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2. 꿈을 마시는 새(1) >
#A2
“썅···도대체 어디에 흘린 거야?”
로난이 툴툴거렸다. 그는 이른 꼭두새벽부터 님버튼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아벨과의 싸움이 끝나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구체를 잃어버린 탓이었다.
‘하여튼 뭔지도 모르겠는 게 속을 썩여요.’
바로 다음 날 깨달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획득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쉬이 버릴 물건은 아니었다.
다른 곳은 전부 뒤져 봤으니 이제 남은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새벽의 어스름한 공기 속에서 참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카인의 무덤가에 다가가던 와중이었다.
“휘이잇!”
“씨발!”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로난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마터면 뒤로 넘어져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로난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출처 모를 괴성은 분명 카인의 묘비 앞에서 들려왔다. 바로 근처까지 접근하자 낯익은 덩어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어 비늘처럼 까슬거리는 표면. 틀림없이 자신이 잃어버린 물건이었다. 그것을 집어든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조금 커지지 않았나?”
****
로난이 바렌을 찾아간 것은 그날 오후였다. 바렌이 기거하는 필레온 13탑은 네뷸라 클라지에와의 전쟁 당시에도 기적적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다. 노크를 두어 번 한 로난이 문고리를 당겼다.
“안녕. 바렌.”
집무실의 문을 열기 무섭게 달콤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키가 3m에 달하는 웨어라이온은 오늘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쿠키를 굽고 있었다. 로난과 눈이 마주친 바렌이 화색을 띠었다.
“오오, 세상을 구한 영웅이 오셨군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좀. 어째 살이 더 쪘어.”
“허허허. 살이 아니라 행복이라 불러 주시지요. 덕도 괜찮고요.”
바렌이 웃었다. 무성한 갈기가 살 오른 볼살과 함께 푸들거렸다. 체구가 작은 인간은 텐트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한 스웨터가 그의 몸에 입혀져 있었다.
‘빌어먹을. 누가 보면 임신한 줄 알겠군.’
꼴사나운 모습에 로난이 킥킥거렸다. 이제 바렌은 정말 중요한 행사가 아니면 정장을 입지 않았다. 각이 잡혀 있던 근육질 몸뚱어리는 2년 전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후덕해져 있었다.
그의 웨어 피그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것은 로난과 친구들이 졸업학기에 들어선 이후였다. 바렌은 결혼 생활이 행복해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로난은 그것이 특급 모험 동아리의 패악질로 말미암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사라져서라고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아내분은요? 아직 군인이던가?”
“아아, 네메아는 올해 부로 전역하고 영지에서 작물 재배 감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결국 관리직이라 그런지 적성에 아주 잘 맞는다는군요.”
바렌은 다과가 담긴 쟁반을 든 채 소파에 앉았다. 푸끼이익! 엉덩이의 굴곡을 따라 꺼진 좌방석이 이제 그만 죽여 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바렌은 일 년쯤 전에 자이파의 부관이었던 네메아 소령과 결혼식을 올렸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바렌은 정말 필레온, 아니 제도에서 제일가는 멋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 손질된 갈기는 언제나 윤기가 흘렀고, 그의 외출복은 심심하면 제국 패션 잡지의 한 면을 차지했었다.
그뿐인가. 특제 포션의 보급으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올린 바렌은 브린힐스 평야의 절반을 추가적으로 하사받았다. 사업의 규모를 늘린 그가 대륙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잘나가던 신사가 이런 배 나온 아저씨가 되어버리다니. 유부녀가 되고도 변함없는 미모를 자랑하는 네메아와 비교하면 너무한 수준이었다. 바렌의 뱃살을 응시하던 로난이 입을 열었다.
“아내가 사기 결혼에 당했다면서 구박하지는 않아요?”
“허허허. 오히려 이전보다 듬직해졌다면서 좋아하던걸요. 로난 학생···아니, 이제 학생이 아니군요. 어쨌든 덕분에 참 좋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바렌이 웃었다. 로난으로서는 참으로 못마땅했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이 있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가 주먹만 한 구체를 꺼내 들었다.
“행복하다니 다행이네요. 저기, 시간 괜찮으면 이거 좀 봐 줄 수 있어요?”
“음? 그게 뭐죠?”
“예전에 아벨과의 싸움이 끝났을 때 주머니에 있던 물건이에요. 심상치가 않아서 교수님한테 가져온다 가져온다 했는데 결국은 까먹어 버려서···.”
로난이 바렌에게 구체를 건넸다. 원래대로라면 2년 전에 보여줬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구체를 살피던 바렌이 침음을 흘렸다.
“흐음···이건 정말 정체가 짐작이 안 가는군요. 마나는 딱히 느껴지지 않지만 일반적인 광석은 또 아닌 것 같고. 이렇게 신기한 재질은 시타의 알껍질 이후 처음 봅니다.”
“그쵸? 저도 그때가 떠올라서 들고 왔어요. 생김새가 꼭 알 같기도 하고.”
로난이 주억거렸다. 확실히 정체불명의 구체에서는 시타의 알과 비슷한 인상이 느껴졌다. 쿠키를 한 입 씹은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꿈새의 알이 아닐까요? 그게 왜 제 주머니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오, 꿈새라···흥미로운 주장이군요. 혹시 괜찮다면 제가 연구를 좀 해 봐도 될까요?”
꿈새라는 말을 들은 바렌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그의 집무용 책상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마르페즈가 눈을 떴다.
-피이?
파랗고 폭신폭신한 깃털은 여전했다. 물 위를 달리는 꿈새는 바렌과 수십 년을 함께 지내온 동반자였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살이 쪄서 부피가 1.5배 정도 늘어난 꼴이 인상적이었다.
“얼마든지요. 그럼 저는 잠깐···”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끊은 지 고작 하루가 지났건만 금단 증상 때문에 손이 벌벌 떨려왔다.
‘바람이라도 쐬어 줘야지 원.’
역시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집무실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끼이익.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익숙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로난. 여기 있었나.”
“나비로제 교관님?”
“오랜만에 보니 좋군. 잘 지냈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참혹하리만치 망가진 바렌의 몸뚱어리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오히려 예전보다 훌륭해진 몸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들어간 곳과 나온 것이 명확한 것이 제복 따위로는 감출 수 없었다.
‘이래야지. 사람이 행복하다고 망가지면 안 돼.’
마음속으로 엄지를 치켜든 로난이 히죽 웃었다. 그가 절대로 자기는 바렌처럼 안 될 거라며 의지를 다지던 차였다. 나비로제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웠다.
“그렇겠지.”
“예?”
뭐라 할 새도 없었다. 콰직! 순식간에 간격을 좁힌 나비로제가 로난의 복부에 정권을 꽂아 넣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그의 몸이 앞으로 굽었다.
“커억!”
“이 괘씸한 놈. 따라와라.”
이어서 날아온 손아귀가 로난의 귀를 붙잡았다. 코코넛도 뚫어 버리는 검지와 엄지는 다 큰 남자를 막 잡아올린 연어처럼 몸부림치게 할 위력이 있었다. 나비로제가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갸아아아악! 나 좀 살려줘요 바렌!”
로난이 애절하게 비명을 질렀지만 연구에 집중하는 바렌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비로제는 13탑의 옥상에 이르러서야 로난을 놓아 주었다. 오후의 하늘 아래로 북적거리는 교정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쯤이면 괜찮겠지. 날이 좋군.”
“젠장,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간신히 풀려난 로난이 버럭 소리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귓불에는 아직도 손가락이 집혔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비로제가 말했다.
“다 들었다. 이 발랑 까진 것.”
“듣다니, 누구한테 뭘 들었는데요?”
“아데샨의 소식을 들었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를 가지다니. 네게도 입이 달려 있다면 어디 변명해 봐라.”
상상치도 못한 말에 로난이 헛숨을 들이켰다. 난간 너머로 선선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난 분명 아무한테도 안 말했는데.”
“본인이 말하더군. 이름을 뭐로 짓는 게 좋겠냐고 내게 물어봤다. 그래서 고민해보고 다시 말해주겠다 대답했지.”
별안간 나비로제가 품에서 담뱃대를 꺼내들더니 입에 물었다. 끊은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시 피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연기를 보니 다시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남부 토루바 산이네요.”
“그래. 역시 고향의 땅에서 자란 이파리가 입에 맞더군. 한 번 피겠나?”
“아뇨. 금연 중이라.”
로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빼앗아 피고 싶었지만, 지금도 태교에 매진하고 있을 아데샨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마음가짐은 쓸만하군. 실수로 생긴 건 아니라 이건가.”
피식 웃은 나비로제가 담뱃불을 껐다. 아무래도 금연의 이유를 눈치챈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로난. 아데샨은 내 딸이다.”
“···예?”
“비유적인 의미다. 너도 알겠지만 그 아이는 내게 특별해.”
로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필레온의 학생 중에는 아데샨과 나비로제를 혈연 사이로 아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특별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다. 징그러운 사내놈이라 아데샨처럼 자식으로 보이지는 않지만···나는 너희 연인이 세상의 누구보다 행복하기를 바란다.”
“어···고마워요. 그럼 저는 왜 맞은 거에요? 과속 때문에?”
로난이 물었다. 아직도 뱃속이 징징 울리는 것 같았다. 험악했던 도입부와는 달리 대화 자체는 평범하게 훈훈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있지만···그 기쁜 소식을 말해주지 않은 게 괘씸해서 한 방 먹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알려줬으면 오죽 좋았겠느냐. 나름 도움을 줄 수도 있거늘.”
“으음. 확실히 교관님한테는 말할 걸 그랬네요. 그런데 지금까지 계속 독신 아니었어요? 분명 그때 알몸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처음이라···컥!”
다시금 날아든 나비로제의 주먹이 로난의 배에 꽂혔다. 뱉고 나서야 맞을 만한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서 일부러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젠장,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줘 놓고서.’
같은 자리를 또 맞아서 더 아팠다. 나비로제가 조금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거랑 별개로 도와줄 수 있는 점이 있는 법이다. 일단 같은 여자니까.”
“허윽, 그러문입죠···제가 잘못했습니다.”
“됐다. 다른 것보다 아이를 가진 것을 실수 취급하지 않아서 기쁘다. 그랬다면 정말로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잠시 나비로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섬뜩한 살기가 암록색 눈동자를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 난간을 붙잡고 헛구역질하던 로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요. 제 여자인데요.”
“···역시 너는 괜찮은 놈이야. 엄살을 다 떨었으면 이제 일어나서 내 선물을 받아라.”
“선물이요?”
몸을 일으킨 로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비로제가 난간에서 물러나 옥상 중앙에 섰다. 마치 교정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래. 오직 너만이 이것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지. 나는 이제 수업에 들어가 봐야 하니 우선은 딱 한 번만 보여주겠다.”
“네? 그게 무슨···”
로난이 눈살을 찌푸렸다.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보여준다니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비로제가 천천히 대태도를 뽑아들었다.
“핵심은, 네가 포식자라는 것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말에 로난이 질문하려는 차였다. 화아아악! 갑자기 그의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로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익숙한 불쾌함이었다. 몸 마디마디가 녹이 슨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감이 서서히 시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고르던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비로제는 사라지고 거대한 독사 한 마리가 그녀가 있던 자리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하지만 언젠가 쓸 날이 올지도 모르지.”
뱀이 말했다. 나비로제를 검성으로 만들어 준 그녀의 오러, 만사였다. 이전보다 훨씬 커진 뱀의 몸집에서 그녀의 성장을 알 수 있었다.
“교관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로난이 뭐라 말하려던 차였다. 콰아아앙! 어디선가 굉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주변이 밝아졌다.
“제기랄, 뭐야?!”
“음···!”
화들짝 놀란 로난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나비로제가 자세를 잡고 있었다. 주변이 완전히 밝아지고 드러난 옥상의 모습에 그들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시타?!”
“뺘아아아···뺘이?”
어디선가 튀어나온 시타가 배를 까뒤집은 채 기절해 있었다. 덩치가 하도 큰 탓에 네 장의 날개는 난간 너머로 벗어나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나비로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너한테 오려다가 만사의 범위 내에 들어온 모양이군. 미안하다.”
“튼튼하니까 그건 괜찮아요. 그런데 이 자식···.”
로난이 말꼬리를 끌었다. 시타의 양쪽 볼이 도토리를 머금은 다람쥐처럼 부풀어 있었다. 과연 입안을 뒤적거리자 무언가 잡혀 나왔다. 노란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조각상이었다.
노란 종이에는 붉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는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비로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이건···신대륙의 물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