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4. 아버지와 아들 >
#A14
“음···이 정도면 되겠지.”
업무를 마친 아데샨이 안경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카라벨 상단과의 계약 기간은 5년이 더 연장되었다. 널찍한 창문을 통해 스며든 햇살이 그녀의 집무실을 따스하게 덥히고 있었다.
공룡처럼 거대한 책상 위에는 이번 달에 처리해야 할 각종 안건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 이런 걸 좋아하기도 했고, 필레온의 학생회장으로 있을 때 비슷한 일을 많이 해봐서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문득 아데샨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있는 액자에 닿았다. 작은 사각형 안쪽에는 입맞춤을 하는 이릴과 슐리펜, 그리고 주변에서 꽃을 뿌리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다.
디디칸이 개발해서 이제는 상용화까지 시킨 ‘사진’ 이었다. 해맑게 웃는 자신과 로난을 본 그녀가 픽 웃었다.
“···그리운걸.”
저 날로부터 벌써 십 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는 세월. 영원토록 아가씨로 남아 있을 것 같던 그녀도 이제는 애 딸린 유부녀가 되었다.
아데샨이 만년필을 빙빙 돌리며 과거를 추억하던 와중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응? 란세?”
아데샨이 갸웃거렸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뿌루퉁한 표정의 소년 한 명이 들어왔다. 로난과 그녀의 첫째 아들인 란세였다.
올해로 열한 살이 된 란세는 이르게 찾아온 사춘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짙은 속눈썹이 자신을 쏙 빼닮아 있었다.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아데샨이 되물었다.
“왜 그래, 우리 아들?”
“···엄마는 왜 저런 변변찮은 사람이랑 결혼한 거야?”
“으, 으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따라와봐.”
예상 외의 질문에 아데샨이 당황했다. 쫄래쫄래 다가온 란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갔다. 드넓은 거실에서는 웬 머리카락 덥수룩한 거렁뱅이 한 명이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크어어어···푸우우우···.”
“코오오···.”
얼굴을 덮은 잡지 아래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로난이었다. 올해로 아홉 살이 된 둘째 딸 에린이 그의 품에 안긴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저이도 참. 들어가서 자라니까.”
그 광경을 본 아데샨이 픽 웃었다.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본 란세가 기겁하며 물었다.
“···엄마. 혹시 협박당해서 결혼한 건 아니지? 약점을 잡혔다든가.”
“얘,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엄마가 왜 그랬겠어?”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걸. 엄마는 이렇게 바쁜데, 아빠는 맨날 잠만 자고.”
란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로난의 과거를 자세히 모르는 그로서는 두 사람이 결혼한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봐도 아데샨은 정말 완벽한 어머니였다. 영지 관리를 비롯한 각종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집안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는 무조건 자신이 직접 요리를 만들었다.
당연히 자식들도 끔찍이 여겨서 란세와 에린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자기 관리 또한 철저한지라 절대 애를 둘이나 낳은 유부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더 예쁜 사람을 굳이 찾자면 슐리펜 삼촌과 결혼한 이릴 고모 정도일까.
그에 비하면 로난은 그냥 수염 제대로 안 깎는 아저씨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며 칭송했지만 진상을 아는 그로서는 절대로 옹호할 수 없었다. 란세가 중얼거렸다.
“볼수록 이해가 안 돼. 엄마는 이렇게 바쁜데, 아빠는 맨날 잠만 자고.”
“아빠한테 그런 소리 하면 못써요. 저래 봬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시는데. 매일 늦게 들어오시는 것도 바쁘게 일하시기 때문이잖니.”
쪼그려 앉은 아데샨이 아들의 코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하긴 로난이 업무를 마치고 오는 것은 대부분 란세가 잠들었을 무렵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빠는 정말로 유능한 사람이란다. 우리가 이렇게 웃으면서 지낼 수 있는 건 전부 아빠 덕인걸. 우리 아들, 엄마 말 믿지?”
“흥. 그렇다고 해도 나를 싫어하는 건 확실해.”
“얘가, 그럴 리가 없잖니.”
“···하지만 내 입학식 때도 안 왔는걸. 무예과 수석이었는데.”
란세가 중얼거렸다. 실제로 로난은 아들의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온 가족이 사정을 불문하고 찾아와 축하해 주는 전통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기는 했다.
“그, 그건···.”
나비로제 교장님이 로난은 안 왔냐며 따로 물어보는 바람에 충격이 한결 더 커졌다. 순간 벙쪄 버린 아데샨이 할 말을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후우웅! 발코니로 스며든 바람이 로난의 얼굴을 덮은 잡지를 떨어뜨렸다.
“으윽···아음. 빌어먹을···.”
“아, 일어났다.”
움찔거리던 로난이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부족한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배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딸, 그리고 저 멀리서 도끼눈으로 자신을 째려 보고 있는 아들이 보였다. 늘어지게 하품한 그가 손을 흔들었다.
“하아아암···좋은 아침. 아들.”
“아침은 무슨. 해가 중천이거든요?”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자다가 오줌이라도 지렸냐?”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도대체 언제적 일을 꺼내는 거에요!”
얼굴이 새빨개진 란세가 빽 소리쳤다. 역시 이 사람은 좋아할 수 없었다. 에린을 개인용 소파 위에 내려 놓은 로난이 낄낄거렸다.
“아니면 됐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동생 깨겠다.”
“아버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요! 저는 이제 애 아니거든요!”
“몸에 털도 제대로 안 난 놈이 그런 소리를 해봤자 설득력이 없단다. 그리고 마려우면 똥이건 오줌이건 한번씩 지릴 수도 있는 거···허어억!! 이, 이럴 수가!”
“왜, 왜 그래요?!”
화들짝 놀란 란세가 어깨를 움츠렸다. 언제나 반은 감겨 있던 로난의 눈이 휘둥그레 떠져 있었다. 뭔가 나타난 건가? 그가 무기로 쓸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앞구르기로 아데샨의 앞까지 다가간 로난이 그녀의 손을 쥐며 말했다.
“천사가 나타난 줄 알았는데 우리 여보였군. 이거 실례했소.”
“아이 참. 당신도···.”
아데샨이 얼굴을 붉혔다. 로난은 그대로 쥐고 있는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공주님을 안듯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데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혀를 쯧쯧 찼다.
“머리카락이 상했군. 얼굴도 피로에 쩔어 있고···이 조그만 괴물 때문에 고생이 많지?”
“누구를 두고 괴물이라는 거에요! 엄마를 내려놔요!”
다리를 뻗은 로난이 란세의 엉덩이를 툭툭 찼다. 발끈한 란세가 달려들려 했지만 발에 가로막혀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아데샨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냥 조금 피곤한 것 뿐이야. 그리고 고생이라니, 전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
“이 얼마나 고운 마음씨인가···장담할 수 있어. 내 인생 최고의 사건 두 개중에 하나는 당신에게 결혼하자 말한 거야.”
“나머지 하나는 뭔데?”
“당신이 내 청혼을 수락한 거지. 자, 가자!”
“꺄아악! 지, 지금은 안 돼!”
한 바퀴를 돈 로난이 안방으로 걸어가는 척을 했다. 행복한 비명을 내지른 아데샨이 그의 어깨를 탁탁 쳤다.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광경에 란세가 헛구역질했다.
“우웩.”
“아들. 미안하지만 에린 데리고 잠깐 나갔다 올래? 한 시간···아니, 두 시간만 놀다 와.”
별안간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로난이 란세에게 은화 한 닢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금슬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간혹 벌어지는 이벤트였다.
란세는 쥐며느리의 시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소파에서 자고 있는 여동생을 업어 들었다.
“우웅···오빠?”
“나가자 에린. 이 집구석은 가망이 없어.”
“우우웅···?”
에린은 영문도 모른 채 그에게 업혔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란세의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렸다. 문을 나서기 전 멈춰선 란세가 로난을 돌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아버지가 미워요.”
“그러냐. 나는 네가 좋은데.”
“이이익···!”
새하얀 얼굴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뭐라고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란세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 거칠게 문을 닫았다.
쾅! 현관 너머로 씩씩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로난이 피식 웃었다.
“거 녀석 성질하고는. 누구를 닮아서 저러는지.”
“후후, 당신 어렸을 때랑 판박이인걸. 물론 얼굴은 나를 더 많이 닮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이지. 얼굴도 나를 닮았으면 분명 온갖 곳에서 시비를 걸렸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이 얼굴이 좋은걸. 이제 조금 더 자야지?”
아데샨이 로난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거칠거칠한 수염과 짙은 눈그늘이 그가 겪는 노고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볍게 입맞춤한 로난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고마워. 한 시간만 더 잘게.”
“그러지 말고 푹 자. 최근들어 계속 과로하고 있잖아. 이러다가 쓰러질까 걱정돼.”
“됐어. 일인데. 그···란세 녀석이 많이 서운해하나?”
로난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 그 역시 아들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 아데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응. 다른 건 몰라도 입학식 때 못 간 거는 상처가 컸나 봐. 이대로라면 당신을 한동안 원망할 것 같은데···정말 사실을 안 말해줘도 되겠어?”
“당연하지. 절대로 말하지 마. 저 또래의 사내놈들은 경각심보다는 모험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니까.”
로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미움을 잠깐 사고 마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데샨이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지. 범인은 잡았어?”
“아직. 수사망은 좁혀 나가고 있는데 결정적인 실마리가 안 잡히네. 아셀 녀석도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걸 보면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아.”
로난이 혀를 찼다. 그는 최근 제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 실종 사건을 추격하고 있었다. 근 한달간 백 명에 가까운 남녀가 사라졌는데,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아 시민 전체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부탁도 받지 않은 그가 수색대에 참여한 이유는 간단했다. 실종자의 절반가량이 아이였으니까. 로난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온갖 거지 같은 일을 겪어왔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야. 흔적도 안 남고, 실종자들의 생사도 불분명하고. 도대체 어떤 새끼가 범인이지?”
“하긴 그림자의 마나로도 추적이 안 되니···.”
“됐어. 당신은 걱정하지 마.”
아데샨이 침음을 흘렸다. 십 년 내내 평화에 찌드는 바람에 감각이 무뎌진 걸까. 그녀를 포옹해서 안심시켜준 로난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우리 애들은 내가 지킬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