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류보호회사 (116)화 (116/194)

오염

회사의 선전포고가 이상세계에 퍼졌다. 장소는 사후세계, 참여 집단은 전부, 날짜는 한 달 후. 예외는 없다.

지구 터지는 꼴을 보기 싫으면 전력으로 참여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에 이상세계가 숨을 죽였다. 공연, 사업, 숭배가 멈췄다.

반대로 그림자 속에서는 은밀한 움직임이 꿈틀대며 회사의 속내를 살폈다.

스파이가 정보를 빼내고, 이상개체가 침투하고, 특별한 효과로 회사를 염탐하고, 회사원을 설득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 아, 왜, 또. 발작을 하고 난리야.

- 진심이다. 진심이야. 돌겠네.

- 피해망상이야? 편집증이야? 사람도 대충 10년은 지나야 오염되기 시작하는데, 그걸 뭘 벌써 걱정하고 있어?

오염은 어느 정도 퍼진 정보라 그들은 회사의 각오를 조금쯤은 이해했으나 차마 공감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의심하며 머리를 싸매고 더 그럴듯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도를 찾았다.

- 그냥 우리들 눌러놓으려는 것 같은데?

- 사후세계로 제한했잖아. 전쟁을 이용해 사후세계를 지우려는 속셈 같아.

- 겸사겸사 한 번에 해치우려는 거겠지.

- 회사가 분노조절장애에 걸린 모양인데, 우리가 치료해줍시다.

회사가 진심이고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들의 눈 역시 돌아가 버렸다.

오랜만의 전쟁이다. 이는 기회였다. 잃거나 얻거나.

- 전쟁은, 돈이 된다!

- 대규모 전쟁? 이거 완전 작품 박람회 아니냐?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 오오! 지옥의 대악마시여! 제물을, 겁나 많은 제물을 바치겠나이다!

- 좋은데? 그동안 여파가 무서워서 못 써봤던 마법 쓸 기회잖아.

전운이 감돌았다.

이상세계가 폭풍 전의 고요에 잠겼다. 장례식을 기다리듯,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모든 집단에 드리워졌다. 사후세계로 이동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그리고, 멸망주의자는 웃었다.

- 하하! 축제다!

그런 때, 이연우는 멸망주의자의 거점에 잠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크 정의 호텔 방에 정보부의 요원이 왔다. 요원은 무슨 화장품이며 보형물 같은 것이 잔뜩 든 가방을 열고 이연우에게 다가왔다.

“웃지 마시고, 움직이지 마십쇼.”

“예.”

붓이 뭘 칠하니 피부색이 변하고, 눈매며 입매가 다르게 보인다. 거기에 점토가 붙어 윤곽 자체를 바꾸었다.

이연우가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그래서, 멸망주의자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요?”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고위 멸망주의자만 모여서 회의했습니다. 아마, 전쟁을 이용해서 무슨 사고를 터트릴 생각인 거 같은데.”

마크 정은 노트북을 두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해서, 이연우 님이 조사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심어놓은 스파이로 변장해서요.”

“스파이…. 저 연기 잘 못하는데.”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걸렸다가는 한바탕 싸우게 생겼는데. 이연우가 불안한 표정을 짓기 무섭게 요원이 혀를 찼다.

“가만히 있으십쇼. 분장 망합니다.”

“예.”

마크 정이 웃었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예?”

“미리 대화나 행동 습관을 따라 하기 쉽게 설정했습니다. 예, 아니요, 그게 말의 전부입니다. 다른 말만 안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할 만하지. 이연우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볼을 스치는 붓의 감촉을 느끼고 목에 힘을 빡 주었다.

그리고는 복화술 하듯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어눌한 발음.

“보상은 있습니까?”

특수조사원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긴 한데, 일이 일이다 보니 특수한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쉘터를 새로 구해주던가, 그런 거.

마크 정은 슬쩍 이연우를 보았다. 이연우의 상담기록은 한국지사와 본사로 올라가, 프로파일러들이 달라붙어 낱낱이 분석했다.

그 결과를 본 마크 정은 생각했다.

‘일을 맡아주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생존과 안전이 제일인 사람이다. 회사가 채워줄 욕망도 없고, 반대로 막 쓰다가는 회사가 해를 입을 양날의 검이다.

이미 본사에서는 정예요원 취급받는 이연우인 만큼 그들은 보상을 준비했다.

달그락-

마크 정이 철제 큐브를 꺼냈다. 복잡한 기계장치처럼 생긴 그것을, 퍼즐 풀듯 이리저리 움직이기를 잠시.

“선입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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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 열린 큐브 안에는 총알 한 발이 있었다. 평범한 총알 하나.

그 순간 이연우가 벌떡 일어나며 뒤로 펄쩍 뛰었다. 요원의 붓이 얼굴을 가로질러 못난 선이 그어졌다. 요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분장하는데 그러시면.”

하지만 이연우는 뻣뻣하게 서서, 총알을 노려봤다. 잔뜩 확장된 동공에 케이스와 총탄만이 비친다.

“그건.”

솜털이 삐죽 서고, 본능이 땡땡 울렸다. 이건 위험하다. 잘못하면 죽는다.

마크 정이 총탄을 꺼내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총탄이 황동색으로 매끄럽게 빛났다.

“평범한 총탄입니다. 상대가 어떤 개체든 사격 한 번 분량의 피해를 입히고, 어떤 간섭도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상개체의 간섭도 통하지 않아, 주사위로 판정을 굴릴 수도 없고, 빗물로 상처를 재생할 수도 없다.

이연우는 그것의 위력을 알아채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총 든 사람을 공격하면 될 일이야.’

그래도 비장의 무기로 쓸 수 있다. 이연우는 총을 찾았다. 저 총탄이 골드버그 클럽의 권총과 호환되지는 않아 보였다.

“총은 어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권총이다. 마크 정은 손수 장전까지 마친 후, 탁자 위에 총을 올려놓았다. 마크 정이 이연우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에 드십니까?”

“예, 뭐. 괜찮네요.”

말은 심드렁했지만, 목소리와 눈빛은 달랐다. 살짝 들뜨고, 반짝반짝 빛난다.

무려 선입금 아닌가. 이것만 있어도 죽기 전에 적을 죽일 가능성이 대폭 올라간다.

그쯤에서 요원이 한숨을 쉬며 무슨 물병을 건넸다.

“분장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다 지우고 오십쇼.”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준비가 끝났다. 이연우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얼굴이 달라졌고, 몇몇 도구를 이용해 체격까지 변했다.

‘이 정도면 반장님도 못 알아보겠는데.’

거울을 둘러보던 이연우가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 요원이 먹인 약물 때문에 변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말하지 마십쇼. 습관이 위험합니다. 예, 아니요, 이것만 말하세요.”

“예.”

평범한 총탄이 장전된 권총과 꼭꼭 접은 에코백을 안주머니에 숨긴 이연우가 호텔을 나섰다.

***

‘예, 아니오, 예, 아니오, 예, 아니오, 예, 아니오, 예.’

머릿속에서 말을 반복하며 찾아간 곳은 어느 캠핑장의 공중화장실이었다. 최근 들어 멸망주의자들이 모여서 머무는 캠핑장이라고 하는데, 스파이는 방금 빠져나갔다고 했다.

화장실에 핸드폰과 지갑 등을 두고서 말이다.

‘다 챙겼고.’

숨겨 놓은 물품을 챙긴 이연우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텐트 몇 개가 모여 있다. 꼬질꼬질한 인상의 멸망주의자들은 숯불에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연우를 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배 아파?”

“예.”

“새끼, 모임 간다고 긴장했네.”

“예.”

집게를 들고 고기를 뒤집던 멸망주의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인간을 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두 마디 이상 말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하긴 멸망주의자 중 제정신이 얼마나 있을까.

“이제 갈 준비하자. 탈취자가 포탈 열어줄 시간이야.”

멸망주의자들이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뭐가 들었는지 모를 상자가 쌓인 수레를 확인하고, 텐트를 접는다.

이연우는 가만히 한쪽에 서서 눈을 깜빡였다.

‘오늘 멸망주의자가 모인다고 했지. 우두머리급의 멸망주의자들이 발표하는 자리고, 나는 정보를 빼내기만 하면 되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위험하겠지만, 이연우는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조끼, 돌도 있고. 지폐도 있고. 주사위도 있지. 내 몸 하나는 충분히 빼낼 수 있어.’

그 순간이었다.

돌연 푸른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서는 탈취자가 손만 쓱 내밀었다. 손에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는데, 문자가 쓰여 있었다.

- 20분간 열어둠. 빨리 이동할 것.

10초 동안 꺼내두었던 손이 돌아갔다.

“가자!”

멸망주의자들이 움직였다. 수레가 포탈을 넘어갔다. 이어 사람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이연우 역시 그들 사이에 섞여 포탈을 넘었다.

세상이 변한다.

어딘가의 섬이다. 푸른 하늘과 바다가 펼쳐져 있고, 흔적만 남은 집터를 중심으로 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이연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가장 안쪽의 사람들을 보았다.

‘저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레드 등급의 수배자다. 술을 마시고, 누워 있고, 담배를 피우고, 핸드폰을 보고, 늘어진 모습을 보였지만 생존본능이 경종을 땡땡 울렸다.

‘태도만 저렇지, 경계하고 있어. 뭔가 공격이 느껴지면 움직일 준비를 마쳤어.’

이만큼 대놓고 모였다. 다른 집단의 주의를 끌려고 한 행동인가?

그때 한국에서 온 멸망주의자들이 부지런히 짐을 옮겼고, 이연우를 비롯한 몇은 인파 바깥에 대충 주저앉았다.

인파의 가장 안쪽은 우두머리급의 인물이, 그다음은 이상개체를 지닌 자들, 가장 바깥은 그들처럼 이상개체도 없는 멸망주의자 중 나름 목소리 큰 사람들이 있었다. 그 아래는 일하고 있었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전쟁 일어난다는데. 우리가 뭘 할지 정해줄 거 같아.”

“잘 됐지. 세상을 불태우면 재밌잖아.”

“나는 회사만 망해도 좋아. 빌어먹을 놈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이연우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회사가 심은 스파이는 원래 대화하지 않는 성격을 연기했으니까.

시간이 지났다.

멸망주의자는 점점 많이 모여들었고, 일대의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이연우는 이미 감각이 곤두섰기에, 그것을 정확히 포착했다. 미래의 이연우가 비슷한 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정보전.’

과연, 핸드폰을 보고 있던 멸망주의자가 고개를 들었다. 멸망주의자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기묘한 전자음.

“아, 더는 못 막겠다. 그냥 지금 발표하지?”

“그럽시다.”

안경을 쓴 멸망주의자가 일어섰다. 확성기를 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경이 번쩍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

삐이이, 확성기가 비명을 질렀다가, 그의 목소리를 담았다.

“한 달 뒤에 사후세계에서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지구를 타격합니다. 늘 하던 대로 알아서 말입니다.”

귓가에 날카롭게 박히는 목소리.

순간 멸망주의자들의 얼굴에 광기에 가까운 희열이 담겼다. 이곳에 남은 자들은 한 번 걸러진 자들이었다. 이상기후 때도 멸망을 바라던 자들.

진정으로 세상이 불타기를 원하는 자들이 기회를 잡았다.

거기에 안경 쓴 멸망주의자가 불을 붙였다.

“이상기후를 구성하던 개체 중 몇 개를 우리가 손에 넣었는데. 나눠주겠습니다. 그거 받아 가시고, 뭉칠 사람은 남아서 뭉치세요.”

그 순간 이연우는 확신했다.

‘거짓말. 아니, 미끼야. 양동작전?’

덜 위험한 멸망주의자가 지구를 타격하는 동안, 위험한 멸망주의자들은 다른 것을 노리는 느낌.

저 이상기후의 구성개체조차 미끼다.

‘고작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어. 진짜는 따로 있을 텐데.’

이연우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가, 접힌 에코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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