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3. Wedding march >
A13
“제국의 검성이 바뀌었다고요?”
“네. 그때는 정말 멋있었죠. 그게 벌써 반 년도 더 지난 일이라니.”
과거를 회상하던 아데샨이 웃음지었다. 그날 그랜드 서클에서 벌어졌던 검성 결정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하얀 머리카락의 엘프 여인이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한때 구원자를 보필했던 엘시아였다.
그녀는 거진 2년만에 아드렌의 복구 작업을 마치고 대륙에 방문했다. 워낙에 정신 없이 지내서 검성 교체 같은 중대한 사건도 모르고 있었다.
엘시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럼 자이파는 어떻게 된 거죠? 죽은 건가요?”
“아뇨. 황제 폐하께 자유를 약속받고 풀려났어요. 저도 몰랐는데, 원래 검성에서 내려오면 피의 맹약을 파기하기로 했었다나요.”
“어라? 그러면 진작에 아무한테나 져 준 다음에 내려왔어도 될 일 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저희 그이도 말했듯이 확실히 검사들의 세계에는 보통 사람은 이해 못할 기준이 있나 봐요.”
아데샨이 뺨을 긁적였다. 그녀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자이파에게 동일한 질문을 했었다. 돌아온 대답은 ‘차라리 죽고 말지.’ 였다.
“그렇군요···후우, 역시 필멸자들의 세상은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니까.”
“후후, 확실히 엘시아처럼 오래 사는 종족이 보기에는 그럴 것 같아요. 그것도 드래곤들하고 지냈으니까.”
“그래도 가장 놀라운 건 그 아이에요. 이름이 뭐에요?”
엘시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데샨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에게 머물러 있었다.
포대기에 싸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것이 치명적으로 귀여웠다. 심야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은 로난보다 아데샨을 조금 더 닮아 있었다.
“란세. 남부 원주민 말로 검이라는 뜻이래요. 나비로제 교관님이 지어주신 건데, 괜찮지 않나요?”
“너무 예뻐요. 여자애죠?”
“남자에요. 속눈썹이 길어서 오해를 사기는 하는데···”
“아우웅.”
“앗, 일어났다.”
그때 잠에서 깨어난 란세가 눈을 떴다. 엘시아가 움찔거렸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란세의 눈동자는 노을을 닮은 주홍색으로 아롱이고 있었다.
머나먼 과거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색채였다. 갑자기 구원자와 함께하던 나날이 떠오른 탓에 엘시아의 눈앞이 부옇게 변했다. 란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댄 그녀가 싱긋 웃었다.
“안녕 란세. 눈이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나.”
“우웅?”
란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데샨이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내려보던 와중이었다. 끼이익-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그랑시아 가의 집사가 들어왔다.
“곧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아, 고마워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집사가 방을 나섰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그랑시아 저택의 신부 대기실이었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아데샨이 방 안쪽을 돌아보았다.
“언니, 준비 됐어요?”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이릴이 허둥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거대한 거울 앞에 앉아 끊임없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본인의 머리카락처럼 새하얀 웨딩 드레스가 그녀에게 입혀져 있었다.
이미 시녀들이 완벽하게 준비를 해줬는데도 저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긴장한 듯했다. 이릴에게 다가간 아데샨이 싱긋 미소지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언니. 정말 별 거 없어요.”
“그, 그렇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
“그럼요. 저랑 그이 결혼식도 순식간에 끝났잖아요.”
“다, 당시에는 너무 울어서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그랬던 것 같기도···먼저 끝내서 부럽다아···그때 아데샨 진짜 예뻤는데.”
이릴이 울상지었다. 로난의 결혼식 때 아데샨은 웨딩 드레스가 아닌 연합군 지휘관의 제복을 입고 나왔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말 그대로 난리가 났었는데,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 초라한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살핀 이릴이 걱정스레 물었다.
“있지, 지금 나 예뻐?”
“···네?”
한순간 아데샨이 벙쪘다. 말없이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와 엘시아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어이 없는 질문일 터였다.
****
가을 하늘이 드높았다. 가지런히 자라난 나무들은 곧 닥쳐올 겨울에 저항하듯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흩날리는 이파리는 단풍의 색채를 듬뿍 머금고 있었다.
슐리펜과 이릴의 결혼식은 그랑시아 대저택의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광활하면서도 아름다운 영지는 오늘 하루 완벽한 예식장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호화롭게 꾸며진 정원은 대륙 전체에서 온 하객들로 북적거렸다. 각 나라의 귀족이나 황족은 물론 크라티르를 필두로 한 필레온의 관계자들, 대마법사 로르혼과 황제 발론44세까지 친히 행차하여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익숙한 면면을 본 아셀이 헛숨을 들이켰다.
“요, 용왕님?!”
“아아. 용의 도시를 구원해준 마법사구나. 잘 지냈느냐?”
용왕 아지다하카가 손을 흔들었다. 황금 갈기를 연상케 하는 머리카락과 특유의 풍채는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음에도 눈에 띠었다. 그의 옆에는 머리 새카만 중년인이 큼직한 트렁크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간만이다. 메이지 아셀. 인간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즐거운걸.”
“알리브리헤 님···!”
아셀의 눈이 커졌다. 용의 도시에서 인연을 함께했던 블랙 드래곤, 알리브리헤였다. 엘시아와 마찬가지로 거진 2년만에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갑자기 자리에 앉은 그가 가방을 열어젖혔다.
“로난은 어디 갔지? 선물을 들고 왔는데 이거야 원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는군.”
“히에에엑!”
아셀이 기겁했다. 트렁크 안에는 의수와 의족이 한 쌍씩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었다. 길이와 모양을 보아하니 로난의 신체 조건에 맞춘 듯했다.
“그, 그런 물건은 갑자기 왜···!”
“일전에 신세를 크게 졌는데 내가 줄만한 물건이 이거 말고 없더군.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사람 앞날이기도 하고···아, 자네 것도 준비되어 있다네.”
알리브리헤가 웃었다. 그는 신랑과 신부에게 줄 축의금도 이걸로 대신했다고 말했다.
인공 외피까지 붙여서 마감한 탓에 정말로 사람의 팔다리를 잘라 온 것 같았다. 굵직한 침을 삼킨 아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 감사합니다···일단 결혼식이 곧 시작되니까 끝나고 찾아갈게요. 그, 로난은 오늘 주례를 맡아서 저 앞으로 가시면···”
그가 뭐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갑자기 식장 중앙의 무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사 숙녀 여러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힉···!”
“거 술이랑 음식은 나중에 드셔도 되잖아요. 발 달려서 도망치는 것도 아닌데. 중요한 자리니 다들 집중!”
자리에 걸맞지 않는 요란한 외침이었다. 아셀과 두 드래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황금으로 만든 단상 앞에서, 정장을 입은 로난이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주례를 맡은 로난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하니 자기소개는 하지 않겠습니다.”
“말세로군.”
용왕이 탄식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별을 베어낸 검사를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방증하듯 하객 대부분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가 충분히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그가 검지를 뻗어 저택을 가리켰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신랑신부, 입장.”
모두의 시선이 로난이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갔다. 머지않아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이릴과 슐리펜이 걸어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따로따로 입장을 해야 했지만, 손을 잡아줄 아버지가 없는 이릴을 위해서 로난이 낸 꾀였다. 두 사람이 버진 로드에 발을 내딛는 순간, 군중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와.”
한순간 자리에 모인 전원이 숨 쉬는 법을 잊어 버렸다. 결혼 예복을 차려입은 슐리펜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멋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지만, 불행히도 그의 옆에 있는 것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이릴이었다. 두 사람의 입장을 지켜보던 그랑시아 공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둑놈.”
“저 무뚝뚝한 애가 어떻게 이릴 양 같은 여자를 데려온 걸까요. 참 복도 많아.”
그의 아내도 옆에서 거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라지만 옹호할 수 없었다. 지금 이릴이 가진 장악력은 나바르도제가 본모습으로 강림하는 것과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열대어의 지느러미처럼 길고 화려한 웨딩 드레스의 끝단이 길 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바구니를 든 화동 두 명이 다섯 걸음 정도 앞서 나가며 푸른 꽃잎을 길 위에 뿌려대고 있었다.
마침내 단상 앞에 도달한 두 사람이 멈춰섰다. 로난은 잔뜩 긴장한 그들을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릴이 작게 속삭였다.
“로, 로난···어서···.”
그녀는 난생 처음 겪는 부끄러움과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지만 옆에 있는 얼간이보다는 훨씬 나았다. 긴장할 대로 긴장한 슐리펜은 그냥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가관이군.’
로난이 픽 웃었다. 물론 자신도 결혼을 해봤으니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조금 정도가 심했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풀어줄 필요가 있겠군. 잠시 고민하던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식을 진행하기 전에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음?”
그랑시아 공작이 눈썹을 으쓱였다. 이건 대본에 없는 행동이었다. 단상 앞으로 걸어 나온 로난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노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이 자식의 엉덩이를 어떻게 걷어차 줄지만 고민하고 있었죠. 왜냐하면 제 누나를 훔쳐간 천하의 도둑놈이니까요. 지금도 위장이 뒤틀리는 것 같아요.”
“로, 로난···!”
“이건 인정해야 합니다. 제 누나인 이릴 양은 이 별에서 제일 완벽한 여자입니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력도 남다르죠. 제가 죽지 않고 이 자리에 잘난 척 하며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저희 누나가 갖은 고생을 하며 제 똥귀저귀를 갈아 키운 덕이고요. 사실은, 이 순간에도 누나를 데리고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건들거리며 슐리펜에게 다가간 로난이 빈정대듯 말했다.
“그에 비해 이 자식은 어떻습니까. 좀 생긴 것은 인정하지만 그게 전부지요. 누가 쳐다보면 오줌도 제대로 못 누는 섬세한 면은 눈여겨 볼만 합니다만.”
로난이 낄낄거렸다. 슐리펜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그가 한 마디를 하려던 차였다.
“로난. 네놈이···”
“그래도 뭐, 괜찮은 놈입니다.”
말을 끊은 로난이 다시 하객석을 돌아보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주 괜찮은 놈이죠. 적어도 제가 본 수컷 중에는 가장 나았습니다. 종족을 불문하고요. 슐리펜 이 자식의 제일 가는 장점은 다른 게 아닌 약속을 끝내주게 지킨다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쯤 전인가···한번 제가 자리를 길게 비운 적이 있는데, 그때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습니다. 누나를 지켜달라는 약속을 말이죠.”
“그, 그런 약속을 했었어요?”
이릴의 눈이 커졌다. 그녀로서는 전혀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로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슐리펜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혹한의 겨울은 물론 대머리들이 날뛰던 전쟁통에서도. 사실,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가문의 후계자이자, 사상 최강의 검성이라 불리우던 자이파 터르겅을 꺾은 검사이자, 대머리 신봉자들의 마수에서 이 별을 구한 영웅이라는 잡다한 수식어와 업적은 방금 말한 장점에 비하면 똥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니까요.”
어느새 하객석은 조용해져 있었다.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로난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 약속을 하나 더 받아내야겠습니다. 마침 공증인이 되어 주실 분도 많은 게 아주 좋네요. 어이, 괜찮지?”
“···그래.”
슐리펜이 주억거렸다. 무슨 말이 나올지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로난이 그를 마주보았다.
“누나를 행복하게···아니, 취소. 이게 더 좋을 거 같다.”
해줄 말을 고르는게 제법 어려웠다. 잠시 뜸을 들이던 로난이 입을 뗐다.
“둘이 행복해라. 죽을 때까지.”
그리고 미소지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이릴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몇 초를 침묵하던 슐리펜이, 천천히 끄덕였다.
“······맹세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