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3. 꿈을 마시는 새(2) >
#A3
“신대륙이요?”
“그래. 바다 저 멀리 있는 동방의 대륙 말이다. 여기 붙어있는 종이들은 틀림없이 그쪽의 나라에서 쓰는 물건이야.”
나비로제가 끄덕였다. 그녀는 이 요강에 담갔다 뺀 것처럼 생긴 종이가 ‘부적’ 이라 부르는 마법 스크롤의 일종이라 설명했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마나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하네. 아예 처음 보는 문자에요. 교관님은 읽을 수 있어요?”
“나도 모른다. 신대륙과의 교류가 시작된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전쟁이 끝난 이후에나 정식으로 소통을 시작했으니.”
“아하.”
흥미로운 정보에 로난이 눈썹을 으쓱였다. 내륙에서 벌어지는 일만으로 충분히 바빴던 나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시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런데 잠깐만, 그럼 이 자식이 바다 건너 신대륙까지 다녀왔다는 거 아니에요?”
“아마 그렇겠지. 어디서 이런 걸 물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는 꽤 큰일이 났겠군. 보통 이런 조각상이나 부적은 무언가를 막아 놓는 데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염병, 아주 그냥 세계 단위로 민폐를 끼치는구만.”
로난이 궁시렁거렸다. 시타의 덩치가 커지면서 활동 반경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시타를 툭툭 쳤다.
“얌마, 그만 자고 일어나.”
아무래도 정황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만사에 제대로 당한 시타는 여전히 헤롱헤롱해진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무리 흔들고 꼬집어 봐도 마찬가지었다.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새삼 만사의 사기성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시타가 이러는 건 일전에 남부 전쟁터의 피를 모조리 마시고 만취한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숨을 내쉰 로난이 칼자루를 잡아당겼다.
“에휴, 내 팔자야.”
아무래도 비장의 수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로난은 손가락 끝을 살짝 베서 시타의 입에 핏방울을 흘려 넣었다. 머지않아 입맛을 짭짭 다시던 시타가 눈을 떴다.
“뺘아···뺘아아?”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잘 하는 짓이다.”
로난이 고개를 내저었다. 덩치가 커져도 어째 하는 행동은 달라진 게 없었다. 물을 털어내는 개처럼 고개를 휘적거리던 시타가 똑바로 몸을 일으켰다. 로난이 조각상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너 이거 어디서 물고 왔어. 엉?”
“뺘우웅?”
“얌마. 이럴 때만 말 못 알아듣는 척 하지 말고. 너 정말 신대륙까지 다녀온 거야?”
“뺘아아!”
로난이 되묻자 시타가 빠르게 날개를 파닥거렸다. 동작이 촐싹맞은 것이 확실한 긍정의 의미였다. 퉤엣! 갑자기 벌어진 시타의 입에서 처음 것과 비슷하게 생긴 조각상 대여섯 개가 더 튀어나왔다.
“뺘아! 뺘!”
“아. 제기랄.”
로난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조각상 가족은 죄다 부적인지 뭔지 하는 종이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보통 위험한 존재를 봉인하기 위해 쓰인다고 했던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시타는 꼭 굉장한 선물이라도 준비해 온 사람처럼 가슴을 내민 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천히 마른 세수를 한 로난이 나비로제를 돌아보았다.
“···있죠. 교관님.”
“말해라.”
“개가 잘못하면 책임은 견주에게 있겠죠?”
“그렇지.”
“빌어먹을. 첫 해외 여행을 이딴 식으로 갈 줄 몰랐는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시타로 인해 무언가 일이 벌어진 이상 책임을 지고 수습해야 했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국제 문제로 번질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신대륙까지 가야 하다니. 갑작스레 늘어난 일에 로난이 신음하던 와중이었다. 문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 계셨군요 로난 님.”
“엉?”
로난이 고개를 돌렸다. 긴 머리를 뒤로 땋아 묶은 사내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줄 달린 안경과 옆구리에 끼워진 두꺼운 서적이 인상적이었다. 웃는 낯을 바라보던 로난이 눈썹을 치켜떴다.
“너 설마 발루스냐?”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그렇기는 한데···이런 시발.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로난이 실소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의 징벌병 동기이자 언젠가 카리볼로에서 빼내준 밀렵꾼 발루스였다.
로난은 백수제에서 그를 붙잡아 바렌의 조수로 영입시켰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잠깐 본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도대체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의문이었다. 오래간만에 본 발루스는 완전히 샌님. 아니, 그런 개념을 뛰어넘는 어엿한 학자가 되어 있었다.
“바렌 교수님의 지원으로 곳곳에 유학을 다녀왔었습니다.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게 참 많더군요. 덕분에 이번에 왕립 학회에도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거 잘 됐네.”
“전부 로난 님 덕입니다. 수 년 전에 정찰 임무를 하다 로난 님과 아셀 님을 만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물론 그때는 죽을 만큼 무서웠지만요.”
발루스가 웃었다. 얌전한 미소에서 전생의 면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천박하기로는 징벌병 중에서도 손에 꼽는 놈이었는데 확실히 사람은 출신보다는 성장 과정이 중요한 것 같았다.
‘나머지 얼간이들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문득 징벌병 시절 함께 놀았던 놈팡이들의 면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졸업도 했으니 슬슬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해도 될 것 같았다.
로난이 번거롭게만 여기던 귀족 작위를 하사받은 것도 그들 때문이었다. 귀족이 되면 영지가 생기고, 합법적으로 사람을 고용해서 일을 시킬 수 있었으니까. 아직 엇나가지 않은 징벌병 동기들을 갱생시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사실 동기 몇 명은 이미 로난의 영지인 발투레에서 지내고 있었다. 실컷 두들겨 맞고 끌려온 그들은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북녘의 대지를 밤낮으로 개간하고 있었다. 물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는 정직하게 지급해 주고 있었다.
‘일단 사람으로 만들고 필레온에 보내 봐야겠어. 교육은 내가 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로난이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하며 턱을 매만지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발루스의 눈과 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사색이 된 그가 어깨를 움츠렸다.
“허어억! 피, 피?!”
“뺘하하하!”
그때 뒤쪽에서 촐싹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타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로난이 윽박질렀다.
“얌마. 당장 그만두지 못해?”
시타가 발루스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했던 장난이었다. 로난이 과다출혈로 죽을 뻔한 발루스를 구해준 것으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었다. 풀이 죽은 시타가 고개를 숙였다.
“뺘우우웅···.”
“사, 살았다.”
발루스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피가 원래 자리로 들어갔다. 옷에 묻은 피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난이 발루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미안하다. 워낙 장난기가 많아서.”
“아, 아뇨···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당해서 놀랐을 뿐이에요.”
“그럼 다행이고.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냐?”
로난이 물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봐서 이야기가 새고 말았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발루스가 손뼉을 쳤다.
“아. 바렌 교수님이 찾으신다는 말을 전하러 왔습니다. 구체의 정체를 알아내셨다는군요.”
“엥? 이렇게 빨리?”
****
로난은 곧바로 집무실로 돌아갔다. 나비로제는 조만간 보자는 말을 남긴 채 수업을 하러 떠났다. 문을 열기 무섭게 바렌이 외쳤다.
“오오. 돌아오셨군요!”
“아잇, 놀래라.”
바렌은 흥분에 찬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로난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끔하던 책상은 어느새 각종 문서와 실험 도구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몸이 지나치게 커진 시타는 머리만 창문 안쪽으로 들이민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시타의 턱을 긁어 주던 바렌이 입을 열었다.
“조사해본 결과 로난 학생 말이 맞았습니다. 구체 내부에서 전해지는 마나 성분이 90% 이상 꿈새와 일치하더군요.”
“뭐야 시발. 진짜요?”
로난의 눈이 커졌다. 대충 질러본 거였는데 맞을 줄은 몰랐다. 바렌은 책상 위에 놓인 구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 육안으로 마나를 감지하지 못한 이유는 껍질이 너무 두꺼워서였습니다. 지금껏 많은 동물을 봐왔지만 이 정도로 두꺼운 건 처음 봤어요.”
“기가 막히는군. 그럼 꿈새의 알이 왜 제 주머니에 있던 거죠?”
“글쎄요. 솔직히 저로서는 그걸 알 길이 없습니다. 알을 획득하실 당시의 기억이 전혀 안 나시는 건가요?”
“으으으음···그러니까···.”
로난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을 감고 시간을 되짚으니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숨이 다하기 직전 로난이 본 풍경은 죽어가는 별의 해안가였다. 찬란한 별무리와 붉은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에서 그는 아벨의 목을 베었다.
‘그래. 내가 그때 손을 뻗었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로난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하얀 모래와 그 위에 놓여 있던 구체를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침음을 흘리던 로난이 눈을 떴다.
“기억 났어요.”
“오오.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주변에 꿈새나 꿈새로 추정되는 생물이 있었나요?”
“아뇨. 대머리들한테 멸망당한 별이라서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멀지 않은 근처에 분명히 뭔가 있었을 겁니다.”
“아니, 진짜 없었다니까요. 저 외의 생물이라고는 아벨 그 새끼밖에···어?”
로난의 눈이 커졌다. 터무니없는 발상이 머릿속에 번득이고 있었다. 아니야 씨발,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구체로 시선을 옮긴 그가 입을 뗐다.
“그러면 설마 아벨 그 자식이 꿈새였다는 거에요?”
···맙소사.”
바렌이 얼어붙었다. 안경 너머의 동공이 점처럼 좁혀졌다. 예상보다 훨씬 진지한 반응에 로난이 되물었다.
“뭐야, 왜 부정을 안 해? 설마 진짜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세상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가 꿈새였다니, 소설도 그딴 식으로 쓰면 욕을 먹을 터였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비운 바렌이 입을 열었다.
“아주···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닙니다.”
“네?”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꿈새는 무언가의 영향을 받아 무궁무진하게 모습을 바꿉니다. 새가 아닌 다른 동물의 외형을 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뿐더러 궁전이나 탑 같은 건물로 변한 사례도 문헌에 남아 있죠. 전례가 없을 뿐, 이론대로라면 지성체로 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무슨···아니 젠장, 진짜로?”
로난이 당혹성을 흘렸다. 이 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작자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아주 부정할 수도 없었다. 불현듯 카인이 해 주었던 옛날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그때.’
카인은 선대 거인 왕의 피를 마시고 소망을 이루어주는 능력을 얻었다. 그는 해당 능력으로 부서진 마을을 복구하고 멸망을 앞둔 나라를 구했지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소망만큼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아벨은 달랐다. 그는 동생을 돌려달라는 카인의 소망대로 되살아났다. 정확하게는 태어나지도 못한 동생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출생부터 기묘한 놈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이 알을 남기고 간 것이 아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난이 말했다.
“그럼 도대체 여기서는 뭐가 태어나는 거야?”
“글쎄요. 이건 저도 정말 짐작이 안 가는군요. 네뷸라 클라지에의 교주를 어버이 삼아 태어나는 존재라니···아하!”
“깜짝이야 시발. 갑자기 왜 그래요?”
갑자기 바렌이 소리를 질렀다.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 그가 서재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는 돌돌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기껏 받아와 놓고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이걸 사용해 보도록 하죠.”
“그게 뭔데요?”
“저와 발루스 군이 모은 정보를 기반으로 세크리트 교수님이 만들어 주신 마법입니다. 꿈새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열쇠가 될 거에요.”
“마법···? 세크리트···?”
쭉 굳어 있던 바렌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세크리트의 이름을 들은 로난이 눈을 좁혔다.
“어쩐지 불안한데. 정확히 뭐 하는 마법인데요?”
“하하, 놀라지 마세요. 이건 무려···”
바렌이 의도적으로 말꼬리를 끌었다. 어째 불안감이 더 증폭되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시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물을 사람으로 폴리모프 시키는 마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