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 괜찮은 부모 >
# A1
“으하···여기도 오랜만이네.”
언덕 정상에 올라온 로난이 기지개를 켰다. 양 떼처럼 포슬포슬한 구름이 파란 하늘을 노니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익숙한 님버튼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도 달라진 게 없군. 그래서 좋은 거지만.’
고향에 오는 것은 거진 반년 만이었다. 바람결에 섞인 풀냄새가 낯익었다. 로난은 몸을 돌려 언덕 위에 자라난 참나무에 손을 짚었다.
“너무 바빠서 통 못 왔수다. 그동안 잘 지냈죠?”
수백 년 동안 님버튼을 굽어 본 거목 아래에는 작은 비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제국어로 또박또박 아로새겨진 이름은 로난이 직접 새긴 것이었다. 그는 세심한 동작으로 비석에 묻은 먼지와 나뭇잎을 툭툭 털어냈다.
“응? 아버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구원자. 아니, 카인이 죽은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배낭을 내려놓은 로난이 비석 옆에 앉았다.
“그래서 여기 경치는 어때, 좀 마음에 드시나?”
로난이 물었다.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이 끝나고, 그는 카인의 무덤을 여기 님버튼에 만들었다. 주마등 속에서 가족과 함께 석양을 지켜보던 바로 그 자리였다.
“확실히 괜찮은 마을이죠. 동생 교육은 실패했지만 집터는 제법 잘 잡았어요. 인정할게요.”
언덕 아래로 시선을 옮긴 로난이 끄덕거렸다. 황제는 역대 공신들이 묻힌 대신전에 시신을 안장하게 해 주겠다 했지만 로난이 거절했다.
푸른 초목과 마을을 굽이도는 강물은 로난이 코흘리개였을 무렵과 달라진 게 없었다. 불현듯 엉덩이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낀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에이 썅. 교복인 걸 깜빡했네.”
아침에 서리가 내렸다가 녹아서 잔디가 젖어 있었다. 아데샨이 빳빳하게 다려준 교복 바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엉망진창으로 젖어들고 있을 터였다. 고민하던 로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어차피 이제는 입을 일도 없는데. 설마 혼나지는 않겠지.”
로난은 결국 그대로 앉아 있기로 결심했다. 아데샨과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고 싶을 때는 다시 꺼내서 입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었다. 비석을 쓰다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뭐, 다른 게 아니라 나 오늘 졸업했어요. 그것도 슐리펜이랑 공동 수석으로.”
배낭을 뒤적거리던 로난이 졸업장을 꺼내 들었다. 고급스러운 종이는 무예과의 수석을 상징하는 금색 테두리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 새끼 더럽게 세졌더라구요. 사랑의 힘인지 뭔지는 몰라도 하마터면 질 뻔했어.”
슐리펜과의 졸업 대련을 회상하던 로난이 헛웃음을 쳤다. 간만에 검을 맞대 본 슐리펜은 이전과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미친놈. 아무리 누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도 정도가 있지. 필레온 전체를 회오리로 휘감아 버리다니.’
다시 생각해도 정신 나간 대결이었다. 로난은 전쟁 이후 처음으로 오러까지 발동해 가며 승부에 임했다.
두 사람의 공격이 관중석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카데미의 모든 마법사가 동원되었다. 그들은 서로 온 힘을 쏟아내고 나서야 제한시간 초과로 무승부 판정을 받았다. 로난이 질렸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장담하는데 그 자식은 일 년 내로 자이파를 꺾을 거에요. 괜히 대륙제일검이 아니지. 뭐, 일단 첫 번째 용건은 이걸로 끝이고···어디 보자.”
별안간 배낭을 뒤적거리던 로난이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달걀만 한 덩어리 하나가 딸려 나와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둘이 술 한잔 마신 적이 없더라고요. 자, 한잔해요.”
얼마 전에 자이파에게 받아온 만년설화 담금주였다. 뚜껑을 개방한 로난은 그대로 내용물의 절반 정도를 비석 위에 들이부었다.
말 네다섯 필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물건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술을 한 번 쭉 들이킨 로난이 입가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크하, 맛이 괜찮죠? 역시 이거만 한 게 없더라고.”
식도가 타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매력이었다. 로난은 술을 홀짝거리며 님버튼을 둘러보았다.
풍경 자체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래도 돌아다니는 사람의 수는 훨씬 더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귀를 기울이면 그들이 흥분에 차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평범한 마을에서 영웅이 셋이나 태어나다니. 땅속에 용이라도 묻혀 있는 건가?”
“여기가 레이디 이릴이 직접 관리했던 감자밭이래요. 에휴, 언제쯤 그분의 스튜를 먹어볼 수 있는 건지. 예약도 받지 않으시니 원.”
“아, 아직 감자가 남아 있을까? 그렇다면 한 알만 슬쩍···.”
“아서요. 듣자하니 여기는 아셀 님의 마법으로 지켜지고 있대요. 발을 들이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어 버릴 걸요?”
대부분은 로난과 이릴, 아셀의 고향을 구경하기 위해 온 이들이었다. 세 사람은 이미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어 온 대륙에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사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난이 픽 웃었다.
“뭐 구경할게 있다고 온담. 참 할 짓 없는 사람들이야.”
과거에 로난이 살았던 집은 영웅의 생가니 뭐니 해서 관광객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술을 한 모금 더 들이킨 그가 묘비에 등을 기대 누웠다.
바람이 거센지 하늘의 양 떼들이 제법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취기가 올라온 지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로난이 입을 뗐다.
“있죠. 저도 아버지가 됐어요.”
쏴아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아데샨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하기는 한데···뭐, 어쨌든.”
애가 뱃속에서 얼마나 있어야 나오는지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기뻐서 폴짝폴짝 뛰던 아데샨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로난이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제기랄, 아이를 가질 생각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요.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겠죠. 이상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아데샨도 곤란할 테니···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절대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로난이 새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실제로 아데샨과 동거한 이후의 나날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대로라면 누나보다 제가 먼저 결혼하게 생겼어요. 빌어먹을, 믿어져요? 술 처먹고 막사에 오줌이나 갈겨 대던 이 망나니가 유부남이 되다니···그래서 말인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가정을 꾸리다니. 첫 번째 삶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은 술을 마저 비운 로난이 게워내듯 말했다.
“제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인은 이미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이 말을 걸어 봐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로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때는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카인은 그럭저럭 좋은 아버지였다. 짧은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그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추억을 로난의 가슴 속에 남겨 놓았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잠깐 로난의 눈앞이 부옇게 물들었다.
“에잇, 빌어먹을.”
하늘로 시선을 옮긴 로난이 눈을 깜빡였다. 누구보다 멋진 최후를 맞이한 사람 앞에서 쪽팔린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한참 더 자리에 머무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슬슬 가 볼게요. 아데샨이 기다리고 있어서.”
로난이 빈 술병을 배낭에 챙겼다. 주변의 풀을 정리한 그가 언덕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다음에는 손주랑 같이 올지도 몰라요.”
로난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배낭에서 떨어진 구체는 마지막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언덕을 내려가던 와중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로난!”
“엉?”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아데샨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이 먹물 적신 붓처럼 살랑거리고 있었다.
“금방 내려간다니까 왜 올라왔어. 몸도 무거우면서.”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다녀올 테니 찻집에서 코코아나 한잔하고 있으라 말했는데.
성큼성큼 다가간 그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아데샨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옷깃을 여민 그녀가 눈웃음쳤다.
“아이 참, 아직은 괜찮다니까. 하여튼 로난은 과보호가 너무 심해.”
“그래도 조심해야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하지만 우리 애한테 아빠의 고향을 보여 주고 싶었는걸. 그치? 너도 보고 싶었지?”
아데샨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평소에 맵시 있게 붙는 옷을 즐겨 입던 그녀였지만, 아이를 가진 뒤부터는 언제나 펑퍼짐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머니인가.’
로난은 소리 없이 감탄을 흘렸다. 아직 배도 부르지 않았는데 이런 정성이라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로난이 안주머니에서 담뱃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양 끝을 붙잡고 부러뜨렸다. 콰직! 경쾌한 소리에 놀란 아데샨이 눈썹을 치켜떴다.
“가, 갑자기 왜?”
“너랑 애한테 안 좋잖아. 나도 슬슬 끊어야지.”
로난이 말했다. 벙쪄 있던 아데샨이 배시시 미소지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우리가 먼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어. 분명 슐리펜이랑 이릴 언니가 더 빠를 줄 알았는데.”
“그 자식은 한참 멀었어. 아직 같은 집에도 안 사는데 무슨.”
“후후, 그래도 정식으로 약혼한 게 어디야.”
아데샨이 팔짱을 더 세게 끌어당겼다. 이릴과 슐리펜의 교제는 그들뿐만이 아닌, 제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최고의 가십거리 중 하나였다. 친구들의 면면을 떠올리던 로난이 낄낄거렸다.
“차라리 가능성이 있는 건 아셀이지. 마르야가 어디 보통 애냐? 그 엄청난 젖탱이에 매일같이 찍어 눌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불현듯 말을 잇던 로난이 입을 다물었다. 바로 옆에서 오싹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옆을 슬쩍 돌아보자, 과연 아데샨이 도끼눈을 치켜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미안합니다. 가슴. 젖탱이가 아니라 가슴.”
“응. 그래야지.”
로난의 황급한 정정에 아데샨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아이 앞에서는 비속어를 자제하기로 한 약속을 잠시 잊고 말았다. 자신의 가슴을 내려본 그녀가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혹시 내 걸로는 부족하다던가 이런 건 아니겠지? 나비로제 교관님이나 마르야만큼은 못해도 나도 제법···.”
“설마요 마님. 너무 크면 오히려 애도 부담스러워 할 겁니다요.”
“좋아. 그거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이구나.”
아데샨이 킥킥거렸다. 두 사람은 어느덧 강가에 도착했다. 하늘과 같은 색을 띤 수면 아래로 송어가 무리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막 뗏목에 오르려던 찰나였다.
“있지. 로난.”
“엉?”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강물을 바라보는 아데샨의 눈빛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십만 명의 연합군을 지휘하며 함께 세상을 구했던 그녀였지만,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강렬한 기시감에 로난의 눈이 커졌다.
‘아하. 이런 기분이었나.’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로난이 픽 웃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살아 있는 자신은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었다.
“그럼. 당연하지.”
로난이 아데샨의 손을 잡았다. 불안해하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함께 뗏목에 올라탄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린 괜찮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거야.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