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평행세계의 자신들. 그 눈빛들이 형형했다.
이연우는 늦장 부리지 않고 바로 입을 열어, 이상목록을 읊었다. 또한 지우개와 싸우게 된 이유까지 덧붙였다.
“이 목록을 공개하자마자 멸망주의자들이 습격했습니다. 이 점을 유의하세요.”
네 명의 이연우는 열심히 이상목록을 되뇌며 머릿속에 그 정보를 새긴 뒤,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이연우들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같은 자리에 있기는 꺼림칙한 자신들. 은근한 경계와 긴장이 폐허 위로 내려앉았다.
“….”
“….”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때, 골드버그 클럽 이연우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손목에 찬 시계가 잘그락 흔들린다.
“평행세계의 나를 소환하는 판정을 굴렸죠? 우리 이런 건 돌리지 맙시다. 상도덕이 있지, 사람을 위험한 자리에 부르면 안 되죠.”
“그게 맞지.”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세계의 이연우를 노려보았다.
세상에, 갑자기 지우개 앞으로 소환되었을 때, 주사위가 취소까지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물론 그 대가로 이상기후 해결책을 받았지만, 예고 없는 위험은….
이연우가 당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기분 나쁜 일이다. 그는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사고입니다. 애초에 평행세계 같은 건 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뭘 굴렸길래.”
“미래의 나를 불렀는데, 대성공이 갑자기 떠서….”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여기 미래인은 없는데요?”
“아마 그쪽에서 거부한 거 같습니다.”
“아. 거부.”
모든 이연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방적인 소환은 정말 위험하다.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많은 황금을 바쳐 황금만능주의로 보호를 두르든, 악마의 권능을 빌리든, 각자 방어법을 떠올릴 때, 이연우가 슬쩍 말했다.
“그보다 우리 주사위 사용법을 공유합시다. 이왕 모였는데.”
“좋은 생각입니다. 아까 보니까, 다른 판정을 굴리던데-”
목소리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사람이 사라졌다. 돌연 나타날 때처럼 예고 없이 순식간에 돌아갔다.
홀로 남은 이연우는 멍하니 그들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이제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들은 사라지고 폐허만 남았다.
지우개가 마구잡이로 휘젓고 지나간 산자락.
인위적으로 갈라진 구름은 자연스럽게 흐트러지고, 좌우로 나뉜 산은 무너져내리며 산골을 흙더미로 채웠다.
그리고 정보부.
지하 본부의 중심을 수직으로 긋고 지나간 삭제의 흔적. 살아남은 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각자 할 일에 집중했다. 구덩이를 빠져나갈 길을 만들고, 다른 부서에 연락을 돌리고,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고….
문득 힘이 빠졌다. 긴장이 확 풀리며, 팔다리가 추욱 늘어졌다. 이연우는 그제야 실감을 느꼈다.
“끝났구나.”
이상기후는 해결되었다. 가장 위험한 멸망주의자의 습격도 막아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것이었다.
이상기후가 물러난 지구. 정상으로 돌아올 회사. 생존 준비를 그만두고, 세력 다툼에 집중할 집단들.
그리고 변함없이 나타날 이상異常.
이연우를 맞이하러 다가오는 정보부 요원을 보며, 이연우는 웃었다.
***
시간이 지난다.
멸망주의자와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이상개체 몇 개를 빼앗겼지만, 이상기후는 완전히 사라졌다.
회사는 보존계획을 취소했다. 다른 곳에 투자했던 자원들이 하나둘 지구로 돌아오고, 회사의 운영이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집단들도 마찬가지. 다시 지구로, 사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연우.
이연우는 원룸의 바닥에 앉아, 사람 하나를 보고 있었다.
검은 정장을 빼입고 돌연 원룸으로 찾아온 남자 하나. 그는 원룸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이연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연우 님. 본사에서 나온 마크 정입니다.”
“본사에서 왜….”
이연우가 에코백을 슬며시 무릎 옆으로 당겼다. 한 손이 에코백에 들어간다.
본사라고 하면 막연하게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시계수리공 일도 걸리고, 망설임 없이 보존계획을 진행하던 비인간적 일 처리도 걸린다.
말 그대로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을 이미지.
마크 정은 미소를 지었다.
“이연우 님의 실적을 치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
마음이 놓인다. 이연우는 편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그리고는 기대를 품은 눈으로 마크 정을 보았다.
“이상기후의 해결법을 찾아 공개하고, 그 수배자까지 사살하여 지우개까지 회수하셨죠. 이건 회사가 무시하면 안 되는 실적입니다. 본사는 당신에게 보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보상을 주기로 했나요?”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묻자, 마크 정은 서류 가방을 열어, 백지 한 장을 꺼냈다.
중간의 식탁에 놓인 백지 한 장.
이연우는 백지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백지 가지고 뭐하냐고.
마크 정이 말했다.
“원하는 것은 전부 쓰십시오. 제한은 없습니다.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이뤄드리겠습니다.”
“어.”
이연우는 단말마를 뱉고는 손을 벌벌 떨었다. 차마 종이를 만지지도 못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종이를 노려봤다.
단순한 종이지만, 종이가 아니다. 회사의 무제한 소원권. 이건, 이상異常이나 마찬가지다.
‘뭘, 뭘 쓰지?’
제한이 없으니, 오히려 요구를 쓰기가 힘들다. 이연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크 정이 옆에서 편안하게 말을 더했다.
“아무거나, 전부 가능합니다. 추가 조치 없이 퇴사하여 빌딩 몇 채를 받아도 됩니다. 경호팀을 요구해도 되고.”
“퇴사는 안 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이연우는 망설이다가, 볼펜을 찾아 쥐었다. 그는 땀으로 젖은 볼펜을 움직여 천천히 글자를 적어 내렸다.
- 조사원 처우 개선 : 총기 소지와 이상장비 제공, 기타 업무효율 향상을 위한 지원.
퇴사는 생각한 적 없다. 회사원으로, 조사원으로 일할 것이다. 그러니 조사원의 처우 개선은 필수다.
마크 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기는 정부와 협의해야해서 시간은 걸리겠지만,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요구사항도 쓰십시오.”
이어, 회사원으로 일해야 하는 이유를 연달아 적었다.
- 정보 우선 제공 : 보존계획이나 이상기후 같은 위기정보를 우선 제공.
이연우는 이번 일을 겪으며 확실히 알았다.
정보가 힘이다. 만약 이상기후를 몰랐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멸망한 세상을 떠돌았을 것이다. 이런 정보를 알려면 회사에 붙어 있어야 했다.
조금 과한 요구 같기도 한데. 볼펜을 멈춘 이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가능할까요?”
“이건 요구하지 않아도 저희가 먼저 알려드렸을 겁니다.”
마크 정이 천천히 설명했다.
“이번 일로 본사는 당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멸망시나리오는 많고, 물론 진행 중은 아닙니다만, 언젠가는 현실에서 진행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품에서 신분증 하나를 꺼내, 백지 옆에 둔다. 이연우가 보니, 이연우의 신분증이었다.
특수조사원 이연우
“당신은 이제 본사 소속 조사원입니다. 평소에는 한국지사의 조사원 업무를 수행하다가, 저희가 멸망시나리오를 드리면 시나리오를 자유롭게 조사하십시오.”
“….”
이연우는 허탈한 얼굴로 신분증을 보았다.
퇴사 생각이 갑자기 솟구친다. 내가 살려고 조사하는 것과 위에서 시켜 조사하는 건 느낌이 달랐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마크 정이 특수조사원에 대해 뭐라고 계속 설명했다.
“한국지사의 명령을 무시할 권한이 있으며, 격멸대대를 호출한 권한이 있습니다. 또한 정보부에 정보를 요청할 수 있고-”
“예, 그건 나중에 서류로 알려주세요.”
흥분이 가라앉은 이연우는 자유롭게 펜을 놀렸다. 펜이 쓱쓱 백지를 지나친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요구.
‘집 한 채 받아서 이사도 하고, 보상금도 넉넉하게 받고…. 더 요구할 게 없는데?’
절반도 넘게 남아 있는 백지.
이연우는 천천히 백지를 밀었다. 마크 정은 백지를 들어 요구사항을 쭉 읽었다. 생각보다 소소한 요구들.
그는 지나가듯이 가볍게 물었다.
“지우개는 요구 안 하십니까? 원한다면 이연우 님에게 드릴 텐데요.”
“지우개는 필요 없습니다.”
이연우는 정말로 미련이 없었다.
그는 주사위를 믿었다. 미래 이연우가 주사위로 도달할 수 있는 끝을 보여주지 않았나. 확률조작. 주사위 하나만 잘 쓰면 된다.
결국 소멸이니 삭제니 하는 것도 주사위로 할 수 있다.
마크 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연우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연우 님의 요청사항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마크 정이 돌아간 자리.
이연우는 아쉬운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 뭐 더 요구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서일까. 머리가 영 잘 굴러가지가 않았다.
***
마크 정은 이연우의 집을 나서자마자,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연우의 요구를 보고했다.
“이연우의 요구사항은 이걸로 끝입니다, 이사님.”
- 굉장히, 음, 소박하군.
“예. 그런데….”
마크 정은 망설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혹시 퇴사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셨습니까? 회사에 필요한 인적자원 아닙니까?”
- 하하.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퇴사해도 상관없어. 그는 생존주의자야.
위기에 대한 정보를 살짝만 흘려도 그는 행동할 것이라며, 웃음기를 섞어 말한다.
-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개인의 생존이 모두의 생존이 되는 법이지.
회사에 있든 없든, 이연우는 회사에 이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