 노을빛에 물든 갑옷과 병장기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정예 중의 정예만 모였음에도 족히 십만 명은 될 것 같았다.
“대단하다···.”
아데샨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가슴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는 장관이었다. 먼 미래에 대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보게 될 것이라 믿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국과 그 우호국, 전쟁과 정복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야만적인 적국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변두리의 소국까지. 저마다의 정의를 위해 살아가던 용사들은 모두 같은 깃발 아래 모여 있었다. 반드시 세상을 구하겠다는 신념을 품고.
다만 그들 중 나바르도제와 참모진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크라티르가 차원문을 여는 것을 감상하고 있는 탓이었다. 쿠구구구구···! 이미 폭이 500m에 달하는 차원문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었다.
“정말 굉장하군. 이게 마법인가.”
“듣자하니 로르혼 님의 수제자라는데···이번 전쟁이 끝나면 내 자식도 필레온으로 보내야겠어.”
온갖 모험을 다 거쳐온 베테랑들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축축해진 눈가를 닦아낸 아데샨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전음하려던 차였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나바르도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말고 구경하게 내버려 두자꾸나. 저런 규모의 공간 마법은 나도 처음 보는군.】
“아아, 네.”
아데샨이 그림자의 마나를 거두었다. 확실히 저건 저것 대로 놓칠 수 없는 진풍경이기는 했다.
차원문 너머로는 거대한 호수의 모습이 위에서 보는 시점으로 펼쳐져 있었다. 발자크가 말했던 총본산으로 향하는 입구였다. 흔들림 없는 수면에는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엇비치고 있었다.
“크으으으···크으윽···!”
크라티르는 온 몸의 마나를 짜내 가며 차원문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대류하는 마나가 그의 기다란 수염을 허공에서 춤추게 하고 있었다. 울룩불룩한 핏줄은 당장에라도 크라티르의 이마를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몇 분이 더 지났다. 균열의 끝과 끝이 연합군의 진지를 완전히 가로지를 정도로 넓어질 무렵이었다. 쾅!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크라티르가 맞대고 있던 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하아아-!!”
촤아아아악! 동시에 호수를 채운 물이 좌우로 찢어지며 수면 너머의 세계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점이 기울며 구름 낀 하늘 아래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여, 열었다!”
“저기가 총본산···!”
“그 흡혈귀들이 정말로 찾아냈군. 기분 나쁜걸.”
소름끼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상하좌우 모든 것이 하얀 색이었다. 하늘은 물론 얼마 없는 나무와 풀. 그 아래 깔린 흙마저도 섬뜩한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력을 대부분 소진한 크라티르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탓! 공간을 도약한 로르혼이 그를 부축했다.
“정말 많이 늘었구나. 크라티르.”
“후후···매일 교장실에 앉아서 농땡이나 피우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요.”
크라티르가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우레 같은 환호성이 군영 위로 터져 나왔다. 그는 이제 다른 마법사들과 같이 마나를 회복하며 지원을 담당하게 될 터였다. 문득 차원문 너머를 바라보던 아데샨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건···.”
아직 적군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황야 위로는 망루나 요새 같은 방어 시설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의 총본산인 창백한 성은 건물로 이루어진 방어선 가장 뒤편에 고고하게 서 있었다.
꼭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왕 같은 모습이었다. 이건 발자크에게 듣지 못했는데, 아마 저쪽도 나름대로 수성을 준비한 것 같았다. 나바르도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짧게라도 하는 게 좋겠지.】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연설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감상을 마친 연합군의 시선은 이미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짧은 고민을 마친 나바르도제가 막 운을 떼려던 차였다. 고요를 유지하던 군영 한복판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야아아아악! 위, 위험해요!”
【음?】
익숙한 목소리였다. 쬐끄만 소년 한 명이 새하얗게 질린 채 차원문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 또한 익히 알고 있는 마법사, 아셀이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바르도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 멀리서 날개 한 쌍 달린 거인이 공중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여지껏 연합군이 상대해온 거인과 비교했을 때 어딘가 어설퍼 보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거인의 손에서 던져진, 빛으로 이루어진 창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고 있었다.
“거, 거인이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뒤늦게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아셀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별의 가호를 발동시키기에는 아직 하늘이 밝았다.
“아, 안 돼!”
설마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빛의 창은 정확히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마르야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제기랄, 아셀!”
“다들 위험해!”
마르야는 아셀을 한 팔로 끌어안으며 몸을 뒤로 뺐다.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은 브라움이 대방패를 쳐들었다. 아셀이 뭐라도 해 보기 위해 주문을 영창하는 차였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움과 동시에 강렬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허억···?!”
아셀과 그 일행이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눈이 휘등그렇게 떠졌다. 붉은 비늘 수만 개가 보석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가 바람에 흩어짐과 동시에 거대한 레드 드래곤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나바르도제 님!”
아셀이 기겁했다.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 나바르도제였다. 게이트를 통과하기 위해 덩치를 줄인 그녀는 이타르간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크기가 되어 있었다. 물론 특유의 위용은 전혀 쇠하지 않았지만. 나바르도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마디 할 시간도 안 주는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그녀는 일절의 방어 주문 없이 빛의 창을 그냥 몸으로 들이받아서 상쇄시켜 버렸다. 창이 박혔던 자리의 비늘이 그을려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저, 저걸 막았다고?!”
망루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네뷸라 클라지에의 신도들이 기겁했다. 아무리 뤼코포스의 몸에 강림시킨 인공 거인의 공격이라지만 절대 맨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의 제전에서 활약했던 다르만 이후로 수도 없는 개량을 거쳐서 강화시킨 건데.
“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교주님이나 대주교님들을···!”
선공에 실패한 그들이 다음 행동을 취하려던 차였다. 별안간 날개를 펼친 나바르도제가 차원문 안쪽으로 쇄도했다. 콰직! 한 번의 날갯짓으로 거리를 좁힌 그녀가 인공 거인의 목을 물어뜯었다.
【커억···!】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난의 피로 벼려진 나바르도제의 이빨은 열화된 별의 가호 따위는 종잇장처럼 찢어 버렸다.
거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선혈이 하얀 땅을 적셨다. 걸쭉한 액체는 인간도 거인도 아닌 신세를 방증하는 듯한 기분 나쁜 보라색을 띠었다.
콰아아앙! 나바르도제가 뿌리치듯 머리를 휘두름과 동시에 거인의 몸뚱어리가 망루 위에 처박혔다. 척추가 끊어진 거인은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간신히 압사를 면한 신도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자, 잠깐만!”
“캬아아아악! 사, 살려 줘!”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처절한 비명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아래로 벌어진 나바르도제의 입에서 창세 이래 가장 뜨거운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흐아아아악!!”
유언을 남길 틈도 없었다. 화염의 해일은 사람과 거인, 망루들을 삼키며 넓게 뻗어 나갔다. 각각의 망루에도 별의 가호를 사용할 줄 아는 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불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화르륵! 요새에, 정확히는 요새를 감싼 방어막에 다다르고 나서야 멈춰선 불길이 파도치며 소멸했다. 거대한 요새들은 빈약한 망루들과는 달리 방파제처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확연하게 두터워진 방어막을 본 나바르도제가 혀를 찼다.
【그렇지.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을 거야.】
저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 우선 과제일 듯했다. 교주가 있는 창백한 성은 까마득하게 먼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힘을 좀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때 곳곳에 자리한 요새 위로 날개 한 쌍 달린 거인들이 일제히 비상했다.
“저, 저런···!”
병사들이 경악했다. 숲 위로 세때가 날아오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날개 퍼덕이는 소리가 들녘 위로 퍼지고 있었다.
위세는 기존의 거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머릿수가 심상치 않았다. 족히 수백은 되는 인공 거인들은 한 명 한 명이 검의 제전에서 악몽을 불러일으킨 다르만과 비슷한 힘을 품고 있었다.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우려던 찰나였다. 가슴이 터질 때까지 숨을 들이켠 나바르도제가 하늘을 보며 외쳤다.
【진군하라! 부숴지기 전에 부숴라!】
이것도 연설이라면 나름 연설이었다. 연이어 명령을 복창하는 아데샨의 목소리가 전군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흥분한 오르세가 가슴에서 자신의 뼈로 만든 창을 뽑아 들었다.
【와라! 버러지들아!】
나선형으로 비틀린 창은 여전히 흉악한 기운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림자 대공과 그가 이끄는 흡혈귀들이 질주하는 구름의 형태로 쏘아져 나갔다.
가장 먼저 적진에 도착한 슐리펜이 넓게 검을 휘둘렀다. 검로를 따라 그어진 바람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촤아아악! 막 창을 던지려던 인공 거인의 머리가 공중에 솟구쳤다.
【.....!】
피를 흩뿌리며 추락하는 거체가 마지막 전투의 개전을 알렸다. 세상을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연합군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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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떠냐?”
“젠장, 도대체 같은 질문을 몇 번 하는 거에요?”
“스무 번쯤 된 것 같군. 부작용이 있을까 묻는 거니 잠자코 대답하려무나.”
“아 진짜. 알았어요. 그러니까···.”
구원자의 말을 들은 로난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찔한 피비린내가 사방에서 풍겨 오고 있었다. 토막이 난 몬스터들의 몸뚱어리가 그의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해주 의식을 끝마친 로난은 곧바로 구원자와 함께 다인하르가 있는 사막으로 이동했다. 작열하던 아지랑이는 차가운 밤바람이 되어 뺨을 스치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가 툭 내뱉었다.
“그냥, 평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